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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차 수요대화모임(05.05.25) 정리 - 철학자 김상봉 선생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8 09:55
조회
304
학벌은 정당화된 차별을 위한 장치

김상봉/ 철학자, 학벌없는사회



교육은 인간의 자기실현의 기관이다. 이 말은 교육이 부자나 특권계급, 곧 선택받은 소수의 자기실현이 아니라 인간 일반의 자기실현의 기관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자기실현의 기회를 제공해 한편으로는 사회에서 낙오할 수 있는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복지적 기능을 수행함은 물론, 삶의 현실적 조건의 차이로 말미암아 발생할 수 있는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문화적 단절과 몰이해, 나아가 적개심을 미연에 예방하는 사회적 통합기능을 수행한다.

한 사회에서 어떤 사람을 교육에서 배제하는 것은 그를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고, 어떤 집단을 동등한 교육에서 배제하는 것은 그 집단에 속한 사람을 동등한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 나라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성별이나 빈부귀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공교육을 베푸는 교육제도를 발전시켜왔던 것이다.

교육은 또한 각 개인의 자아실현의 기관이라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즉 모든 사람은 교육을 통해 개성적인 인격으로서의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교육은 보편적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개성적이기도 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적으로 이율배반적인 요구다. 국가의 공교육 수립 과정에서 부딪히는 가장 원칙적인 어려움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 이율배반은 보편성과 개별성이라는 포기할 수 없는 인간적 본질에서 비롯된 까닭에 둘 중 하나만을 택하는 것으로써 해소할 수 없다.
경쟁이데올로기로만 치닫는 한국의 공교육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공교육은 근본 철학에서부터 잘못되어 있다. 한국에서의 공교육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국민의 평등한 자기실현을 위한 장치였던 적이 없었다. 도리어 국민들 사이의 차별과 불평등을 정당화하기 위한 장치였다. 옛날의 과거시험이 출세를 위한 수단이었듯이 오늘날의 학벌체제에서 교육이란 남보다 좋은 대학가서 남다른 부와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경쟁의 장치일 뿐이다. 공교육 체제가 오히려 사회적 차별과 배제의 장치였던 것이다.

이 점이 한국 교육문제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다. 너무도 오랫동안 교육이 불평등의 재생산장치였던 까닭에 대다수 사람들은 교육이 평등과 사회 통합의 장치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도리어 교육을 통한 불평등을 당연하고 자명한 것으로 생각한다. 교육의 이름 아래 행해지는 모든 일들을 맹목적으로 정당화하고 신성시하는 미신에 빠져 현실적 교육의 파행을 비판 없이 절대시하고 있다. 이를테면 시험공부는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고, ‘교육을 받는다’ 또는 ‘공부를 한다’는 것은 ‘시험공부를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 되어버렸다. 물론 교육과정에서 평가는 필요한 과정이지만, 이는 수단일 뿐 어떤 경우에도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런데 한국교육에서는 전 교육이 마지막 평가, 곧 대학 입학시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시험성적을 교육적 성과와 무비판적으로 동일시하고, 인성교육과 지성 계발에 심각한 해악을 끼치는 현행 수능시험 같은 비교육적인 시험도 신성한 통과의례로 받아들이고 있다. 결국 시험을 통해 가려진 이른바 우수인재가 사회의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는커녕 오히려 시샘하고 부러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고 체념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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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타파 위해 학교를 평준화해야 한다는
김상봉 선생


게다가 교육이 차별과 배제의 장치라는 통념에 더하여 요즘에는 맹목적인 경쟁논리와 시장논리가 제법 그럴듯한 이론의 탈을 쓰고 급속히 유포되고 있다. 이 논리에 따르면 경쟁이란 인간의 능력을 극대화시켜주는 가장 좋은 처방이므로 교육 역시 치열한 경쟁을 통해서 보다 좋은 교육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교육에 경쟁원리를 도입하는 것이 단순히 개인적인 이기심이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 미화된다.

