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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차 수요대화모임(09.03.25) 정리 - 뚜라(버마행동 대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8 10:44
조회
332
버마, 그리고 한국의 희망찾기

뚜라/ 버마행동 대표



내가 한국에 와서 택시를 타면 기사가 보통 어디서 왔냐고 물어본다. 십중팔구, ‘버마’에서 왔다고 하면 ‘아! 미얀마’라며 잘 안다는 말씀을 하신다. ‘버마를 어떻게 알까’ 궁금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버마 아웅산묘소폭파사건으로 버마를 알고 있는 것이었다. 좋은 일로 버마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버마’가 공식명칭이 아니다.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듯이 ‘미얀마’가 공식 국가명이 됐다. 군부정권이 맘대로 국가명칭을 바꾼 것이다. 그래서 버마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군부정권에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미얀마’라는 국명을 사용하지 않고 여전히 ‘버마’라고 부르고 있다.
버마의 민주화를 예상하고 한국으로

내가 처음 한국에 온 것은 ‘8888 민중항쟁’ 이후 버마의 민주화 분위기가 무르익던 시절이었다. 1962년 3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이후 군부정권의 독재에 시달리던 버마 국민들은 1988년 8월 8일에 전국적인 민주화 시위를 했고, 이를 계기로 총선을 통해 정권을 이양받기로 약속을 받게 된다.

이러한 시기에 나는 버마가 민주국가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그 이후를 고민했다.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전문대학에 진학해 기계를 공부했던 나는 해외에서 기계를 제대로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싱가폴과 한국으로 가서 기계공부할 수 있는 방안을 알아보다가 먼저 허가가 난 한국에 오게 됐다.

그러나 군부정권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990년 치러진 총선에서 아웅산 수지 여사가 이끄는 버마민족민주동맹(NLD)이 80%이상의 득표를 얻었지만 군부정권은 투표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아웅산 수지 여사를 가택 연금했다. 그 이후 아직까지 버마는 군부정권이 독재를 휘두르고 있다.

군정은 버마 국민들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버마는 세계적인 자원부국이다. 천연가스는 세계 10대 매장량을 자랑하며, 루비 등의 보석과 열대우림에서 나는 고가의 목재도 매우 풍부하다. 축복받은 기후 덕에 쌀 생산량도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지금 버마는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해 있다. 정권의 유지에만 급급한 군부는 국민의 생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만을 위한 정책을 펼쳐 결국 총체적인 경제 파탄의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물가는 그 끝을 모르게 치솟고 있으며, 국민들의 1/4 이 하루 1달러 이하로 연명하고 있다.

군부는 어려운 경제상황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더욱더 가혹한 탄압으로 억누르고 있다. 경제 악화와 독재 정권의 유지가 서로 맞물리며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버마가 민주화 될 것을 예상하고 한국으로 왔던 나는 이렇게 되어 버린 상황에서 버마로 돌아 갈수 없게 되었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서의 삶

이주노동자 신분으로 한국에 온 나는 처음에 단양에 있는 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 당시는 아직 이주노동자가 많지 않을 때라 그 지역의 이주노동자는 나와 함께 온 내 친구, 이렇게 2명밖에 없었다. 우리를 처음 본 사람은 쳐다보면서, 만져도 보고 신기하게 여겼다. 너무나도 낯선 존재였던 것이다.

생활은 쉽지 않았다. 하루 16시간 이상 일을 해야 했고 동물원 원숭이 같은 취급을 받았다. 약속된 임금도 제때 주지 않았다. 기계를 배우고 열심히 일해서 몇 달 안되어 공장의 한 라인을 책임질 정도가 되었지만 임금은 20만원이 안되고 그나마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았다.

