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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차 수요대화모임(10.04.28) 정리 - 권보드래(동국대 교수)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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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7-08-08 10:54
조회
354
백 년 전 사람들 - 1910년대와 3.1 운동

권보드래/ 동국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



3.1운동은 일제 식민지 시절, 조선에게는 일종의 ‘알리바이’와 같은 사건이다. 만약 3.1운동이 없었다면, 임시정부 자체가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항일 투쟁이 있었다지만, 간헐적이고 소규모적이었다. 우리가 식민지 시절,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3.1운동이었다. 전체 인구 10% 이상이 거리로 뛰어나왔다. 7천5백 명 이상이 죽임을 당하는 위급한 상황인데도 그랬다.

하지만 3.1운동 이전의 10년은 너무나 조용했다. 그 이전에 쫓겨 가고 도망간 사람들이 많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 탓이지만, 그래도 너무 조용했다.
일제강점과 함께 찾아온 뒤숭숭한 소문들

1910년, 지금부터 정확히 100년 전 시작된 일제강점은 풍문과 함께 시작되었다 할 만큼 뒤숭숭했다. 대중들은 최소한의 정보조차 접하기 어려웠다. 언론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뿐이었다. 일제강점이 시작되고, 당장 정치체제가 바뀌는 낯선 경험을 하고 있었지만, 언론을 통한 공론화도 불가능했고, 지도자가 나서 설명해줄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적 호소력과 설득력있게 등장한 것이 루머였다. 루머는 그저 입소문을 넘어 현실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소문은 대중들에게 믿음직하게 받아들여졌고, 여기에 상상력이 보태져 소문은 훨씬 더 생생하고, 가공할만한 것으로 변모하였다. 정보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제주 같은 지역에서는 특히 파괴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능지처참(陵遲處斬). 곧 사람의 피부를 벗겨내는 고문 끝에 죽게 하는 기계가 일본에서 도입된다는 소문도 있었다.

일본인이 상륙하면 소, 말 등 가축을 모조리 죽이는 것은 물론, 사람까지 피부를 벗겨내며 죽일 것이란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고, 소문의 공포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 지배가 본격화하면서 조선의 일상은 평온해졌다. 폭력적이거나 야만적이지 않았다. 일본 때문에 큰 일이 날 거란 소문은 끝도 없이 이어졌지만, 큰일이란 것도 소수에게만 해당하는 재산 문제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여성들은 모두 일본사람과 결혼시킨다든지, 조선여성이 모두 불임하게 되고, 남성들은 모두 거세될 것이란 등의 소문들도 떠돈다.

1910년대의 조선은 일제의 안정적 장악 속에 들어가고 만다. <매일신보>를 통해서 본 조선의 일상은 더욱 그렇다. 일제는 복(福), 복락(福樂)이란 말 대신 행복(幸福)이란 말을 의식적으로 자주 쓰기 시작했다. 근대 이전엔 존재하지 않던 말이다. 조선 사람도 이제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노력하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기 위해 일제는 치밀한 노력을 전개했다.

좀 답답할 수는 있지만, 조용히 살면서 개인적으로 경제생활을 열심히 해 나가면 언제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기사가 넘쳐났다. 한두 푼씩 모아서 살림살이를 장만했다는 기사들이었다. 일제는 ‘조용히 살아야 한다’고 강요했고, 실제로 조선의 일상은 지극히 평온하기만 했다. 일확천금의 꿈마저도 통제되었다. 1910년대 후반 금은과 중석 등 광물 가격이 오르고 외국인의 매수 열풍까지 가세, 광산 개발 및 투자 열기가 뜨거웠고 들뜬 소문이 많았지만, 이 같은 꿈은 <매일신보> 지면에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조용한 그리고 작은 개인적인 꿈만이 용납되었다. 근본적으로는 패배감을 안고 살아야 했던 시기였다.