공공의 이익이라는 것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골고루 혜택이 돌아갈 때 그 진정성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교육에서의 경쟁은 소수의 승자를 위해 절대다수의 패자들을 희생시키는 ‘검투사적 경쟁’이다. 이는 과장된 수사나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증가하는 청소년 자살이 실증하는 냉혹한 현실이다. 모든 경쟁은 필연적으로 승자와 패자를 구별하고 또 차별한다. 이 차별이 패자를 파멸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활동으로 유인하는 자극이 되는 한에서 경쟁과 승패에 따른 차별적 보상은 정당화될 수 있다. 그렇지만 한국 교육에서 일어나는 경쟁은 패자의 희생 위에 살아남은 승리자들만을 위한 투쟁으로 변질된 지 이미 오래다.
한국 교육은 차별과 배제의 장치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국의 교육이 오로지 집단적인 학벌에의 진입을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나마 생산적일 수 있는 경쟁이 모든 면에서 역기능만을 수행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 교육에서의 경쟁은 개인들 사이의 학력(學力)경쟁이 아니라 학벌(學閥)경쟁이다. 학벌이 과거의 족벌문중의 역할을 하고 있다. 즉 개인들 사이의 경쟁이란 본질적으로 경쟁하는 학벌집단들 가운데서 보다 지배적인 학벌집단에 진입하기 위한 경쟁일 뿐, 탁월한 자기실현을 위한 경쟁은 아니다.

더 나아가 학벌집단들 사이의 불평등한 서열이 단순히 객관적으로 주어진 현실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도 정당화되고 요구되는 것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더러는 학벌을 타파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자연발생적인 대학 서열이란 불가피한 것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그만큼 학벌집단들의 서열이 필연적인 당위라는 확신이 한국 사회에 광범위하게 뿌리내려 있는데, 바로 이것이 한국 사회에서 보편적인 공교육의 수립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왜곡된 공교육을 바로잡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 평준화된 학교교육이다. 평준화된 학교교육이란 국가가 모든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동등한 수준과 내용의 교육으로서, 빈부격차와 생활환경의 차이가 문화적 차이와 의사소통의 단절로 이어지지 않도록 한다.

그러나 학벌집단을 기준으로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계급분화가 일어나는 한국사회에서 평준화된 학교체제가 그대로 유지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대학 서열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은 물론 중·고등학교의 평준화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져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위기에 처한 평준화체제를 수호하고 교육의 본래성을 되찾아주기 위해서는 평준화를 단순히 수세적 입장에서 지키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기본적인 철학과 원칙에 입각해 적극적, 공세적으로 추구해야만 한다. 단순히 자립형 사립고의 도입과 확대를 막는 것은 물론, 비평준화 지역을 평준화 지역으로 바꾸고, 학교교육이 억압이 아닌 자율성을, 획일성이 아닌 다양성을 추구하도록 해야 한다. 이는 학생인권의 존중과 권리의 확대, 그리고 교육과정과 학제의 다양화를 통해 구체화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나아가 서열화 된 대학들을 평준화시켜야 한다.
학교평준화는 차별 없는 사회를 위한 것

모든 것은 자기의 본래성에서 이탈할 때 질병에 빠져든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교육은 원칙적으로 인간의 자기실현을 위한 것이지 어떤 경우에도 타자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는 교육이 타자와의 경쟁으로 변질되어 자기파괴적인 결과를 낳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도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성인 사회의 야수적인 생존경쟁구도를 그대로 이식하고 강요함으로써 어린이와 청소년의 삶을 돌이킬 수 없이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가 학교의 서열화에 저항하고 중등학교든 대학이든 모든 학교의 평준화를 추구해야 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교육이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의 기제가 되고 있는 사회에서 학교의 평준화를 추구하는 것은 차별 없는 사회를 추구하는 것과 같다. 이런 의미에서 학교 평준화 운동은 한국 사회의 근본적 차별과 불평등을 극복하려는 운동으로서 단순한 교육운동이 아니라 가장 본질적인 정치투쟁이자 인권운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