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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 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권혁용(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태중(병원장),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명예교수), 이재승(건국대학교 법전문대학원 교수),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 글을 씁니다.

존중과 희망이 있는 세상을 기대하며-학술기관 통합 발표를 보고-(오항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6-09-29 11:22
조회
834

오항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오래전부터 인간다움, 휴머니즘, 인권이 등장한 것은 인간이 비(非)-인간의 나락에 떨어질 걸 예감하든지 본격적으로 추락하기 시작하면서 등장했을 것으로 생각해 왔다. 19세기 이래 도시 빈민, 식민지, 전쟁의 역사를 보면 그리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물론 부정적인 방면만이 아니라, 일상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대량 생산의 기초인 기계 문명을 포함해서 말이다.

이제 현대 문명의 끝자락으로 보이는 시점에서, 일상이 된 AI를 마주하면서 우리는 새롭게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이 이루는 사회와 세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질문에 봉착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지난 9월 초, 정부는 공공기관 통합을 발표하였다.

그중에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고전번역원, 동북아역사재단 등 교육부 소속 공공기관 세 곳의 통합도 포함되어 있었다. 인문-사회, 역사, 고전, 한국학 등의 키워드로 표현되는 학술기관이다. 이런 상황과 관련하여 몇 가지 의견을 보태려고 한다.

 



[사진1 : 우리 시대 ‘인간이란 무엇인가’. 질문, 공감, 실존, 책임…. 이에 대한 논의가 넘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사진은 ‘프리미엄 라이프 노트’ 블로그]

 

그러고 보니 딱 1년 전 이곳 발자국통신에 썼던 칼럼과 맥락이 닿아 있다. 〈‘코스피 5000’에 가려진 질문 - 어떻게 살아야 좋은가?〉였다. (2025년 9월 16일) 나는 그때 국정기획위원회에서 국민에게 보고한 국정과제를 보고 이렇게 말을 꺼냈다.

“국정과제에는 ‘코스피5000’의 욕망을 다스릴 메커니즘이 약하거나 발견되지 않는다. 물론 ‘공존동생(共存同生)’을 대원칙으로 삼고, ‘균형 있게’ ‘튼튼한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비전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성장을 얘기하면서 ‘공정한 성장’, ‘모두의 성장’을 중시하였다. 무엇보다 안전, 건강을 기저로 깐 것이 고맙다. 하지만 이런 비전을 궁극적으로 뒷받침할 교육, 연구, 문화에 관한 내용과 정책은 약하다기보다는 빈곤하다.

특히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역에 대한 고민은 아예 없다.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실패를 거듭하는 실험을 반복하듯이, 어떤 학자들은 인간과 사회, 역사와 철학에 대해 답이 없을 수 있는 질문을 계속한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관, 정의, 자유, 사랑, 민주주의, 공존 등에 대한 인식과 습성을 강화한다. 이런 시민과 학자들이 경박해진 우리 사회에서 성찰, 숙의, 경청, 존중, 겸손 등의 덕목을 되살리고 쉽게 타락하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데 이바지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탐구, 연구 활동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의심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여 과학자들의 실험실이 때론 외면받고 고독하듯이, 인간과 사회에 대한 답 없는 질문은 곧잘 ‘돈 되지 않는 일’로 치부된다.”

작년에 내가 칼럼에서 학문, 인문, 교육, 문화와 관련된 사안을 길게 제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우선 내란의 정리, 재정의 수습, 특히 자영업자와 노동자들의 생활 안정에 국정의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랏일에 중요하지 않은 게 없지만, 형편에 따라 선후는 있기 때문이었다.

 



[사진2, 3. 집현전 최고의 문화유산 한글, 그리고 퇴계 이황의 서당에서 시작한 도산서원. 정권의 성격과 상관없이 ‘인간과 사회에 대해 묻는 분야’에 대한 대한민국 국가 예산은 제자리걸음이었다. 한국고전번역원 8개 지역별 거점사업단의 경우, 2010년부터 2026년까지 예산 증가율은 0%였다. 이 기간에 국가 예산은 3배 가까이 늘었다. 한국은 돈이 없는 나라가 아니다. 자존심이 적은 나라일 뿐.]

 

다시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고전번역원, 동북아역사재단의 통합 논의로 돌아와 보자. 이번 통합 논의의 결론이 어떻게 나든지, 순차적인 기본계획과 세부계획 속에서 검토되어야 할 지점들이 몇 있다. 향후 순조롭고 합리적인 결론을 내리는 데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첫째, 다른 제도의 변화와 마찬가지로 학술기관 통합 논의 역시 백데이터, 즉 왜 통합하여야 하는지 근거를 댈 수 있는 자료를 근거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관련 주체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고 사안에 공감 또는 비판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둘째, 위의 세 기관과 함께, 같은 교육부에 있는 국사편찬위원회, 교육부의 소관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방치하고 있는 규장각, 행정자치부 소속의 국가기록원과 대통령 기록관이 함께 기능과 역할, 소속 등을 논의하는 자리가 마련되어야 한다.

나아가 교육부 소속 세 기관만 특정한 통합 논의는 행정 편의적이라는 직관적 비판, 교육부가 공공기관 통합 실적 내기에 숟가락 얹으려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해소할 고민이 필요하다. 동시에 다른 부처의 관계 기관에 대한 범정부적 협력 과정도 아울러 필요한 사안이다.

특히 규장각은 조선총독부가 1923년, 경성대학 설립 후 그곳으로 이관하였고, 광복 후 1946년 서울대학교가 개교한 뒤 그대로 서울대로 이관되었다. 하지만 2011년 국립대학 법인화가 추진되면서 서울대의 법적 지위가 변경되었고, 당시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관할권을 상실하였음에도 여전히 서울대에 ‘법적 근거 없이’ 맡겨두고 있다. 언제까지 규장각이라는 보물을 이렇게 방치할 것인가?

셋째,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은 나라의 명줄이 걸린 사안이라는 점과 그만한 시급성을 고려한다면, 제도와 법률 조정을 하는 동시에, 관계 기관을 같은 지역에 옮겨 시너지 효과를 내도록 유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으로 보인다. 예컨대, 독립기념관 근처에 국사편찬위원회를 비롯한 문화-역사 관련 기관을 이전하는 것이다.

국민주권정부는 5년 단임 대통령제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정말이지 5년을 10년, 20년처럼 일하는 듯하다. 그 노고에 기대를 더하자면, 이 나라와 사회에 필요한 50년, 100년의 비전도 제시해 주기 바란다. 거기에는 문명사적 안목이 필요하다. 그 안목의 플랜을 보여주고, 씨앗을 심어야 한다. 현 정부가 책임져야 할 시간이 아직도 4년 가까이나 남지 않았는가! 숱한 현장 토론과 국무회의 생중계에서 보여주었던 빛나는 ‘이재명 방식’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