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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차 수요대화모임(05.04.27) 정리 - 진보논객 진중권씨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8 09:54
조회
351
미래의 상상력이 현실을 보여준다.

진중권/ 미학평론가, 중앙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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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 따라 이상적 인간형은 변화한다. 호전적, 전투적 인간형이 이상적 모델이었던 중세에서는 전쟁이나 결투가 당연한 것이었고, ‘교양’은 약자였던 여성들의 몫이었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서며 상황이 달라진다. 중세적 칼부림은 밀실로 사라지고, 이성적 인간이 이상적 인간형이 된다. 이는 데카르트가 정념과 상상력 그리고 감각을 배제해야 이성적인 인간이라고 한 것에서 잘 나타난다.

가상현실은 ‘가상’이 아닌 ‘현실'

‘상상력’의 현재적 의의를 도식화하자면 DATA(라틴어로 datum, 주어진 것)와 FACT(라틴어로 factum, 만들어진 것)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예전에 구두 제작자가 할 일은 이상적 이데아로서의 구두 모형을 본뜨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구두의 이데아를 확인해 주는가? 이데아를 말하는 신학자(theoria)나 철학자였다. 바로 이들이 구두와 이데아가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판단하고 그에 따라 구두의 가격을 매겼다.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구두 가격은 시장에서 정해진다. 비로소 장인들의 개성적인 창조성이 경쟁력을 갖게 되는데, 이런 식으로 세계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 되는 것이다.

또한 근대에는 Subject(주체)와 Object(객체)의 개념으로 세계를 파악했다. 이때 주체는 ‘주어진 것’으로서의 객체에 대해 참-거짓을 판별했다. 그러나 이제는 ‘Project’의 시대가 도래했다. 주체와 객체의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서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상상력의 시대이다. 이전을 ‘모방의 시기’라 한다면, 이제는 ‘디자인의 시기’인 것이다.

상상력에는 ‘해리포터’와 같은 주술적 상상력, ‘반지의 제왕’과 같은 신화적 상상력, ‘매트릭스’에 영감을 준 보르헤스의 철학적 상상력,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와 같은 패러독스적 상상력, 쥘 베른과 같은 과학적 상상력 등 여러 유형이 있다. 중요한 것은 이들 상상력이 현실에 실체를 갖는 상상력이라는 점이다. 현대 사회의 테크놀로지가 그 원동력이다. 종자개량에서부터 온 몸으로 확대된 성형 수술, 유전공학 등이 바로 테크놀로지에 의해 현실에 모습을 드러내는 상상력이다.

우리 주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가상현실’도 대표적인 예다. 이제 가상현실은 더 이상 ‘가상’이 아닌 ‘현실’이다. 싸이월드의 미니룸은 엄연한 가상현실이지만, 그 가상현실속의 아바타를 위해 실제 돈을 지불한다. 리니지 등의 게임에서는 사이버상의 아이템을 구매하기 위해 엄청난 현금 거래가 이뤄진다. 텔레비전, 인터넷, 게임 등등이 ‘가상현실’이라는 이름으로 ‘현실’에 자리 잡은 또 하나의 ‘현실’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프로그램 생산자와 소비자로 세계가 나뉠 것이다. 한국이 아무리 ‘IT 강국’을 외쳐도 마이크로소프트사(MS)가 프로그래밍 한 세계 안에서 움직이는 것에 불과하다. 프로그래밍을 한 MS가 세계의 표준이고 한국은 하위 프로그래머 정도인 것이며, 실질적으로는 ‘IT 소비 강국‘인 셈이다. 이러한 차이와 미래적 비전을 좀 더 경계해서 살펴봐야 한다.

그러나 테크놀로지를 통한 현실화된 상상력을 맹목적으로 찬양해서도 안 된다. 특히 한국사회가 기계 기술에 너무 맹목적인 경향을 보인다. 황우석 박사의 경우, 외국 같으면 당장 윤리적 문제부터 제기했을 텐데, 한국 사람들은 오직 세계 최고의 기술, 노벨상 후보감만이 관심 대상일 뿐이다. 이런 점을 보면, 그 상상력에도 비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상상력과 연관된 창조력이나 예술적 감성 등은 앞으로 더욱 더 중요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육체노동이 아닌 정신노동이 더 중요할 것이고, 그것은 일종의 ‘놀이’와 비슷해질 것이다. 미래 사회가 ‘노동 해방’을 추구하는 맑스의 사상을 택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맑스가 이야기했던 ‘꿈꾸는 노동’은 많은 부분 실현될 것이다.

