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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은 왜 국가유공자가 아닌가(이찬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1-05-21 10:45
조회
1281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국가유공자


 「국가보훈기본법」에서는 “일제로부터의 조국의 자주독립, 국가의 수호 또는 안전보장,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의 발전, 국민의 생명 또는 재산의 보호 등 공무수행”(제3조)에 공헌하고 그 과정에 희생한 이를 ‘국가유공자’로 규정해 기리고 있다. 알려진 국가유공자 가운데 한 사람이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김구’이다.


 그런데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김구 못지않은 - 보기에 따라 그 이상 가는 - 역할을 하고도,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 약산 김원봉(1898~1958?)이다. 김원봉은 왜 여전히 유공자가 아닐까.


김원봉이라는 사람


 김원봉은 이회영 형제와 이동녕 등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 재학 중이던 1919년 11월에 윤세주 등과 함께 급진 민족주의적 무장단체인 의열단을 조직했다. 의열단에서는 일제라는 거대한 폭력 조직에 맞서 무장 항일운동을 벌였고, 1928년 10월 이후로는 일본의 축출(驅逐倭奴), 조국의 광복(光復祖國), 계급의 타파(打破階級), 토지의 균등(平均地權)를 핵심으로 하는, 급진 민족주의적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했다.


 그 과정에 중국의 공산당은 물론 국민당 정부와도 협력했다. 의열단 지도부의 상당수가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품인 황포군관학교(1924.1~1931.10) 출신이었던 바람에, 그가 국민당 정부와도 함께 했던 것은 자연스러웠다. 1932년 10월 김원봉은 의열단의 항일정신과 연계시키고 그 정신을 계승하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해 중국인 민족해방 혁명가 및 조선독립을 위한 운동가를 양성했다. 이 학교가 국민당 장제스의 최종 결재를 거쳐 설립되었던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김원봉은 국민당 정부와도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하지만 김원봉의 눈에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에 비해 항일운동에 소극적이었다. 그런 태도에 실망하면서, 중국 공산당과 함께 더 급진적 민족해방운동을 했다. 노동운동과 독립운동을 연결시키면서, 조선공산당 운동을 지원했다. 공산당 운동이 항일 투쟁에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늘 ‘항일’과 ‘독립’을 지향했다.


 이를 위해 상대적으로 우파민족주의자였던 김구와도 가까웠다. 1939년 5월에는 독립을 위한 민족주의적 경각심을 일깨우고 확대하기 위해 김구와의 연명으로 “동지·동포 제군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처럼 김원봉의 공산주의적 태도는 항일운동과 조선 광복의 수단에 가까웠고, 항일과 독립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는 적절히 타협할 수 있는 실용주의자이기도 했다. 1)


 무엇보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한 광복군의 부사령(1942.12.5~), 임시정부의 국무위원과 군무부장(1944.4.22~)을 지냈다. 임시정부 군사방면의 최고 책임자였다. 항일운동에 그만큼 한결같이 열렬한 태도를 견지했던 이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일관되게 무장 투쟁을 해온 그의 눈에 임시정부는 다소 뜨뜻미지근해 보이기도 했다. 임시정부가 항일을 위한 구체적 실천이 없다는 이유로 비판하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우파에 가까웠던 김구와 항일운동 방법론상의 차이로 갈등하기도 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 및 미국 전략사무국(OSS)과 더 친밀했던 우파민족주의 세력(가령 한국독립당 계열)들과 마찰을 빚었다. 조국의 광복,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에 대한 열망이 너무 명확하고 실천이 늘 구체적이었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 kbs 인물현대사


남북 모두에서 버림받은 이


 해방 이후 김원봉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은 미 군정의 요구 때문에, 김구가 그랬듯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귀국 후 여운형, 박현영 등과 함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공동의장 자격으로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모스크바삼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 이후 임정을 매개로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한 좌·우파 민족주의자들의 연대도 깨져 갔다.


