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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차 수요대화모임(05.03.23) 정리 - 여성학자 정희진씨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8 09:53
조회
1244
여성주의가 인권영역을 확장하고 재구성한다.

정희진/ 서강대 강사, 여성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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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차 수요대화모임 강사로 오신 정희진씨는 다음과 같은 문제제기로 본격적인 강의에 들어갔다.

“강의를 맡고 있는 어떤 대학의 수업 첫 시간에 한 남학생이 내게 ‘눈이 아름답습니다’라고 얘기했다. 물론 기본적으로 예쁘다는 말에 상처를 받았거나 어떤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지만 그 표현 자체가 젠더화된 표현이어서 화가 났다. 그 남학생이 여성 교수인 내게 던진 ‘아름답다’는 무의식적으로 교수에게 ‘너는 여성이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교사라는 헤게모니를 쥔 너이기 이전에, 너는 여성이므로 학생이기 이전에 남성인 나와 권력관계가 상하관계임을 표현한 것이다.”

범주의 정치학

사실 누가 여성인가, 누가 인간인가는 상당히 논쟁적인 개념인데, 보통 여성을 결정할 때 ‘body’와 ‘person’은 같지 않음에도 우리는 ‘body’로 여성을 결정지어 왔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인간의 범주도 기존에는 인간은 남성임을 상징해왔고 거의 모두가 ‘인간’을 ‘성중립적’인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았다.

대학에 있는 여성 관련 강의들을 보면 ‘여성과 인권’ ‘법과 여성’ ‘현대사회와 여성’ 등이 있다. 여기서 ‘여성과 인권’이라는 과목에서 인권은 남성의 인권을 뜻한다. 따라서 이런 과목들의 제목은 여성을 인간에서, 시민에서, 법에서, 사회에서 제외하는 언어이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담배를 당당하게 필 수 있는 여성은 할머니, 지식인, 유흥업소 여성이다. ‘어떻게 여성이 담배를 피워’라는 의식이 아직 존재하는 한국사회에서 이들은 그런 비난의 공격을 고스란히 비껴나 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그들은 규범적으로 여성이 아닌 것이다.

인간과 비인간의 여부는 한 사회의 지배규범에 의해 자의적으로 정해진다. 4·3 제주항쟁에서 ‘서북청년단’이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빨갱이를 죽였다”고 말하고, 가정폭력가해자가 “사람을 때린 게 아니라 집사람을 때린 것”이라고 항변하는 것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헌법 제29조 1항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병역의 의무를 진다’는 조항은 장애인과 여성은 국민이 아니라는 얘기를 하는 것인가?

‘군인도 인간이다’는 말이 보다 명확해지려면 여성, 장애인이 군대에 갈 권리를 인정하고, 병역거부 등 군대에 가지 않을 권리를 인정하고, 군인이 되는 것이 시민권으로 연결되는 것을 반대할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인권영역의 확대와 재구성

인권운동 초기에는 양심수, 장기수 등 공적영역에서 국가에 의한 정치적 문제만 인권문제로 생각되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여성, 동성애,장애인 문제로 범주가 확대되었다. 이는 국가의 개인에 대한 폭력이 개인과 개인의 폭력을 인정하는 것으로 일상의 정치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인권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으로 보편성을 얘기하는데, 보편은 없다고 할 수 있다. 보편이라는 개념은 구성되는 과정 중이라는 점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시공을 초월할 수는 없는 것이고, 역사적 상황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85년부터 1997년까지 12년간 이대축제에서 고대생들이 저지른 행동은 명백한 성폭력이다. 그런데 여론은 ‘학생들이 강간을 한 것도 아닌데 성폭력이라 한 것은 지나치다’며 이를 ‘젊음의 낭만, 놀이’로 보았다. 그렇지만 평화시의 이런 남성 중심적인 놀이문화가 바로 전쟁 시에 강간, 학살과 같은 폭력으로 연결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전쟁에서의 폭력은 ‘광기’ 때문에 갑자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젠더화 된 일상놀이문화의 연장선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즉, 일상의 상징체계가 전시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도 누가 누구를 상대로 하는 주장인가가 중요하다. 백인이 흑인을 비하하는 것, 남성이 여성을 비하하는 것, 호모포비아를 드러내는 것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다. 왜냐하면 근대에 강력한 국가주의가 들어서면서 거대한 국가권력에 비해 약한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표현, 집회, 사상의 자유 등을 인정했다. 즉, 지배규범에 대한 사회적 약자의 권리일 때만이 표현의 자유는 진보적 가치로서 존중되는 것이다.

이를 프라이버시와 연결해 생각해보면, 개인의 지위가 성별, 계급 등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프라이버시도 다르다. 동성애자의 성은 정치적인 반면 이성애자의 성은 프라이버시이다. 또한 남성이 프라이버시를 국가, 자본을 상대로 주장하면 진보이지만, 여성을 상대로 주장하면 진보가 아니다. 따라서 성폭력 가해자의 인권은 피의자, 재소자로서 인정되는 것이지, 피해자를 상대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히틀러의 인권과 안네프랑크의 인권, 전두환의 인권과 광주 희생자들의 인권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인권은 필연적으로 재구성의 논리가 필요하다.

인권은 재구성되는 것이다

‘근절’이라는 것은 때론 관념론에 지나지 않는다. 성매매방지법은 본의 아니게 성매매 유형을 바꾸는 결과를 낳고 있고, 노동운동을 하는 노동자들은 부르주아를 욕망하며 그들과 동화된다. 노동운동가들의 요구는 사실상 자신도 중산층처럼 가족을 부양할 수 있도록 임금을 인상하라는 것이다. 남성노동자 월급과 여성노동자 월급의 비율이 100대 52다. 이 공식이 깨지지 않는 한 남성노동자의 월급 또한 100에서 110으로 올라가지 못할 것인데 거기까지는 사고하지 못한다.

맑스의 가장 큰 오류는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 가지로 ’해석‘해왔을 뿐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혁‘시키는 일’이라고 한 것이다. 세상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도 실천이고, 말을 바꾸는 것도 실천이다. 다른 방법으로 세계를 해석하는 것도 실천인 것이다.

아울러 자기 내부에 있는 타자성과 대화하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적 위치성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다. 이는 다만 현재와 맺고 있는 채널일 뿐 변화한다. 장애인의 90%도 후천적인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메신저가 아니라 메세지에 있다. 그래서 레닌이 얘기했던 “짜르와 생각이 1초라도 같으면 연대한다”는 말은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