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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차 수요대화모임(04.05.19)정리 - 이희수(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8 09:37
조회
378

정보 불균형이 이슬람에 대한 오해 만들었다.
“이라크 전쟁, 미국의 무모한 침략전쟁” - “파병, 원점에서 재검토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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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에서의 종전을 선언했던 당초의 주장과는 다르게 무장세력에 의한 저항이 계속되고 있고, 이라크 포로에 대한 미군의 고문이 폭로되면서 부시정권이 사면초가에 놓인 상황에서 이라크전쟁과 이슬람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는 시간이 마련되었다.

19일 인권연대 5월 수요대화모임 강사로 나선 이희수교수(한양대 문화인류학과)는 이슬람과 미국 등 서구와의 정보 불균형을 지적하면서, 이라크 전쟁을 통한 미국의 음모가 무엇인지를 거듭 확인해 주었다.

이교수는 Islam(이슬람)이라는 단어의 의미 자체가 평화를 담고 있음에도 이슬람교가 호전적 종교로 비춰진데 대해 “‘한손엔 칼, 한손엔 꾸란’이라는 인식을 갖게된 것은 서구의 반이슬람 이미지메이킹이 큰역할을 했다”며, “이슬람과 서구의 정보 불균형이 오해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 9.11테러가 우리사회에 준 영향을 “50년동안 미국에게만 맞춰졌던 안테나를 변화시키는 계기였다”며,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를 보는 인식을 심어줬다”고 정리했다.

이어 그는 미국이 이라크 전쟁때 내세웠던 명분인 대량살상무기 보유가능성, 9.11테러의 배후인 알 카에다와 연계 가능성, 이라크 해방과 민주정부 수립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했다.

이교수는 “대량살상무기가 없다는 것은 이미 전문가들과 조사담당자를 통해 입증되었다”고 비판한 뒤, “후세인은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과 알 카에다에 의해 제거대상 1호였다는 점은 연계 가능성의 허구성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라크 포로 학대에 대해 “미국의 경제봉쇄로 인해 가족 중에 죽지 않은 이라크인이 없을 정도로 이라크 내 반미감정은 회복될 수 없는 것이다”며, “친미정권 수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서 행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슬람교는 부자간에도 치부를 드러내지 않으며, 여성에 대한 명예살인이 인정되기도 한다”며, “성학대는 영적인 살인이며, 이슬람을 잘 아는 사람에 의해 초기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다”고 주장했다.

이교수는 결론적으로 “이라크 전쟁은 9.11 이후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진 미국 시민들을 치유하기 위한 무모한 도발이었다”며, “거짓 정보와 거짓 명분으로 미국시민은 물론 지구촌 전체를 우롱한 전형적인 침략전쟁”이라고 단정지었다.

아울러 계속되는 저항에 대해서도 “조국을 빼앗긴 자의 저항을 테러라고 폄하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미국이 이라크인들의 마음을 읽고 그게 걸맞는 대안을 찾지 않으면 이라크 점령은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고 밝혔다.

이교수는 한국의 파병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포탄 한 발 떨어지지 않은 쿠르드지역에 재건부대 파병은 우스운 일”이라며, “명분없는 전쟁참여와 또 다른 외교적 분쟁을 낳을 수 있는 파병은 원점에서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교수는 이어 진행된 질의응답에서 대선 이후 미국의 이라크 정책의 변화를 묻는 질문에 “부시가 낙선되어도 근본적인 정책변화는 힘들 것이고, 다만 UN을 통한 다자간 협상으로 바뀔 것이다”고 전망했다.

한편, 이교수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도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는 “자살폭탄공격을 하는 사람의 95%가 대학 학력자이고, 이중 20%가 여성이다”며, “아무런 목적없이 조국을 위해 빼앗긴 자의 저항을 테러라고 하는 것은 서구인들이 만들어낸 논리일 뿐이다”고 일축했다.




