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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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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서울 놈 이야기(최낙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1-04-21 16:54
조회
837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아버지는 황해도 사람, 어머니는 경기도 사람이지만 저는 서울 사람입니다. 비록 변두리를 전전하면서 생활해왔다고 해도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행정구역상 서울에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문득 ‘서울 놈들은 비만 오면 풍년이라고 한다’는 속담이 생각납니다.


#1. 등신 같은 서울 놈


 거의 30년 전, 제가 따르던 선생님이 늦은 나이에 수중 잠수의 매력에 빠져 저를 바다로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그해 여름, 경북의 수중 잠수 포인트인 ㅇㅇ군 바닷가에서 일주일 가까이 지낼 때였습니다. 선생님이 가자고 해서 따라는 갔지만 물을 무서워하는 저는 항상 물 밖에만 있었습니다. 선생님과 일행들이 바다 속에서 잠수를 하는 동안 저는 박찬호 선수의 메이저리그 중계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선생님은 그 지역 수중 잠수사들로부터 환영을 받았습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수와 일행이라는 이유만으로 저 역시 따뜻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일정이 마무리되고 서울로 올라가기 전날 석별의 술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20명 가까운 사내들의 술잔을 부딪는 소리가 잦아질수록 분위기는 고조되었습니다.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고 서로의 무용담을 과시하느라 왁자지껄했습니다. 지역 잠수사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고향을 사랑하는지, 서울과 비교해 이곳이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지 하는 자랑에 열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다소 위험할 정도의 격한 고향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지만 “다음에 서울에서 한번 뭉쳐 보자”는 말로 자리가 정리되었습니다.


 그렇게 자리를 파하고 술집 밖으로 나오는 순간 누군가 제 팔을 잡았습니다. 지역 잠수사들의 막내쯤 되는 20대 젊은이였습니다. 그가 느닷없이 제 귀에 대고 말했습니다.


 “서울에 계신 각하가 합천에 내려와 구속될 때까지 뭐 했십니까?”


 당시 구속된 각하는 전두환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정색하며 한마디를 붙였습니다.


 “서울 놈들은 다 등신들 아입니까?”



사진 출처 - freepik


#2. 답답한 서울 놈


 얼마 전에 친구 H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저와 H는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떨어져 살고 있지만, 저는 서울 시민이고, 그는 oo도민입니다. 그와 30년 가까이 친구로 지내왔습니다. 각자 결혼을 하고 생활 반경이 달라지면서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짬짬이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주변에 경조사가 있으면 만나곤 했습니다.


 겉으로만 요란하고 속은 물렁물렁한 저와는 반대로, H는 원만한 성격에 말수는 적지만 속은 아주 단단한 사람입니다.
두어 달 만에, 서울시장 보궐선거 바로 전날 전화를 걸어온 그의 첫마디는 아주 일상적이었습니다.


 “요즘 어때?”
 “그렇지, 뭐...”


 이후에 그는 주변 친구들의 안부나 돌아가신 은사님들과의 추억담 같은 이야기들을 한참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가 왜 전화를 했는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을 잘랐습니다.


 “안 하려고 했는데, 아내한테 이끌려 사전투표했어.”


 열렬한 문재인 정부 지지자인 그는 그제서야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서울은 어떨 것 같아?”
 “나야 잘 모르지...”


 무덤덤한 제 대답에, 그는 답답하고 초조한 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 이 친구, 서울 사람이...”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 주간으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