너무도 부당한 처사에 월급을 60만원 주지 않으면 더 이상 일을 안 하겠다고 요구해서 온갖 회유와 ‘당장 나가라’는 협박을 받으면서도 결국 60만원의 임금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고 상황이 나아진 것이 아니었다. 결국 나는 회사를 그만 두고 나와 소위 말하는 불법 체류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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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행동의 뚜라 대표



버마 민주화 활동가의 삶은 시작되고

불법 체류자로 살면서는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 비슷했다. 가는 곳마다 부당한 일들이 생겨났고 이에 맞서 싸우는 일이 더욱 빈번해졌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내 자신의 처지가 변해 있었다. 먼저 한국에 와서 그나마 한국사정을 잘 알기에 다른 이주노동자가 부당한 일을 당하면 같이 싸우면서 도와주는 일도 잦아졌다.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입장에서 해결책은 하나다. 바로 버마가 민주화되어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버마의 인권 상황은 날이 갈수록 더욱더 심각해지고 있다. 여기에 이주노동자에 대한 한국 사회의 처우가 더해져 결국 나는 버마 민주화와 이주노동자를 위한 활동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동료들을 만나고 ‘버마행동’을 조직하면서 하나씩 버마의 민주화와 한국 내 이주노동자를 위한 일을 진행했다. 한국에서는 인권연대와 같은 단체와 연대해서 ‘프리 버마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버마의 상황을 더 알리고 버마 민주화에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 버마 국내에서 활동하는 동료에게 자금을 송금하거나 함께 부를 수 있는 버마민중 노래를 만들고 전하기도 한다. 또한 이주노동자 방송국인 MWTV를 만들어 우리들의 이야기를 한국사회에 알리고 있다.

한국에는 100만이 넘는 이주노동자가 있다. 대부분 일이 힘들고 보수가 적어 한국 사람들은 거의 일하지 않는 곳에서 일하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처우가 열악한 것만이 아니다. 임금을 지급하지 않거나 혹 폭행 등의 피해를 입어도 정당하게 사업장을 옮기거나 계약을 변경할 수 없다. 계약기간 중도에 자신의 나라를 방문할 수도 없다. 정해진 기간이 종료되면 무조건 출국해야 된다. 돈을 벌기는커녕 한국에 오기 위해 진 빚을 갚을 엄두조차 내기 어렵다. 어쩔 수 없이 불법체류로 내몰리는 상황이다.

한국정부는 이런 현실은 외면한 채 불법체류자 단속만으로 이주노동자의 숫자를 관리하려고만 한다. 단속만이 능사가 아니라 이주노동자의 관점을 반영한 정책이 필요하다. 무조건 불법체류자를 양산할 것이 아니라 인력을 필요로 하는 한국과 일을 해야 하는 이주노동자 양측을 살필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한 것이다.
버마의 민주화를 꿈꾸면서

한국도 오랜 기간 군부독재에서 많은 희생을 치루면서 민주화를 이루어낸 국가다. 내가 버마에 있을 때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버마에서도 많이 알려져 있었고 큰 감명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은 나와 같은 제3세계 민주화운동가에게 그리 호의적인 나라는 아닌 것 같다. 미국이나 유럽처럼 민주화운동하는 단체나 개인에게 지원을 하기는커녕 난민지위를 부여하는데도 인색하다. 난민협정에 가입되어 있는 국가인데도 말이다. 나도 오래전에 난민지위 신청을 했지만, 아직까지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난민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불안정한 상태에서 불법체류자로 단속되어 버마로 강제송환 되면 생사조차 장담할 수 없게 된다.

비록 한국이 정부차원에서의 많은 지원이나 난민지위를 인정해 주는 데는 인색하더라도 나에게는 좋은 한국 친구들이 많이 있다. 그들에게는 미안할 만큼 많은 도움을 받고 있고 그들의 도움과 격려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다.

한국과 버마는 서로를 더욱 이해하고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언젠가 한국에서의 버마민주화운동이 결실을 맺어 버마에서 군부정권이 무너지고 한국과 함께 민주국가를 만들어 나가는 것을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