 

<수요대화모임 지상 중계>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 2004년 5월 19일) ☜ 클릭


<이희수 교수 강연록>


- 이라크 전쟁과 이슬람 문화의 이해 -



신임 스페인 대통령의 이라크 철군 발표와 11월 미 대선을 앞둔 부시의 올인 선거전략과 맞물려 이라크 사태는 혼미를 거듭하고 있다. 무엇보다 2만명 가까운 무고한 생명를 앗아간 참혹한 전쟁이 당초의 명분을 거의 모두 상실한 채, 가진 자의 애매모호한 궤변으로 전쟁이 지속되는 기가 막힌 약육강식의 힘의 정치에 인류는 절망하고 있다. 인위적인 중동에서의 질서재편이 겉보기에는 아랍의 민주화 압박과 개방을 유도하리라는 순기능이 기대되지만, 장기적으로는 뿌리깊은 반미감정이 아랍인들의 가슴 깊숙이 다시 한번 각인되어 대를 잇는 복수와 증오의 몸부림이 더욱 거세질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들은 미국을 향해 그렇게 무모하게 보이는 저항을 계속하는가?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지고 이슬람 세계에서 과연 종교적 가치의 본질과 가르침은 무엇인가?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까지 왜곡과 허구인가?
1. 이슬람과 우리 그리고 세계

9.11 사태 이후 또 다시 폭력의 전면에 이슬람이 등장한다. 세계분쟁지역의 대부분에 직접 간접으로 이슬람이 개입하고 있는 것으로 비친다. 이라크에서의 반미저항과 무차별 진압으로 이슬람권이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우리 사회에서는 두 가지의 흐름이 함께 흐르고 있다. 이슬람의 과격성과 폭력성에 대한 비판과 우려가 높아지는 한편 이슬람 문화를 우리의 시각에서 올바로 이해하자는 움직임도 크게 높아지고 있다.

이슬람의 가르침이 평화와 평등에 두고 있음에도, “Islam(이슬람)”이라는 단어의 의미자체가 평화를 담고 있음에도 지구상에서 가장 평화와 거리가 먼 종교처럼 이슬람이 비춰지게 된데는 이슬람권 내부의 문제도 없지 않겠으나, 서구의 조직적인 반이슬람 이미지 메이킹이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과연 이슬람이 어디까지 테러와 폭력주의와 연결되어 있을까? 이슬람의 교리에 그러한 구절들이 존재하고, 어떻게 현실적인 적용을 하는 것일까? 21세기 글로벌시대 이슬람은 과연 시대착오적인 가치관을 고수하면서 저항만 할 것인가? 이런 문제들을 한번 정리해보자.

지구촌은 동양과 서양이라는 두 개의 세계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어느 양쪽에도 속하지 못하지만 찬란한 문명과 문화를 가진 또 다른 인식세계가 엄연히 존재한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독특한 사상체계를 가지고 있다. 바로 이슬람세계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를 중양(中洋)이라 표현하자고 주장한다. 세계 4대 고대문명권의 3개(이집트-메소포타미아, 인더스)가 이슬람 세계에 속해 있고, 기독교보다도 힌두교보다도 불교보다도 많은 13-15억이라는 세계 최대의 종교인구를 갖고 있는 세계, 유엔에 가입하고 있는 정회원국만 57개에 달하는 거대한 문화권을 우리는 지난 50년간 무지 속에 방치해 왔다. 전근대적이고 후진이라는 낙인을 찍어, 물질가치의 오염에 젖은 사고방식과 인식체계의 1차적 희생물로 삼아 왔다.

오랜 단절 끝에 우리가 다시 이슬람 세계를 만나게 되는 시점은 1970년대 초였다. 이미 우리 산업구조가 거의 완전한 석유에너지 체제로 바뀌고 난 후였다. 예나 마찬가지로 그들은 석유라는 물품을 주는 교역대상자로 파악되었다. 원유의 70%이상을 의존하는 경제파트너이면서도 너무나 도도하고 건방지게 산유국을 대했다. 중동 산유국의 건설시장에 연인원 100만명 이상이 진출하여 막대한 외화수입으로 100억불 고도성장의 원동력이 되었음에도 그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태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서구문화 일변도의 가치관이 가져다 준 난치병의 후유증을 지금 심하게 앓고 있는 셈이다. 왜 그런가?

