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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로 검찰 읽기 ①(이찬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05-24 17:38
조회
930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인간은 내적으로 경험한 것을 외적으로 표현한다. 그 외적 표현이 자신이나 타자의 내적 체험을 자극하고 불러일으키는 등 다시 내면에 영향을 준다. 누군가 좋아하는 감정을 “너를 좋아해~” 라는 언어로 표현하든지, 예쁜 꽃 한 다발 선물하는 행동으로 표현하든지, 어떤 식으로든 외적으로 표현한다. 가령 상대방이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이의 내면에 공감하면 둘은 친구나 연인이 된다. 그들만의 삶의 질서를 만들어간다.


 종교의 원리도 비슷하다. 누군가 현실의 근원 혹은 너머의 세계에 대한 특별한 체험을 외적으로 표현하고, 그 표현에 공감하는 이들이 모이면 집단이 형성된다. 그 집단은 그들만의 약속을 통해 공동체를 형성해간다.


 종교학자 부르스 링컨의 정리에 따르면, 그 외적 표현은 크게 네 가지 영역으로 나뉜다. ① 내적 신앙과 관련한 담론, ② 의례와 관련한 실천 행위, ③ 담론과 행위에 공감하는 이들의 공동체, ④ 공동체를 제어하는 제도. 이들 네 영역이 중층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각자의 영역을 변화 또는 강화시켜나간다. 이것이 종교현상이다.


 어떤 신념이 있다거나, 특정 교리체계에 근거한 인간관계에 매여 있다거나, 어떤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의식은 종교적 자기 정체성의 일환이다.


 이때 종교 현상의 핵심은 내적 체험의 세계이다. 그 내적 체험은 원천적으로는 언어를 넘어서지만, 굳이 언어로 번역하면 사랑, 헌신, 경외, 기쁨 등으로 나타난다. 이런 가치와 태도는 자신을 비워 타자를, 특히 약자를 품는 윤리적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 종교적 선각자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사랑, 경외, 헌신, 이런 가치 지향의 실천이 종교의 핵심이다. 원칙적으로는 이러한 사실에 동의하며 사람들이 모이면서 종교 공동체는 시작된다. 모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조직과 제도도 만들어진다. 본래 이 조직과 제도는 사랑이나 자비와 같은 가치를 구체화시키기 위한 수단이며, 어디까지나 수단에 머물러야 한다.



사진 출처 - adobe stock


 하지만 점차 조직과 제도 자체가 원래의 체험 혹은 진리와 동일시되어간다. 핵심은 사랑과 자비, 기쁨 등으로 번역 가능한 내적 체험의 세계이지만, 그 내적 체험이 언어화하고, 그 언어 자체가 절대시 되면서 본말이 전도되곤 한다. 종교적 정체성도 이런 외적 표현이 내면화되면서 형성된다. 가령 유대-그리스교, 이슬람에서 견지하는 유일신 사상, 이에 입각한 협의의 우상숭배 금지 조항은 본래 사람이라면 현실에 덜 휘둘리면서 가장 중요하고 근원적인 가치에 충실해야 한다는 요청이지만, 그것이 점차 그런 가치에 대한 언어적 표현, 그 교리적 표현에 동의한 이들의 조직 등에 대한 충실로 둔갑한다. 문자적 교리라는 것도 언어로 표현된 신념 체계(beliefs)의 일부이지만, 그것이 하느님 같은 절대 진리 자체와 동일시되고, 그 동일시가 다시 각 지역의 문화적 삶의 방식과 만나면서 강력한 집단적 정체성의 근간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 집단적 정체성에 반한다고 여겨지는 세력이나 사람에 대해서는 직·간접적 차별을 한다.


 물론 예수나 붓다 같은 종교적 천재들의 일차적 메시지에서는 이러한 집단주의가 발붙일 여지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 메시지가 전승되고 여러 사람들이 모여 제도화되어가는 과정에 제도의 유지와 강화 자체가 선각자들의 메시지 자체인 것처럼 간주되면서, 그 안에 타자를 받아들일 공간은 축소되고 스스로 변화할 가능성은 점차 사라진다.


 그 사례 중 하나로 ‘거룩함’의 개념을 볼 수 있다. 가령 기독교에서 자주 쓰이는 개념 중 하나가 ‘거룩함’ 또는 ‘성스러움’이다. 구약성경에 보면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기 19:2) 라는 말이 나온다. 기독교인에게는 이 말이 당연한 말처럼 보일 수 있지만, 따져 보면 생각해 볼 것이 많다.


 이때 ‘거룩함’이란 거룩하지 않은 어떤 것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거룩하지 않은 것은 부정한 것, 더러운 것이 된다. 그래서 거룩함은 부정한 것과의 분리가 된다. 거룩함을 실천하려면 부정한 것을 버려야 한다. 집단적 관례에 어긋나는 행동을 ‘거룩’의 이름으로 차별하고 심지어 처단하는 일까지 벌어지곤 하는 것이다. 본래는 안과 밖이 정결한 삶을 살라는 요청이지만, 정결하지 못하다고 간주되는 세계를 부정하고 배타하고 차별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정결함을 유지하는 역설이 진행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예수는 ‘거룩’이라는 말을 쓴 적이 없다. 대신 ‘자비’라는 말을 썼다: “아버지가 자비로우시니 여러분도 자비로우시오.(누가복음 6:36) ‘거룩’이 부정한 것과 분리의 형태로 나타나는 데 반해, ‘자비’는 부정한 것을 포용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런데 ‘거룩’을 내세우던 이들은 예수가 부정한 것(가난한 이, 병든 이, 여성...)을 포용해 ‘거룩’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예수를 차별하고 급기야 사형까지 시켰다.


 문제는 예수를 따른다는 이들도 예수 메시지의 근간인 사랑과 자비 등은 뒷전으로 밀어내고 현 집단을 유지하는 조직과 제도 등을 중심으로 삼으면서 조직과 제도에 충실한 행위를 거룩함의 실천으로 간주해오고 있다는 데 있다. 이런 태도가 자기중심적 배타성으로 나타나고, 자기 집단의 관례적 정체성을 훼손한다고 여겨지는 어떤 세력에 대해서는 거부하거나 저항한다.

 물론 종교인들 중에도 이러한 근원적 사실을 성찰할 줄 아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이 더 많다. 이것은 좁은 의미의 기독교(개신교)만의 문제는 아니다. 종교 전반에서 드러나는 근원적인 문제이다. 이런 모순적인 현상에 대해 양식 있는 이들의 비판적 목소리들도 커져가고 있는 중이다.


 다른 조직이나 집단은 어떤가. 가령 법조계, 즉 법원이나 검찰 분야는 어떤가. 법·률 본연의 의미에 충실한가. 정당은 정치 본연의 정신을 구현하는가. 의료계나 교육계는 얼마나 다른가. 다음 기회에 전술했던 종교의 모순적 현실을 법조계의 현실을 조망하는 거울로 삼아보고자 한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레페스포럼 대표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