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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의 세번째 실패와 진보의 재구성(이재성)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1-05-26 16:59
조회
1295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검찰개혁은 물 건너갔고 공수처는 거꾸로 칼을 들었다. 소득불평등을 해결하겠다는 약속은 사상 최대로 벌어진 자산불평등의 격차로 돌아왔다. 전 국민의 마음이 욕망과 불안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 중대재해법은 누더기인 채로, 오늘도 일하는 사람들이 속절없이 죽어 나간다. 민생과 개혁, 모두에서 실패했다. 몇 가지 공이 없지 않으나 과가 그것을 덮고도 남음이 있다. (성과를 굳이 언급하지 않는 이유다) 민주당과 진보는 샤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처지가 되었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한 것처럼 “낡은 것은 죽어 가는데도 새로운 것은 아직 탄생하지 않”은 “위기”의 “공백 기간”이 길어지면서 “다양한 병적 징후들이 출현하”고 있다.


민주당의 실패 공식


 리버럴 정권의 개혁 실패 방정식에는 모든 문제를 관통하는 공식이 있다. (쁘띠부르주아 정당이라는) 계급적 한계가 철학의 빈곤과 디테일의 결핍, 그리고 자신감 부족을 낳고, 작은 비판에도 주춤거리는 원인이 된다. 부동산, 최저임금, 공공기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정책이 같은 경로를 밟았다. 수사-기소 분리라는 지름길을 두고 공수처 설립이라는 우회로를 택한 검찰개혁도 큰 틀에서 다르지 않다. 개혁이 수포로 돌아가는 임기 후반기가 되면 청와대와 내각을 관료로 채운다. 세 번이나 집권한 지배블록의 일부로서 기득권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소심함이 과감한 개혁을 어렵게 한다. 조선일보와 국민의힘으로 대변되는 보수세력의 맹렬한 저항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일 테지만, 이는 상수에 해당하는 것으로, 특히 2016 촛불 이후 이들이 역사상 가장 취약한 상태였던 점을 고려하면 주된 원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요컨대, 문재인 정부의 실패는 리버럴 집권 세 번째의 실패이고, 한국의 리버럴이 관료들을 장악하고 부릴 수 있을 만한 의지와 실력이 없다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다.


반민주당전선의 좌우연합적 성격


 끼인 존재로서 리버럴은 좌우 모두로부터 욕을 먹게 돼 있다. 비판을 최소화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다수가 원하는 정책을 다수가 원하는 방식으로 다수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사람들이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초기에 잠깐 희망을 보여주는 듯했으나, 결과적으로 문재인 정부는 실패했고, 지금은 반민주당전선이 상당히 두텁게 형성돼 있다. 몇 가지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마치 노무현 정부 말기 증상을 보는 듯하다.


 민주당이 여당이 되면 반민주당전선은 광범위한 좌우연합전선이 된다. 정당으로 보면 국민의힘과 정의당, 원외까지 확장하면, 정통 좌파라고 할 수 있는 노동당까지 포괄한다. 보수가 집권하면 보수 내에서 비판이 나오지 않지만, 리버럴 비판 대열에는 보수와 진보가 늘 함께한다. 이것이 민주당 지지자들이 느끼는 기울어진 운동장의 비밀이자, 공정하지 않다고 느끼는 현상의 뿌리다. 특히 스스로 진보라고 생각하는 일부 보수적인 민주당 지지자들의 격렬한 반발이 이어진다. 정의당을 비롯한 진보정당, 한겨레와 경향신문을 비롯한 진보언론에 대한 공격은 주로 이들에 의해 이뤄진다.


‘켄타우로스’ 민주당


 민주당은 지배블록의 일부이지만, 지배블록의 일부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는 1987년 대선 때부터 지난하게 이어져 온 진보진영의 숙명 같은 난제다. 마키아벨리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민주당은 켄타우로스(반인반마)적이다. 지배블록의 일부이면서도 서민정당을 표방하며 실제로 그런 경향을 일부 갖고 있다. 조중동과 국민의힘은 진보정당을 일부러 무시하며 민주당이 진보의 전부인 것처럼 프레임을 만들고, 민주당을 비난하여 진보를 악마화한다. 샤이 민주당과 샤이 진보가 혼용되는 현실은 이 프레임이 대중적으로 안착했다는 걸 말해준다. 민주당이 욕을 먹으면 진보가 욕을 먹는 구조다. 진보가 민주당을 비판하면 진보가 커지는 게 아니라 보수가 커진다. 대통령제와 소선거구제, 그 결과인 양당 정치의 한계라고 할 수 있겠지만(그래서 여전히 제도개선 투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더 중요한 건 비판의 내용과 방향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로남불 프레임은 악당에 유리한 게임


 그런 의미에서 류호정 정의당 의원과 문정복 민주당 의원의 ‘당신 논란’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누가 먼저 반말을 했는지, 말의 맥락을 못 알아들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도자기를 들여오면서 외교행낭을 이용했다는 잘못된 팩트를 거론했다거나 개인적으로 자리에 찾아가 항의한 것도 부적절한 행위였지만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대목은 정의당이 거대 양당의 도덕성 경쟁에 무비판적으로 편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도덕성 경쟁은 야당일 때 민주당이 쓰던 방식이다. 상대적으로 덜 기득권이어서 더 깨끗하다고 마케팅하는 방식인데, 이는 필연적으로 내로남불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노무현과 노회찬도 이 프레임의 희생양이었다. 정의당도 남의 얘기가 아니다. 류호정 의원도 수행비서 해고 논란으로 홍역을 치르지 않았나.