첫째, 건국 이후 오늘날까지 한번도 우리의 입장에서 제대로 이슬람과 이슬람사회를 들여다 볼 기회의 창을 가져보지 못했다.
둘째, 이슬람세계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적대적 이해당사자인 유대와 미국중심의 언론과 정보를 통해서만 아랍이나 이슬람의 문제를 인식하고 판단해 오는 과정에서 조직적으로 양산된 오류와 편견의 구조적 양산이다.
셋째, 이번 9.11미국테러사건을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났지만, 일부 급진 이슬람 과격분자들의 테러와 폭력행위를 전체 이슬람의 모습으로 이미지메이킹해 가는 서구의 홍보전략을 거의 무분별하게 수용하고 있는 문제이다.
넷째, 이슬람과 아랍을 동일시하는 초보적인 상식의 오류가 지적사회에까지 만연해 있다는 점이다.
다섯째, 이슬람은 서구가치체계와는 달리 정교일치 사회구조를 갖고 있다.
2. 이슬람의 특징

마호메트의 탄생과 이슬람의 등장은 20세기에 걸친 세계사의 가장 극적인 사건의 하나였다. 한 인간에 의해 완성된 종교가 놀라운 역동성으로 지극히 짧은 기간에 인류사회에 이토록 광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우리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다. 특히, 최근 소련연방의 붕괴와 사회주의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전세계 14억 이슬람인들은 남다른 승리감을 맛보았다. 자본주의의 퇴조가 조만간 예견된 상태에서 이슬람의 가치틀이 21세기 인류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할 것이라는 선험적인 확신 때문이었다.

이슬람교에서는 아담에서 아브라함, 모세, 예수로 이어지는 성경상의 많은 선지자들을 시대적 임무를 띤 훌륭한 인간 예언자로 인정하고 추앙한다. 무함마드는 예수 이후에 신에 의해 보내진 마지막 예언자로서 앞선 복음의 부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곡해되고 변질된 신의 진리의 말씀을 바로잡고 완성하는 사명을 가졌다고 본다. 따라서 꾸란은 모세오경, 시편, 복음서 등 앞선 경전들의 내용을 순화, 보완해 주거나 확증해 주는 최후의 경전이 되기 때문에, 이 땅에서의 종교는 이슬람으로 완성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3. 오해받는 이슬람

1)한 손에 꾸란, 한 손에 칼
일찍이 서구인들이 이슬람인들에 의한 단시일의 정복사업을 소위 “한 손에 꾸란, 한 손에 칼”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슬람의 호전성과 강제전파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이교도에 대한 적개심과 확산되는 이슬람 세력에 대한 위기감에서 만들어진 용어에 불과하다. 오히려 개종하게 되면 인두세나 토지세 등의 일부가 면제되었음으로 정부는 국가수입의 증대를 위해 피정복민의 개종보다는 공납을 요구하였다.

2)일부다처 문제
이슬람의 기본 결혼제도는 일부일처이다. 다만 전쟁과 기근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다처의 문을 열어놓고 있다는 점이다.
“만일 너희가 고아들을 공평하게 대해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면, 결혼을 할 것이니, 너희가 마음에 드는 여인으로 둘, 셋, 넷을 취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을 공평하게 대해 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생긴다면 한 여인으로 족하니라....”(꾸란 4:3)

3)차도르, 여성할례와 여성억압 기제
이슬람의 차도르는 정숙함의 상징이다. 외간 남자들을 자극하여 정숙함을 잃지 말라는 꾸란의 가르침에 근거한다. 따라서 얼굴까지 가리고 남성과 눈길을 주고받았다고 해서 공개적인 처벌을 받는 극단적인 일부 이슬람사회의 행태는 이슬람의 본질적인 가르침에 근거하지 못한다. 여성할례는 이슬람의 가르침과 관련없는 아랍의 토착적 관습이다. 남성할례가 하나님 앞에서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한다는 가르침에 비추어 신체의 가장 더러워지기 쉬운 부분을 정화한다는 의미을 담고 있지만, 여성할례는 그러한 의미를 주기 어렵기 때문이다.
4. 거짓 명분으로 시작된 전형적 침략 전쟁

전쟁은 무릇 선과 악의 함수관계다. 자신은 선이고 상대는 악이다. 악을 다이나믹하게 극대화해서 전쟁을 정당화하는 것은 역사가 말해주는 강자의 특권이다. 2003년 3월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도 그랬다. 그들이 내세운 명분은 사담 후세인 정권이 미국을 공격할 수 있는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9.11 테러로 미국을 공격한 알 카에다와 연계되어 있고 테러단체들을 지원해 왔으며, 수십만의 자국국민을 살해한 용서받지 못할 독재자를 제거함으로써 이라크 국민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키고 이라크의 민주화, 나아가 왕정과 독재정권에 신음하는 중동전체의 민주화 도미노를 꾀하겠다는 것이었다.