1910년대 일제는 조선 사람들에게 쾌락을 요구했고, 강요하기도 했다. 1910년대에는 다양한 여가 문화가 활성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매일신보>는 주목할 만한 역할을 하였다.
행복하게 살자, 그러나 조용히

<매일신보>는 대대적인 지면 캠페인을 전개했다. 승경지(勝景地)를 소개하고, 여가의 담론을 조직하고 쾌락의 필요를 강요했다. 신문사가 직접 나서 굵직굵직한 문화행사를 주관했고, 대중을 문화적 주체로 구성해 나갔다. 왕이 살던 경복궁에서 열린 공진회(共進會)는 당시 인구의 10% 정도인 120만 명이 다녀가기도 했다. 자기 주머니를 털어 차비와 입장료를 부담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다. 일제는 쾌락을 조직했고, 대중은 충실히 쾌락을 쫓았다. 해서 1910년대는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평온하기만 했다.
공포스러운 헌병 통치는 계속되고

대중들은 쾌락에 동원되고, 또 추구하기도 했지만, 1910년대는 일제의 폭력적 통제에 전방위적으로 노출된 시대이기도 했다.

양민이 부랑자 단속 대상이 되기도 하였고, 합법적으로 기생 연주회를 여는 한편, 참가자들을 잡아가는 이해하기 힘든 단속을 하기도 했다.

민중들이 견디기 힘든 것은 헌병의 즉결 처분권이었다. 지금의 <경범죄처벌법>처럼 시시콜콜한 일로 사람들을 처벌했다. 그 처벌은 엄했다. <매일신보>에 ‘태형과 벌금’이라는 코너가 마련될 정도로 헌병의 일상적 폭력은 정도 이상이었다. 남성이 웃통을 벗었다고 태형을 당하기도 했고, 청소를 제대로 했는지 아궁이를 검사하기도 했다. 검은 옷을 입고 거리를 순찰하는 헌병은 공포와 폭력의 원천이었다.

식민지였기에 ‘질서유지’는 더욱 과격한 제도 폭력에 의존했다. 일제는 1912년 묘지규칙을 공포하여, 개인이나 가족 단위의 분묘를 금지하고, 지역별로 공동묘지를 만들었다. 선산(先山) 관습이 뿌리 깊었던 조선인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횡포였다.
먹고 살기는 너무 힘들어지고

제1차 세계대전은 한동안 ‘구주(歐洲) 대전’이라 불렸다. 말 그대로 유럽 국가들 사이의 유럽지역을 무대로 한 전쟁이었지만, 그럼에도 세계는 이 전쟁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귀족계급이 최종적으로 부정되고, 국가 간의 경계가 완강해졌으며, 미국과 소련이라는 새로운 강대국이 부상하게 되었다.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일본은 전쟁 특수를 누렸지만, 공업 생산기반을 갖추지 못한 식민지 조선은 전쟁으로 인해 커다란 피해를 강요받아야 했다. 유럽과 일본에서 수입되던 공산품 가격은 폭등했다. 강점 직후 물가 인상으로 휘청거리다 1913-4년 경 겨우 안정을 찾아가던 조선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1910년 일제 강점 이후 3년 동안 쌀값은 지속적으로 올랐고, 물가는 2배 이상 뛰었다. 주택시세도 급등하여 사글세 사는 사람이 늘어났다. 독감이 유행하여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했고, 1917-8년에는 쌀값 폭등으로 인한 노동쟁의도 늘어났다.
드디어 3.1 운동

3.1 운동은 서울에서 처음으로 학생들에 의해서 일어났다. 파고다공원(탑골공원)에서 모일 예정이던 33인은 거사 누설로 인한 소요를 염려해 태화관에 모였다. 공원에는 이미 소문을 쫓아 온 학생들로 넘쳐났다. 갑자기 경신학교 학생 한명이 독립선언문을 읽었고, 이게 3.1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학생들의 만세는 “조선은 독립되어야 한다”가 아니라, “조선은 (이미) 독립되었다”였다.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고, 일제는 미처 대응하지 못했다. 3.1운동의 첫날 곳곳에서 물리적 충돌은 있었으나 최소한 총격은 없었다.

3월 5일 학생들이 재집결하고, 이에 대해 일본 군인들이 무력진압을 했다. 하지만 서울에서는 사망자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고종 장례를 보러 서울에 왔다가 만세운동을 목격한 지역 주민들이 귀향하면서부터 불거졌다. 3월 중순에서 4월 중순까지 지역에서는 매우 격렬한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거족적인 운동이었고, 희생자도 적지 않았다.

3.1운동은 무력투쟁도 아니었고, 의식적인 민주항쟁도 아니었다. 나라를 잃어버리고, 사람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것을 목격했으며 앞으로 상태는 더 나빠질 것이라는 막연한 걱정들이 모여 공원에서의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필연의 흐름을 이끌어 낸 것이 바로 3.1운동이 지닌 독특한 지형이었다.

(요약 : 홍수진 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