지난 13일 국회 본회의에서 김부겸 국무총리 후보자 임명동의안 표결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 문정복 의원(왼쪽)이 정의당 배진교 원내대표의 의사진행발언에 대해 항의하자 정의당 류호정 의원(오른쪽)이 문 의원에게 맞대응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내로남불 프레임은 도덕 기준이 높은 진보가 필패할 수밖에 없는 게임이다. 내로남불 프레임이 특히 문제인 것은 뻔뻔한 악당들이 면죄부를 받게 돼 있기 때문이다. 악당들은 나쁜 짓을 해도 사회적 관심을 끌지 못한다. 악당을 비난하며 자신은 악당이 아닌 것처럼 행세하던 사람들이 조그만 잘못에도 대역죄인처럼 비난받는다. 이 과정에서 민생은 사라지고 무의미한 정쟁만 무한 생산된다. 도덕성 경쟁이 정책 경쟁의 지우개 노릇을 하는 셈이다. 도덕성 경쟁을 하지 말라는 게 도덕성을 포기하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도덕성을 정치적 상품으로 팔지 말라는 것이다. 2000년 총선시민연대 이후 정치개혁 운동으로 시작된 도덕성 경쟁은 이제 그만할 때가 되었다. 진보가 내놓아야 할 상품은 따로 있다. 기득권에 기반한 정당들이 낼 수 없는 진보적 정책이다. 우리가 덜 타락했다고 주장하지 말고 우리가 더 유능하다고 말해야 한다.


탈이념 시대의 진보


 4·7 재보선에서 적지 않은 2030이 국민의힘을 선택했다고 해서 이들이 보수가 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기존의 이념지형에서 벗어나 있다. 보수든 진보든 그건 기성세대의 잣대일 뿐이다. 젊은 세대가 진보를 기피한다면 젊은 세대가 잘못된 게 아니라 진보가 잘못된 것이다. 민주화 운동의 훈장이 진보의 증거가 될 수 없다. 과거에 연연하는 진보는 더이상 진보가 아니다.


 젊은 세대가 원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차별받지 않고 공정한 게임의 룰에서 경쟁하며 쾌적하고 안전하게 살 권리를 보장받는 것이다. 이것은 보편적 인권에 해당하는 것으로 젊은 세대만의 요구는 아니다.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국가가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스스로 돈을 추구하는 경향은 어쩌면 당연한 생존본능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진보는 지금 바로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젊은이들의 역사 경험치가 낮다고 탓하는 방식은 전형적인 꼰대 스타일이고 스스로 미라가 되는 길이다. 지난 재보선에서 청년들에게 돈 몇 푼 더 주겠다는 박영선 서울시장 후보의 공약은 청년들을 동냥이나 바라는 거지 취급하는 최악의 접근법이었다.


진보에 부족한 것은 진보


 정의당은 어떤가. 민주노동당 시절 각종 진보적 의제로 정치판에 신선한 충격을 던지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정책만으로 보면 정의당보다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더 진보적으로 보인다. 민주당 의원들의 말에 토를 달듯 ‘빨간펜’ 선생 노릇을 한다거나 앞의 사례처럼 언쟁을 하는 경우만 눈에 띈다. 장애인, 소수자 인권 등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PC)’ 투쟁은 중요한 진보적 과제이지만, 대중정당의 대표상품이 되어선 곤란하다. 피시의 전면화는 실용주의를 추구하는 젊은이들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 피시는 교육현장과 언론 등을 통해 점진적으로 바꿔나가야 할 문제지 대중정당이 일상적으로 수행할 정치적 과제는 아니다. 정의당이든 노동당이든 사회경제적 문제에서 민주당과 차별화하는 진보적인 정책을 통해 유능할 것 같다는 인정을 받아야 수권정당이 될 수 있다.


 노회찬은 이렇게 말했다. “늘 그렇지만 문제는 세상이 아니라 진보 자신이다. 지금 진보정당에게 부족한 것은, ‘진보’다. 부족한 진보를 훈장과 족보로 가릴 수는 없다. 세상을 진보시키기 위해 자신이 먼저 진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이다.”(<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노회찬, 작심하고 말하다>) 2014년에 나온 책이지만 여전히 옳은 말이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