9.11 테러로 이미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뀐 미국 시민들은 이라크의 놀라운 죄목들에 경악했다. 심리적 공황상태에서 끊임없는 테러 공포에 시달리던 그들에게 알 카에다를 비호한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린 것으로는 치유가 되지 못했다. 오사마 빈 라덴은 오리무중이고, 오랜 내전으로 거의 초토화되어 더 이상 무너질 것도 없는 흙벽돌 건물을 공격하면서 무고한 시민들만 죽어나가는 모습을 지켜본 미국 시민들도 아프가니스탄은 적절한 희생양으로 부족했다. 그래서 이라크가 선택되었다. 이미 이라크는 9.11 테러 직후부터 부시 행정부 매파 관료층인 소위 네오콘(신보수주의의 약칭)들로부터 공공연히 다음 공격대상으로 거론되고 있었다. 적절한 기회와 그에 걸맞는 명분 쌓기가 조직적으로 시작되었다. 부시행정부가 9.11이라는 인류의 비극을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충족하기 위한 도구로 삼으려 했다는 거센 비난이 일고 있는 이유다. 대기업들이 소유하는 언론들은 앞장서 이라크 침공을 외쳤다. 전쟁을 시청자의 관심을 묶어두면서 평균 30% 이상의 고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모든 전쟁 명분은 거의 완전한 허구였다.

이라크가 유엔이 정한 기준을 초과하여 국제사회를 위협할 생화학무기와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여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이미 10여년에 걸친 유엔의 무기사찰로 충분히 입증되었다. 특히 걸프전쟁 직후부터 시작된 12년의 경제제재로 이라크는 그러한 여력이 없었고, 미국과 영국에 의해 자국 영공이 비행금지구역으로 일방적으로 지정되어 모든 군사시설과 이동이 감지되었고, 의심나는 시설은 시도 때도 없이 무수히 폭격을 당했다. 거의 모든 중동 전문가들이 사담 후세인 정권의 대량살상무기 보유에 회의적인 견해를 보였고, 무엇보다 미국의 정보기관이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2004년 2월, 부시가 가장 신뢰하는 이라크 사찰무기 팀장인 데이비드 게이 박사의 의회 양심선언에 이르렀다. 자신의 과학자로서 양식에 비추어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한다는 것은 허구라는 것이다. 거의 모든 중동 전문가들이 상식처럼 알고 있었던 사실을 확인하는데 전쟁이란 최후 수단이 이미 동원된 후 10개월만의 일이었다.

사담 후세인과 알 카에다와의 연계 주장은 한 편의 코미디같은 억지였다.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사담의 이라크 바스당 사회주의 정권은 철저한 이슬람 박해로 악명을 날렸다. 세속주의와 사회주의의 길을 걸으면서 이슬람 종교지도자에 대한 암살과 투옥, 종교적 박해는 극에 달해 사담 후세인은 전세계 이슬람주의자들의 오랜 공적이었다. 나아가 남부 다수 시아파에 대한 차별과 종교적 탄압은 순니파와 시아파를 망라한 총체적 적의감을 고조시켰다. 사담 후세인은 일찍부터 오사마 빈 라덴에 의해 ‘사악한 지도자’로 타도 대상에 올라있는 반이슬람적인 독재자였다.

