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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차 수요대화모임(2011.05.25) 정리- 박준성(역사학 연구소 소장)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8 11:03
조회
420
박준성 선생의 슬라이드 사진으로 보는 ‘잊혀진 노동자의 역사’

인권연대 편집부



박준성 선생(역사학 연구소 소장)은 커다란 등산용 가방을 매고 나타났다. 슬라이드를 볼 환등기가 든 가방이었다. 꽤 무거워보였다. 요즘엔 어딜 가나 빔 프로젝트가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사진을 담은 USB 한 개면 충분할텐데도, 그는 환등기를 고집했다. 환등기로 봐야 질감이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거 였다. 마침 강의가 있었던 날은 ‘밤엔 잠 좀 자자’며 파업 중인 유성기업 노조 파업현장에 대한 공권력 투입이 예정된 날이었다. 하루 종일 파업 현장에서 그 무거운 가방을 매고 있었단다. 운전면허도 없기에 무거운 가방을 매고 대중교통수단에만 의지해야 한단다. 누가 뭐라지도 않는데, 이렇게 무거운 짐을 기꺼이 맨 사람들이 있다. 그들 덕에 우리가 산다.

무거운 환등기를 챙겨 다니는 이유에 대해 박준성 선생은 루쉰 이야기를 꺼냈다. 일본 유학 시절, 루쉰은 환등기로 본 한 장의 사진 때문에 인생이 바뀌게 되었다. 루쉰은 그의 첫 소설집 <눌함> 서문에, 왜 의학공부를 포기했는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 당시, 오랫동안 나는 중국 동포들을 만나지 못했다. 어느날 모처럼 중국인들을 슬라이드에서 보았다. 중국인 한 명이 손을 뒤로 묶인 채, 사진의 중앙에 있었고, 다른 중국인들을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육체적으로 그들은 튼튼하고 건강했지만, 그들의 표정을 통해 너무 명백하게 그들이 정신적으로 둔감하고 멍청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진 설명에 의하면 손을 뒤로 묶인 중국인은 러일전쟁 중에 일본국을 염탐한 혐의로, 곧 본보기로 참수형을 당할 예정이었다. 그를 둘러싼 중국인들은 그 광경을 즐기고 있었다.” 동포 중국인이 처형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무감각하게 그 장면을 즐기던 중국인들의 모습은 루쉰에게 충격이었다. 육체적 질병을 고치기보다, 중국인의 정신적 질병을 고치는 게 더 급선무라고 생각한 루쉰은 단박에 의학공부를 중단해버렸다.

이렇게 슬라이드 사진 한 장이 인생을 바꿀 수도 있기에, 박준성 선생은 슬라이드 사진을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강의 때 그는 모두 200여장의 슬라이드 사진을 보여주었다. 하나 하나는 모두 잊혀져선 안되는 중요한 사건과 인물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사진의 주인공이 노동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이미 잊혀진 존재가 되어 있었다.

척박한 일제시대였던 1931년 5월, 평양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가 고공시위를 벌였던 장주룡이 있었다. 똥물을 뒤집어 쓴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도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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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이 지금도 기억되는 것은 전태일을 역사로 불러낸 사람들 때문이었다. 변호사 조영래는 <전태일 평전>을 썼고,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지금껏 아들의 몫까지 다하겠다며, 운동의 전선을 지키고 있다. 조지 오웰이 <동물농장>에서 말한 것처럼, “과거의 기억을 지배하는 자가 오늘의 역사를 주도한다.” 사심(私心)없는 지도자 박정희의 노고 때문에 경제발전이 가능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은 까닭은 그 시대를 떠받쳤던 숱한 노동자들의 삶을 기억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면, 잘못된 역사는 되풀이 된다. 역사의 주역들을 꾸준히 불러내는 한편, 지금 여기의 일과 사람들을 부지런히 기록하고, 역사에 남기지 않는다면, 잘못된 역사는 끝없이 이어질 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