놀이로서의 예술, 예술로서의 놀이

요즘 학생들은 과거 세대와 다르다. 예전에 리포트를 쓸 때는 기승전결이 뚜렷했으나, 이제는 ‘자르고 붙이기’가 대세다. 구어체뿐만 아니라 이모티콘도 등장한다. 그렇다고 요즘 학생들을 별종으로 봐서는 안 된다. TV가 처음 나왔을 때 가족관계뿐만 아니라 전체 마을의 생활 패턴이 변했다. 요즘 학생들은 처음부터 TV와 함께 성장한 아이들이며, 거기에 게임과 인터넷까지 덧붙여졌으니 오죽하겠는가? 영화와 TV, 게임 등의 매체들은 구성 자체가 이미지의 몽타주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기승전결 구조를 따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몽타주 세대의 아이들은 사회나 역사를 보는 시각도 다르다. 이전 세대들에게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한다’라는 발전론적 역사관, 진보적 역사관이 통용됐다. 순차적 시간 구조이기에 개인의 정체성은 말 그대로 ‘individual’이다.

그러나 지금 세대는 ‘영원한 현재’를 추구한다. 과거를 마음대로 해석하고, 미래를 현재에 갖다 쓴다. 역시, ‘자르고 붙이기’식인데, 따라서 개인의 정체성은 ‘dividual’이다. 이런 아이들에게 ‘산만해져서 학력이 저하된다’라고 비판하는 것은 전적으로 어른들 사고방식에 불과하다. 오히려 산만해진 것이 당연하다. 자동차가 발명돼 걷는 능력이 퇴화하는 것처럼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당연한 현상과 문화로 구성된 현대 세계가 바로, 비선형적(unlinear)이며 하이퍼링크(hyperlink)의 세계이다.

예술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원시시대와 근대, 현재에 걸쳐 예술은 그림, 글, 그림이라는 표현 수단을 활용했다. 물론 원시시대의 그림과 현재의 그림은 다르다. 전자가 주술적 맥락을 지닌다면, 후자는 텍스트를 깔고 있는 그림이다. 즉 현 시대가 이미지의 시대이지만 그 이미지는 ‘이미’ 많은 컨텐츠와 컨텍스트를 함유하고 있다. 윈도우를 예로 들어보자. 비록 윈도우의 형태는 GUI(graphical user interface)로 다가오지만, 그것은 텍스트 프로그래밍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지를 구성하고 창조하는 최종적인 프로그래머는 결국 텍스트로 승부를 내기 때문에 이미지의 시대일수록 텍스트가 더 중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현재를 ‘인문학의 위기’라는 것은 부적절하다. 사실상 지금처럼 인문학이 필요한 적이 없었다. 현대 사회의 이상적 인간형은 상상력을 갖춘 예술가, 컨텐츠를 제공하는 인문학자 그리고 엔지니어의 복합 모델이다. SONY社와 백남준의 상상력의 동맹 관계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역사에도 상상력 넘치는 천재들이 많이 있다. 화가로 알려진 다빈치는 광학, 기하학, 원근법을 결합한 조합과학으로서의 회화를 추구했다. 갈릴레이나 뉴튼도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연금술사였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상상력과 호기심이 사라져 간다는 것이다. 상상력을 가르칠 수는 없다. 그러나 되찾을 수는 있다. 바로 ‘놀이’를 통해서다. 카드나 체스 게임은 모두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하다. 어릴 때 많이 했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도 술래의 입장에서는 다양한 세계적 장면들의 복합 구성이다. 한번 뒤돌아 볼 때마다 상황이 변하지 않는가? 종이접기라는 기초적인 아이디어가 현대 사회의 최첨단 기기에도 적용되고 있다. 우리는 의자도 접어서 만들고, 컴퓨터도 접어서 만든다.

상상력을 살리는 인권운동 필요

이러한 발상을 근거로 인권운동의 패러다임도 재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국보법에 대한 인권적 대응은 개인의 표현과 자유에 대한 권리를 보호하자는 지극히 소극적이며 보호주의적인 전략에 근거했다. 좀 더 적극적이며 공세적으로 저항할 수 있다. 국보법은 상상력의 최대의 적이며, 이 때문에 상상력의 만개를 통한 사회발전에 걸림돌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결국,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