이라크 침략 전쟁의 공식 명칭은 “이라크 해방 전쟁”이었다. 젊은 미군들은 잔혹한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고통받는 이라크 국민들을 구한다는 투철한 전쟁명분으로 참전했다. 이라크 진격 첫날부터 그러한 명분은 철저한 기만이었다는 사실을 미군들은 깨닫기 시작했다. 성조기를 흔들며 거리를 뛰어 다니던 아이들과 만나면 손을 흔들던 일부 시민들의 행동은 침략자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본능적 보호의 제스처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데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 곳에서도 미군을 진정으로 반기는 환영의 분위기는 없었다. 곧 바로 두렵고 끈질긴 저항의 자살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고, 독재자인 사담 후세인이 비굴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체포되는 장면을 보았으면서도 미군에 대한 저항은 좀처럼 수그러들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후세인을 싫어하지만, 그렇다고 침략자인 미국을 이 땅에 머물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이라크인들의 확고한 애국심 앞에 미국은 고전하고 있다. 이제는 누구도 이번 침략을 이라크 해방 전쟁이라고 목청을 높이지 않게 되었다.

이번 이라크 전쟁은 거짓 정보와 거짓 명분으로 미국시민은 물론 지구촌 전체를 우롱한 전형적인 침략전쟁이었다. 이를 잘 아는 미국의 오랜 맹방 유럽과 전세계 시민들이 전쟁을 반했지만, 심지어 유엔의 결의안이라는 인류가 스스로의 보호를 위해 마련해 놓은 최소한의 규범까지도 하루아침에 벗어던지고 전쟁을 시작했다. 부시 행정부의 입장에서는 악의 축을 응징하는 의미있는 전쟁일지 몰라도 지구촌 전체에게 이번 전쟁은 더럽고 추악한 전쟁일 뿐이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정부와 국민이 동시에 지지한 나라가 미국뿐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새겨야 한다. 그러한 전쟁에 미국의 대변인 역할을 자청한 일부 국내언론과 정치인, 국익을 내세우며 놀아난 한심한 외교관리들의 무능과 시대착오적인 발상에도 경종을 울려야 한다.
5. 9.11 테러와 부시 야욕의 희생양

지금 미국 사람들은 테러 공포에 휩싸여 있다. 9.11 사태가 준 충격은 집단 히스테리로 표현해도 좋을 만큼 엄청난 불안상태에서 미국사회는 여전히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심리상태가 이슬람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를 부추켰다. 이라크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고, 유엔 무기사찰단에 의해 현재 개발하고 있지 않음이 밝혀졌음에도, 미국은 세 가지 가능성의 삼단논법을 내세웠다. 즉, 이라크가 향후 핵무기나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할 가능성이 있고, 그 무기가 테러조직에 흘러 들어갈 가능성이 있으며, 테러 조직은 그 무기로 미국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라크를 침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과연 지구촌의 어떤 나라가 미국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이 억지논리가 미국사회에 먹혀들고 있다는 것이 오늘날 지구촌의 비극이다.

또 부시 행정부는 사담 후세인을 스탈린과 히틀러에 버금가는 학살자로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란-이라크 전쟁 직후 북부에서의 쿠르드족 봉기에 화학무기를 사용해 수만명을 학살하고 남부 바스라 지방의 시아파 봉기에 대한 잔학한 탄압을 부각시켰다. 미국은 당시 이 사건에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미국에게 쿠르드의 희생은 얄팍한 인도주의적인 동정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중동에서의 자국이익 보호를 위해 전통적으로 미국 행정부는 쿠르드족에 대한 탄압을 묵인하거나 간접 지원해 왔다. 터키정부나 이라크 정권의 쿠르드족 탄압은 철저한 미국의 군사원조 아래 이루어져왔기 때문이다. 20세기말의 대혼란과 쿠르드 학살의 현장은 미국인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다른 참상에 비하면 인도적인 지원도 매우 미미한 편이었다. 따라서 쿠르드족 봉기 탄압을 빌미로 후세인을 세기의 학살자로 응징하겠다는 미국의 명분은 너무도 뻔뻔하여 지성인의 말문을 닫게 한다.

