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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의 겉과 속, 황교안 대표의 신앙관(이찬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06-05 10:10
조회
1125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정체성(identity)은 일정 기간 변하지 않고 지속된다고 여겨지는 자신만의 지속적이고 고유한 성질이다. 나를 나 되게 해준다고 여겨지는 어떤 정신적 특성이다. 정체성은 본래 타자와 지속적으로 공유하며 형성되는 가변적인 것이지만, ‘이것이 나의 정체성’이라고 규정된 이후에는 변화 보다는 유지와 강화를 위한 투자를 더 한다.


 정체성을 형성하고 강화시키는 배후의 하나가 종교다. 브루스 링컨이 정리한 바에 따르면, 종교에는 내적 신앙과 관련한 담론, 의례와 관련한 실천 행위, 담론과 행위에 공감하는 이들의 공동체, 공동체를 제어하는 제도의 네 영역이 있다. 이들 네 영역이 중층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각 영역을 변화 또는 강화시켜나간다.


 이 때 중요한 영역은 ‘내적 신앙과 관련한 담론’이다. 종교학적으로 ‘신앙’은 현실 너머 혹은 근원을 상상하며 추구할 줄 아는 인간의 내적 능력을 일컫는 말이지만, 그 내적 능력이 언어와 같은 외적 표현과 단순 동일시되면서, 내적 역동성은 사라지고 경직된 언어만 남는 경우가 많다. 언어화된 교리나 도그마들이 내적 신앙의 모든 것인 양 획일화하면서 다른 표현들에 대해서는 배타하는 흐름도 형성된다. 새로운 것을 수용하고 표현할 줄 아는 인간의 내적 능력은 쇠퇴하고, 외적 형식이 지배하는 일방적 사태가 종교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곤 한다. 내적 신앙이 폭력적으로 외화하지 않도록 하는 종교 교육과 훈련이 병행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앙의 표현 방식에도 정도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성경에 이런 말이 있다.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3,28) 인종이나 민족차별, 계급차별, 성차별을 당연시하던 시절에 나온 혁명적인 선언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면서, 인류는 본래 하나이니 민족, 성, 계급에 차별을 둘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모두 하나’라는 근본적인 사실이 이 문장의 핵심인 것이다. 그렇다면 차별받는 사람을 도리어 포용하면서 사회적 죄인에게서 무죄를 선언했던 예수의 삶과 사상을 새롭게 본 뒤 자신의 삶과 세계관도 예수처럼 변화되었을 때, 그 때가 내적 신앙의 올바른 기독교적 표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모두가 하나’라는 원천적 사실, 따라서 계급, 인종, 성별에 따른 차별은 있을 수 없다는 근본적 실천은 외면하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을 쓰느냐 쓰지 않느냐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예수라는 말을 모르거나 쓰지 않는 사람은 자기들과 하나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그들을 차별한다. 자신만의 경계를 세우고, 자신과 종교적 표현 방식이 다른 사람은 자기들이 세운 경계 밖으로 몰아낸다. 종교의 이름으로, 신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차별하는 행위를 정당화한다. 그렇게 정당화하면서 자신의 얄팍한 종교적 정체성도 강화시켜나간다. ‘모두 하나’라는 혁명적 선언은 사라지고, 타자에 대한 배타성을 동력으로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유지 및 강화시켜 나가는 현실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 뿐이던가. ‘하나님은 한 분’이라면서 사실상 그 하나님을 다신교적 최고신처럼 만들어놓는다. 기독교의 하나님이 불교의 부처님이나 이슬람의 알라보다 우월하다는 정서에 휘둘린다. ‘하나’라는 말의 속뜻을 새겨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신이 하나’라는 말은 사실상 ‘신이 모든 것’이라는 뜻이다. 신은 있지 않은 곳이 없다는, 즉 무소부재하다는 뜻이다. 벽돌 건물로 만든 예배당 밖에는 신이 없다는 말인가. 불교는 신이 없는 허무한 공간이라는 말인가. 내 안에만 신이 있고, 네 안에는 없다는 말인가. 내적 신앙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데도 합리적이고 건강한 훈련이 필요하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이미 알려진 사실이거니와,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지난 부처님오신날 한 사찰의 봉축법요식에 초청받아 참석하고는 법회 중 수도 없이 했어야 했을 합장 한 번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각계의 비판이 쏟아지자, 결국 자유한국당 내부 방송에 출연해 “미숙하고 잘 몰라서 그랬다”며 불교계에 사과했다. “불교 등 다른 종교를 존중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며 이에 따른 행동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표’를 의식해서 그랬던 뭐든, 그저 버티던 지난 며칠간의 태도에 비하면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사과란 무엇이던가. 사과란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빈 뒤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거나 그런 일이 없을 것 같은 정도로 변했을 때 쓸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황 대표가 정말 자신의 행동을 잘못이라고 생각했을지는 여전히 의심스럽다. 불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계를 정말 존중할 줄 아는 태도가 갖추어져 있는지 그동안 황 대표가 보여준 바가 없기 때문이다.


 사과의 진정성은 황 대표의 종교관, 신앙관이 성숙해질 때 확보된다. 그의 신앙관이 성숙해진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는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오늘의 표현대로 하자면 한국인도 이슬람계 외국인 노동자도, 기독교인도 불교인도 따로 없이, 모두가 귀하다는 사실을 마음으로부터 깨닫고, 실제로 차별 없이, 자신과 같은 수준으로 대할 줄 알 때 입증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정도의 변화가 과연 가능할지는 물론 대단히 의심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 대표가 야당 원외 대표에서 그 다음 단계로 나가고 싶으면, 이제부터라도 정말 자신과 다른 이, 특히 다른 종교인들을 마음 깊은 곳에서 존중할 줄 아는 훈련을 해야 한다. 변절한 것 아니냐며 욕먹을 각오로 자신의 경직된 종교적 정체성을 바꿔나가야 한다. 황 대표의 사과에서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을 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렇지 못한 채 개인의 정치적 야망만을 따른다면, 기독교계는 물론 한국 사회 모두에 불행한 사태로 이어질 것이다. 오랫동안 신학과 불교학을 공부하고 이제는 평화학의 길에 들어선 이의 진심어린 조언이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


* 이 글은 <민중의 소리>에도 동시 게재되었습니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