 친미적 이승만이 정권을 잡은 해방 정국에서 그는 갖가지 수난을 당했다. 1947년 미 군정 당시 수도경찰청 노덕술에게 체포되어 뺨을 맞기도 하고 장택상 청장에게 끌려가 수모를 겪었다. 중국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일을 조국에서 겪으면서 김원봉은 서러움에 3일 밤낮을 울었다고 한다.


 미 군정이 민전 시민대회를 금지시키고 민전을 포함한 좌파 단체를 폐쇄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신변의 위협마저 느낀 김원봉은 민전 산하단체 대표 80여 명과 함께 1948년 4월 초순 월북했다. 1948년 4월 14일 개최되는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조선의용대 동지였던 연안파 인물들이 건재하고 있는 북한에서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김원봉은 초기 북한에서 국가검열상,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그러나 결국 북에서도 밀려났다. 남쪽 출신이라는 것이 그의 최대 약점이었다. 통일을 명분으로 제국주의 수정주의자들과 손잡고 한국의 중립화를 추구한다는 이유로 국제간첩으로 몰려 1958년 무렵 김일성 정권으로부터 숙청당했다. 평생 죽음을 무릅쓰고 민족의 이름으로 조국의 광복과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독립운동가 김원봉은 그렇게 제발로 찾아온 남과 북 모두에서 배반자 낙인이 찍혔고, 잊혀졌다.


서로 다른 공산주의


 국가유공자의 근간인 “일제로부터의 조국의 자주독립”에 김원봉 이상으로 공헌한 이를 찾기 힘들다. 하지만 초기 북한의 국가 건설 과정에 기여했다는 사실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이때 한 가지 구분해야 할 것은 김원봉이 활동하던 당시의 공산주의는 6.25 전쟁과 전후 냉전기 등을 거치며 이념 갈등이 체화된 이후의 공산주의와 다르다는 사실이다. 김원봉의 공산주의적 사고는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수단에 가까웠지, 그 자체가 지상 목적은 아니었다. 김원봉이 독립운동의 양대 지도자인 김구와 공생했던 것이나, 중국 공산당에 대립했던 국민당과도 함께 했던 것도 그 증거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 책임자를 지낸 것도 그 결정적 증거이다.


 김구가 우파민족주의자라면, 김원봉은 좌파민족주의자였다. 오늘의 눈으로 보면, 이때의 좌·우에는 독립을 위한 방법론적 차이는 있지만, 독립을 위한 헌신의 정도에서 차이나 차별을 두기 곤란하다. 김구가 대표적인 독립유공자이듯이, 김원봉이 독립유공자가 되지 못할 이유도 없다는 뜻이다. 21세기의 눈으로 보는 공산주의와 20세기 전반 일제강점기의 눈으로 보는 공산주의는 다르다. 20세기 전반은 중국에서도 국민당과 공산당이 서로 합작하며 항일운동을 같이하던 시절 아니었던가. 심지어 중국인 쑨원(손문)과 장제스(장개석)조차 대한민국 1급 국가유공자로 인정하고 있지 않던가.


‘자유중국’을 버리고 ‘중공’과 수교한 나라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문화하고 있다.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한다”고도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도 임시정부 군조직의 수장이었던 김원봉을 수용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남측 출신이라는 이유로 북에서도 버림받았던 김원봉을 품지 못하면서 어찌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를 말할 수 있을까.


 일제강점기의 공산주의와 지금의 공산주의를 구분해야 한다. 설령 지금의 공산주의라고 해도, 자본주의를 능가하는 공산주의라는 것이 어디 있기나 하던가. 더욱이 한국 정부가 ‘자유민주국’ 대만과 단교하고 ‘공산국’ 중국과 수교한 뒤 비할 데 없을 경제 교류를 하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일부 연구자들의 책상 위에서만 전승되고 있는 그의 뜨겁고 지도적인 독립투쟁사를, 그의 공과를 포함하여 공론의 장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1)  이정식·한홍구 엮음, 『항전별곡: 조선독립동맹자료1』(거름, 1986), 135쪽; 한상도, 『대륙에 남긴 꿈: 김원봉의 항일역정과 삶』(역사공간, 2006), 70-84쪽 참조.

이찬수 위원은 현재 레페스포럼 대표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