이라크 침략 전쟁은 부시 행정부의 의중 속에 오래 전부터 계획되어 있었다. 9.11 테러가 일어나자 그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알 카에다와 후세인의 연계설을 공개적으로 내비치며 이라크 공격을 이미 그 때 마음먹고 있었다. 결정적인 전쟁 명분과 증거찾기에 골몰하던 미국의 무리한 몰아부치기 때문에 1998년 유엔무기사찰단이 이라크에서 철수하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했다. 무기사찰의 댓가로 풀어주어야 하는 이라크에 대한 금수해제조치는 미국의 비토권 행사로 번번이 거부되었다. 생필품과 기초 의약품, 심지어 연필과 볼펜마저도 심 속에 화학물질이 함유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수입이 금지되는 상황에서 100만 이상의 고귀한 생명이 죽어나갔다. 그 중 절반은 어린아이들이었다. 지구촌 최악의 인권문제는 미국의 경제제재로 무고한 생명이 죽어나가는 이라크였다. 지금 이라크인들이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해 인명을 죽인 주범은 바로 미국이라고 믿고 저항을 계속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지금 당장 미국의 1차적 목표는 테러위협으로 불안한 미국사회의 집단 강박증을 해소하기 위한 사회병리학적 고단위 처방이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아무런 저항능력도 없는 폐허의 땅 아프가니스탄을 무차별 공격해서 무고한 민간인 사상자만 양산하고 오사마 빈 라덴이 활개치도록 내버려 둔 전쟁을 승리로 자축하면서, 이번에는 보다 확실한 희생양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9.11 테러 직후, 미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배후에 이라크가 있다고 지목하고 그 때부터 이미 이라크전쟁 시나리오가 공공연히 마련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라크와 중동에서의 분위기는 미국의 희망과 너무나 거리가 멀다. 전세계가 갖고 있는 무기를 왜 이라크만 갖지 못해야 하는가? 이라크가 핵무기를 소유하지도 개발하지도 않는다는 것은 사찰단에 의해 확인되고 미국내 전문가들도 인정하고 있다. 무기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것이 공격용이냐 방어용인가는 전적으로 자의적인 판단에 따를 뿐이다. 그리고 이라크가 갖고 있는 재래식 무기로 미국을 위협한다는 것은 억지이고 과장이다. 지구촌의 절대 다수가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국가로 미국을 압도적으로 많이 꼽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결국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지 않고, 미국을 위협할 능력도 그러한 의사도 없는, 더욱이 이라크의 공격으로 단 한 사람의 미국인에게도 위해를 가한 사실이 없는데도 미국은 이라크를 공격한 것이다. 선제공격이란 희한한 논리를 내세우며. 결국 불행한 이라크 민중들은 부시의 재선가도와 9.11 테러공포증을 치유해주려는 미 행정부의 무모한 도발로 21세기 벽두의 최대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6. 반복되는 약자의 저항과 독재의 악순환

이라크의 저항은 계속되고 있다. 고통받는 이라크 민중을 위한 해방전쟁이라는 미국의 거창한 구호는 어느새 꼬리를 감췄다. 이라크 국민들은 혼신을 다해 미국에 저항하고 있다. 후세인이 좋아서도 그를 다시 권좌에 앉히기 위해서도 아니다. 신성한 조국을 침략한 미군을 몰아내기 위해 저항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테러도 아니고, 종교적 이데올르기에 팔려간 정치적 집단의 저항도 아니다. 외국인에게 점령당한 자신의 조국을 되찾아야 된다는 몸짓일 뿐이다. 나라를 뺏기고도 아무렇지 않게 점령군을 환영하는 민족은 이미 혼과 정신을 잃은 희망없는 족속일 것이다. 이러한 당연한 저항을 테러나 후세인 잔당들의 발악쯤으로 폄하하려는 미국의 심정은 측은하기만 하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 함께 춤추며 날뛰는 우리 언론이다. 물론 모든 악조건 속에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를 갖춘 가공할 적들과 대적하기 위해서는 통상의 교전 방식으로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저 몸을 바쳐 싸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던져 침략자에 맞서는 것이다. 필요한 경우 자신들을 지원하는 누구의 도움도 아쉬울 것이다. 반미에 들끓고 있는 외부의 이슬람 무장조직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라크에 몰려든다. 이라크 민중들의 환영과 보호를 받으며 미군을 몰아내기 위한 조직적인 저항을 계속하는 것이다. 어떤 조직이 누구의 지원을 받으며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지는 사실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미국이 이라크인들의 마음을 읽고 그에 걸맞는 대안을 찾지 않는 한 미국의 이라크 점령은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7. 사담 후세인 체포와 미국의 새로운 딜레마

