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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차 수요대화모임(05.06.22) 정리 -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한채윤 부대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8 09:56
조회
325
32차 수요대화모임 지상중계(6.22) - 비이성애자, 이성애를 묻다

한채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부대표



동성애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하고, 동성애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확장하려는 노력은 잠시 효과를 거두는 듯 보이겠지만, 결론적으론 ‘불가능한 임무’다. 이성애주의 사회에서 동성애(자)를 빈틈없이 이해시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며, 동성애를 이해시키려 할수록 자칫 이성애주의를 더 강화시킬 수 있다. 그래서 이성애자들이 사회적 약자로서 동성애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이 해결책일 수 없다. 오히려 나는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이성애자가 다수이고 정상’이라는 그 대전제부터 의심의 눈길을 던진다.

이성애자가 다수이고 정상?

그간 나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이성애자들에게 동성애와 동성애자에 대해 알아듣기 쉽도록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나는 뭔가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느낌이 점점 더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엇이 이성애자들로 하여금 “저기…이성애자라서 동성애에 대해선 잘 몰라요.” 라는 말을 마치 수줍은 고백이라도 되는 양 털어놓게 만드는지 궁금해졌다. 동성애자가 ‘호모새끼’정도로 불리던 7~8년 전과 동성애 코드가 뜬다는 요즘을 비교해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예전엔 다짜고짜 ‘대체 동성애가 뭐야’하고 물었던 것에 비해 지금은 ‘제가 주변에 아는 동성애자가 없어서…’라고 미안해하며 묻는다는 정도의 차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미안할 것도 없다. 어차피 이성애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건 마찬가지이지 않는가. 동성애자에게 자주 그러했듯이 반대로 ‘언제 이성애자란 걸 처음 알았나요?’라고 물으면 바로 대답할 이성애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이 세상의 대부분의 글들, 심지어 동성애자의 주체성에 관한 글조차도 ‘이성애자=다수’라는 절대적 전제하에 쓰이고 있다. 하지만 정말 이성애자가 다수일까? 그리고 이성애가 정상이라는 게 확실한가? 어쩌면 올바른 논의는 이성애자가 다수라는 전제를 거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인종차별에 대항한답시고 백인들이 유색인종을 차별한다고 격분하지만, 유색인종이란 말 자체에 이미 ‘흰색은 색이 아닌’ 백인 중심적 시각을 반영해버리고 말듯이, 서구중심주의를 비판하려 해도 이미 유럽을 중심으로 나뉜 동/서양의 기준을 피할 수 없듯이 말이다.

이성애자에게 묻다

이성애자들이 자신을 정의 내리는 일에 골몰하지 않는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탓에 우리는 아주 진지하게 ‘이성애의 정확한 의미는 뭐지?’라고 질문을 던져도 쉽게 대답을 들을 수 없다. 어쩌면 근래 자주 언급이 되는 ‘성적 지향’ 혹은 ‘성 정체성’ 혼란은 동성애자의 몫이 아니라 사실 이성애자들의 문제일 수도 있다. 또한 분명한 점은 이성애자들이 자신을 ‘이성애자’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자’로 명명하는 일에만 익숙하다는 점이다.

이성애자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동성애자 인권운동을 한답시고 뛰어다니면 다닐수록 나는 점점 동성애자가 누군지 애매모호해지는 곤혹스러움을 느낀다.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적으로 고백하건대 “나는 모르겠소”이다. 연령, 성별 등 여러 사람들을 만나 상담을 해보면 그 중엔 동성과 성행위만을 즐기는 이가 있고, 동성을 사랑하지만 한 번도 성행위는 해 본적은 없는 이도 있고, 동성에게 인생의 동반자로서의 끌림은 느끼지만 성적 끌림은 이성에게 느낀다는 이도 있다. 이성과의 성경험이 있는 동성애자가 있고, 양성애자라고 하지만 데이트 경험은 이성뿐인 이도 있다. 또 양성 모두에게 성욕을 느낀다고 말하는 10대나, 줄곧 이성과 지내다 어느 날 동성과의 사랑에 빠진 40대 중년도 있다. 이쯤 되면 머리가 아파서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따위의 쓸데없는 구분이 없어져야 한다고 이를 부득부득 갈게 되지만 세상은 아직 꿈쩍하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묻고 싶다. 왜 이성애자가 되었는지, 언제 이성애자임을 알았는지, 이성애자로 사는 게 그럭저럭 괜찮은지도 물어보고, 동성애자도 우리랑 똑같은 사람이다라는 발언엔 정치적 올바름을 유지하려는 환상이 숨어있진 않은지, 이성애자들이 동성애자를 억압하고 차별한다고 스스로 밝히면서도 왜 그 억압기제와 차별 현황에 대한 성찰은 늘 동성애자들의 몫인지, 가해자보다 피해자들이 더 섬세하고 더 예리하게 사회 정치 경제 문화 구조의 모순을 해체할 수 있다는 지적조차 가해자들의 태만에 대한 합리화처럼 보이노라고 타박도 하고 싶다.

나는 비이성애자로소이다

모든 동성애자는 처음엔 이성애자였다. 알다시피 한국은 이성애주의 사회이다. 사람은 이성애자 남성 혹은 여성으로 태어난다고 간주되고 특별히 일탈하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그대로 이성애자라는 믿음이 적용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동성애자들이 ‘나는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을 어느 날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성애적이지 못함’을 조금씩 반복해서 느끼는 과정이 바로 정체성 형성의 과정이다. 더 이상 거부하거나 어찌할 수 없이 확실하게 자신이 이성애자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되면서, 바로 ‘이성애적이지 못한’ 상태를 합리화해주는 단어로 ‘동성애자’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므로 결국 동성애자는 비이성애자(non-heterosexual)인 셈이다.

이미 주어진 성 정체성이란 책을 이성애자는 무사통과로 읽어 나가는 ‘긍정’의 과정을 거치지만, 동성애자는 이미 새겨진 활자를 지워가며 다시 쓰는 고통스런 ‘부정’의 과정을 통과한다 이것이 근본적 차이이고 또한 억압이 발생하고 차별을 느끼게 되는 시작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이제 동성애자를 비이성애자로 파악하길 권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비이성애자’라는 용어가 동성애자를 대체하길 바란다는 건 아니다. 낯설기만 할 동성애자라는 말 보다 이성애가 포함된 단어인 비이성애자로 생각해 보라는 제안이다. 전 보단 더 ‘이성애’에 주목하게 될 것이고, 또한 그리 매끄럽지만은 않다는 걸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이성애자가 이성애자로서의 분명한 문제의식 없이 동성애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면 이성애주의와 차별 또한 더 강화될 수 있다. 시선의 변화 없이 힘의 변화가 오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