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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1호)함께 하는 이야기- 민중의 벗, 김승훈 신부님을 추모하며
부음은 요란한 팩스 소리와 함께 전해졌습니다. 신부님을 뵌 적도, 뉘신지도 잘 모르는 동료 활동가가 무표정하게 "신부님이 돌아가셨네요"라는 말을 전해 주었습니다. 산다는 것이 이렇게 허망한 것이지 싶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부님에 대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재야단체의 간부로서의 모습,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대표로서의 모습, 또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의 삶을 봉헌하고자 하는 사제로서의 모습 따위입니다.
그러나 저같은 인권운동가들에게 신부님은 아버지요 형님 같은 분이셨습니다. 참으로 착한 분이셨고, 마음으로부터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셨던 분이셨습니다.
한총련이 이적단체로 규정되는 계기가 되었던 1996년 여름 연세대 사태가 진행되던 때였습니다. 무슨 회의를 끝내고 나오시던 신부님은 명동성당 앞을 지키던(?) 한 경찰관에게 평소의 모습과 달리 버럭 화를 내시며 한총련 애들이 아무리 잘못했다 해도 밥은 먹여야 하지 않냐, 도대체 원천봉쇄로 학생들이 오갈 수도 없게 만들어 놓으면 어떻게 하냐고 화를 내셨습니다.
그 경찰관이 신부님께 들은 이야기를 상부에 제대로 전달할 리도 없고, 또한 그 이야기로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신부님도 잘 아셨을 것입니다. 그 뒤 신부님은 연세대 사태를 통해 무려 500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구속되고, 정부와 언론이 한통속이 되어 학생들의 통일운동이 무분별하고 과격하다고 공격하는 상황 때문에 어떤 답답함, 가슴이 꽉 막히는 듯한 어쩌면 우울증과도 같은 그 무엇이 남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을 통해 저는 얼굴도 모르는 이들을 한 형제자매로 여기고,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진정한 사제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인권피해자들을 돕는 일이라면 "내가 도움이 된다면"이라는 말씀만으로 언제든지 기꺼이 역할을 맡아주셨습니다.
양심수들의 석방을 위해서는 물론이고, 일터에서 쫓겨난 교사들이나 노동자들, 탈북자들, 군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들에 이르기까지 전략이니 전술이니 같은 것을 따지지 않고 언제나 한결같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신부님이 사목했던 동대문, 홍제동, 왕십리, 시흥성당은 언제나 명동성당과 더불어 민주화운동의 매우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습니다.
동일방직 노동자들이 서러운 눈물을 흘린 곳은 동대문성당이었고, 전교조가 첫 걸음을 내딛은 것은 홍제동성당이었습니다. 범민련과 8.15 민족공동행사 때문에 쫓기던 통일운동가들과 학생들이 몸을 숨긴 곳은 시흥동성당이었습니다. 어떠한 형식이든 간에 집회와 시위가 원천적으로 봉쇄되던 시절, 신부님이 계시던 성당에서는 기도회와 집회가 열렸고, 수배자들이 몸을 숨겼고, 가족을 감옥에 보낸 가족들의 아우성이 넘쳐났습니다. 그야말로 문턱이 닳을 정도였습니다.
늘 어른으로서, 매사에 낙관적이며, 사람은 이만큼만 노력하면, 나머지는 다 하느님이 알아서 채워주실 것이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좋은 분을 잃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또 한명의 어른을 잃게 되었으며, 든든한 민중의 벗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저 비통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