사담 후세인의 체포로 이라크 사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듯했으나, 저항과 자살공격은 끝간데 없이 계속되고 있다. 미국을 더욱 초조하게 하는 것은 후세인의 제거로 이라크가 전쟁 이전 보다 더욱 혼미스럽고 자칫 내전상태로 치다를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전쟁을 반대하던 많은 중동전문가들이 우려하던 결과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셈이다. 정권의 핵심에 있었던 순니파와 인구의 다수를 점하는 시아파, 북부 유전지대를 장악하고 결코 만만치 않는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구축하고 있는 쿠르드족과 투크르멘족 등을 하나의 깃발아래 묶을 수 있는 카리스마와 지도력이 현재로서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의 허수아비 전위대로 구성한 과도통치위원회는 이미 그 역할을 포기한지가 오래고, 미국이 점찍어 놓은 찰라비 같은 인물도 또 다른 독재권력의 꿈에 젖어 있어 그를 대안으로 선택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최악의 경우 이라크가 무너지더라도 걸프연안에서의 미국의 안정적 교두보를 확보해서 유가를 비롯한 전략적 이해를 굳건히 지키겠다는 구상도 쉽지 않아 보인다. 테러를 응징한다며 시작된 이라크 전쟁으로 사실 중동에서 테러와 거의 연계가 없었던 이라크를 중동의 새로운 테러 무대로 바꾸어 놓았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미국 점령자를 몰아내자는 이슬람권의 반미 공감대를 최대한 활용하고자 하는 테러집단들이 대거 이라크로 몰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후세인 체포로 저항이 수그러드리라는 당초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가장 강력한 반미 테러의 교두보를 이라크에 마련해 준 셈이 됐다. 중동에서의 테러는 주로 이스라엘을 겨냥한 것이었다. 미국이 그 배후에 있지만, 뚜렷한 직접대상이 없어 대미테러는 한계를 가졌었는데, 이제 그들은 물을 만난 것이다. 중동 한복판에 미군이 국제법을 어기고 이라크를 점령하고 있는 상황은 명분과 여론 지지에서 테러집단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호기인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후세인 시대를 그리워한다든지, 그의 잔존세력이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업고 복귀하리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거짓 시나리오다. 그들은 결코 후세인을 지지하지 않는다. “후세인이 싫지만, 미국이 더 싫기 때문에 저항하는 것이다.” 후세인 제거에 대한 환호가 미국의 점령을 수월하게 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을 미국은 처음부터 간과해 왔던 것이다. 명백한 침략을 전세계의 반대를 무릎쓰고 이라크 해방이라고 우기며 시작한 전쟁 때부터 이미 예고된 바이기는 하지만.
8. 한국의 파병과 중동의 정서

그럼 이미 파병을 결정한 우리에게 이라크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무엇보다 우리 민족이 키워온 오랜 역사적 사명감을 이러한 명분없는 전쟁의 흙탕물을 뒤집어쓰며 역사의 더러운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싫다. 면밀한 분석과 설득력없는 형이상학적인 막연한 국익논쟁도 마음에 걸렸다. 어떻게 이라크 파병이 한-미동맹의 문제만인가? 중동국가들은, 또 국민들은 이번 파병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장기적으로 국가신인도나 경제시장 개척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될지? 더욱이 미국의 이라크 침략에 한 목소리로 반대를 하고 있는 동남아 이슬람사회의 한국 이미지 요인도 고려를 해야 한다.

파병을 위한 준비부족, 파병지 선택에 있어서는 최악의 고려 등등 이미 파병으로 얻을 수 있는 추상적인 국익보다 잃어야 할 것이 분명하고 너무나 많은 이 문제에 이제는 종지부를 찍자.
9. ‘이라크인에게 이라크를’ 과연 밝은 미래가 보장되는가?

이라크는 수렁에 빠졌다. 미국이 쉽게 이라크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이고 보면, 이라크의 장래는 지금보다 더욱 혼란스러운 상태가 되지 않을까 하고 많은 전문가들이 걱정하고 있다. 이라크는 기본적으로 복합사회다. 1932년 이라크를 독립시키면서 영국이 만들어 놓은 통치전략의 불행한 결과다. 유전지대를 장악하고 있는 쿠르드 공동체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고, 이라크 북부 유전지대를 통치하고 있던 터키에게 석유 이권을 박탈했다. 1979년 이란에서의 이슬람 혁명 성공 이후에는 반미노선이 뚜렷한 이라크 다수 시아파들이 정권을 잡지 못하게 순니 소수정권인 사담 후세인을 전폭적으로 지지해 왔다. 이라크 북쪽에는 또 터키계인 투르크멘 집단이 자신들도 자치와 독립을 요구하고 있다.

그나마 지금까지 다양한 이질적인 집단을 조정하면서 이라크 국가통합을 유지할 수 있었던 요인은 첫째는 이슬람의 공통적 가치, 반미라는 강력한 연대의식, 후세인 정권의 카리스마와 강력한 독재였다. 그러한 후세인의 독재를 지지해주고 심지어 강화시켜준 배후에는 항상 미국이 빠지지 않고 등장해 왔다. 조만간 이라크는 미국의 식민통치에서 미국의 조정을 받는 과도정부로 다시 서서히 민주국가로 거듭나리라는 희망섞인 전망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민주주의가 달성되는 과정에서 겪어야 될 돌발변수가 너무나 많다. 우선 다양한 집단들의 상충하는 이해를 조정하고 이끌어 갈 카리스마를 갖춘 리더십이 보이지 않는다. 쿠르드의 자치와 독립에 대한 것도 터키와 이란, 시리아 등 주변국가들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쉽지 않은 문제다. 시아파 중심의 정권도 민주적인 절차에는 부합하지만, 미국으로서는 밤잠을 설치는 위험부담을 안고 있다. 언제 바로 이웃의 이란과 연계하여 미국의 이익에 치명적인 부메랑으로 돌아올 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재 상태에서 민주적인 절차와 방식의 고집은 자칫 이라크 국가 통합을 해치고 혼란 상태를 초래하여 레바논에 버금가는 내전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이미 미국은 예배보는 사람들을 향한 모스크 폭격과 유일한 친미 협조 세력인 시아파까지 포기함으로써 내전을 통해 이라크를 혼란에 빠뜨리고 원격통치를 통해 석유자원을 통제하고 나아가 이란을 압박하겠다는 분명한 전략적 야욕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시나리오를 알면서 파병을 하겠다는 무모함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앞으로 6월 30일 민정 이양 이후 미군 위주에서 유엔주도의 국제평화군으로 대체하고, 국제법과 규범을 존중하면서 이라크를 재건하고, 국가테러의 주범인 이스라엘 정권을 강력하게 압박하여 팔레스타인 문제를 하루 빨리 해결하는 것이 또 다른 사담 후세인을 막는 첩경일 것이다.
10. 이라크 전쟁이 가져다 줄 변화

미국의 부당한 이라크 침공으로 중동전체 민중들의 반미정서는 어느 때보다 강하게 각인되었다. 침공 명분뿐만 아니라, 침공 과정에서의 민간인 살상, 점령 후의 오만한 강공책과 이슬람 정신유산에 대한 경시, 전직 지도자들에 대한 공개적인 모욕 등으로 막연하고 관념적인 반미정서가 보다 구체적이고 목표가 뚜렷한 반미 운동으로 옮겨붙을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이는 이슬람 강경세력을 자극하여 테러가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라는 일반적인 분석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동시에 인근 아랍국가 지도자들에는 심각한 교훈이 되었다. 미국에 저항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며, 비민주적인 독재자의 과오와 몰락에 대한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면전에서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아랍국가의 민주화에 촉매제가 될 것이다. 특히 석유로 부를 축적한 산유국 왕정국가들의 고민은 더욱 커졌다. 미국에 의존해 왔던 이들 정권에 대한 반미적인 민중들의 저항과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의회제도가 활성화되고, 사법 제도의 개혁, 여성의 사회진출 등이 단계적으로 허용될 전망이다. 여성의 운전조차 허용하지 않는 사우디의 변화는 곧 아랍전체의 혁명적인 변화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