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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다양성을 통해 본 기독교 이해> “예수와 지장보살은 서로 닮았다”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9 10:21
조회
561
“예수와 지장보살은 서로 닮았다”
‘이찬수 강좌’ 5강…‘구원의 종교’라는 공통점을 가진 불교와 기독교

이연옥/ 인권연대 인턴활동가



“기독교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hell, 지옥)에 가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갇혀 있는 영혼들에게도 가셔서 기쁜 소식을 선포했다’(1벧3;19)라는 전승이 있다. 이러한 예수의 모습이 지옥을 포함하여 육도 중생을 다 구원하기 전까지는 정각(正覺)을 이루지 않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의 모습과 닮아 있다”

지난 30일(화) 저녁 7시 ‘종교 다양성을 통해 본 기독교 이해’ 다섯 번째 시간에 이찬수 교수의 ‘다르면서 같은 불교와 기독교’라는 주제의 강의가 열렸다. 이번 시간은 불교와 기독교가 일반적으로 같은 점보다는 다른 점이 더 많이 얘기되고 있는데 실제로는 어떠한지를 살펴보는 시간이었다.

불교적 언어와 기독교적 언어는 서로 다르며 지향하는 세계관도 많은 차이가 있다. 이 교수는 ‘동서철학의 만남’을 지은 김하태씨의 말을 인용해 “동양을 대표하는 불교는 직관적이고, 서양을 대표하는 기독교는 지성적인 경향이 있다”는 설명으로 불교와 기독교에 차이가 있음을 전제했다.

신과 인간 사이를 보는 다른 시각

기독교는 세계의 기원과 근거를 인격적 유일신에게서 보고, 불교는 존재하는 세계를 그 자체로 긍정하면서 일체의 기원적 존재, 인격적 신을 거부한다. 또한 기독교는 신과 인간 사이에서 신의 주도권을 부여하고 신과 인간 간의 불가역성을 말하지만, 불교는 주도권을 쥔 어떤 궁극적 실재를 인정하지 않은 채 사물을 있는 그대로 통일적이고 우주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궁극적 실재와 인간 사이의 가역성을 전제한다.

이 교수는 “기독교에서 신은 신이고 인간은 인간일 뿐 신과 동일하다고 말할 수 없는 반면, 불교에서는 원천적으로 인간과 부처의 동일성에 대해 말한다”며 이런 점에서 기독교와 불교는 분명히 갈라진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종교간 신앙내용을 들여다보면 매우 닮은 여러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역사적 예수는 철저하게 신을 믿고 의지하며 그의 뜻대로 살고자 하였을 뿐 스스로를 신의 차원까지 높이려고 하지 않았으나, 예수가 죽은 뒤 제자들이 예수 선포의 확실성을 위해 예수자신까지 신의 차원으로 높이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깊은 수행과 명상 속에서 인생의 원리와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고 그것을 가르치고 실천하며 살았던 고타마 싯달타는 ‘법이 나의 스승’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으라’고 하여 제자들에게 깨달은 이, 즉 ‘붓다’로 불리게 되었다. 붓다 역시 자신은 스스로 신격화하거나 숭배의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았지만 제자들에게 존중과 숭배를 받게 된 것이다.

예수와 붓다는 역사 내적 존재이지만 제자들은 예수와 붓다를 그들이 전하고 실천한 하느님의 말씀 혹은 법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주는 존재로 받아들였다. 역사적 예수와 붓다가 하느님 말씀의 구체화와 영원한 법의 구체화로 고양된 것이다. 기독교에서 영원한 하느님 말씀과 그 구체화된 육화 도식으로 하느님과 예수를 이해하기 시작하고, 불교에서는 영원한 진리로서의 법신과 그 구체화된 색신 도식으로 법과 붓다를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붓다의 몸’과 ‘그리스도의 몸’을 보는 시각이 닮아 있다

이 교수는 불교에서 몸을 물리적 혹은 생물학적 몸과 본질 혹은 주요 부분, 두 가지로 본다고 했다. 중생은 흔히 생물학적 몸을 불변하는 실체처럼 여기고 그 욕구에 집착하지만, 이것은 극복과 타파의 대상이라고 했다. 몸에 대한 집착을 이겨낼 때 진여를 보게 되는데, 그 진여를 제대로 본 근원적인 주체가 바로 법신이며, 붓다에게 결정적으로 드러난 법이 바로 법신이라는 것이다. 진정한 붓다 그 본래 모습은 역사적 존재 혹은 생물학적인 몸이 아닌 붓다의 지혜(반야)인 것이다.

역사적 존재로서의 고타마 붓다에 대한 강조로부터 역사적 구체성을 초월한 보편적 진리로서의 법신에 대한 강조로 무게 중심이 옮겨가고 있는 점이, 성서에서 예수의 부활과 관련하여 초기에는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강조하다가 점차 초형상적 그리스도로 전이했던 것과 유사하다.

예수나 붓다는 모두 괴로운 육체를 지니고 살았지만, 그리스도나 보신불의 몸은 그러한 근원적 괴로움의 초월자 차원에서 재조명된 몸이라는 점에서 양쪽 다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다.

이 교수는 “중생이 구원을 얻으려고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과 ‘아들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 준다’(요한14;13-14)는 하느님의 외아들 혹은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이름으로 기도하는 신앙구조도 서로 통한다”고 덧붙였다.

기독교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hell, 지옥)에 가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갇혀 있는 영혼들에게도 가셔서 기쁜 소식을 선포했다’(1벧3;19)라는 전승이 있다. 여기서 ‘갇혀 있는 영혼’이란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을 때 하느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셨지만 끝내 순종하지 않던 자들’(1벧3;20)로 구원의 기회를 놓쳐버렸다고 간주되는 이들이다.

알려진 바와 달리 예수는 그들을 영원한 죄인으로 남기려 하지도 않았고, 지옥에 남겨두지 도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곧바로 ‘하늘나라’로 간 것이 아니라 갇혀서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지옥으로 향했다는 설명이다. 이 교수는 ‘그래서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진 것이다.’(1벧4;6)는 성경구절을 통해 “예수의 모습이 지옥을 포함하여 육도 중생을 다 구원하기 전까지는 정각(正覺)을 이루지 않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의 모습과 닮아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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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으로 간 예수’와 ‘지장보살’ 신앙도 다르지 않다.

이처럼 그리스도와 보신불이라는 양쪽 신앙구조의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은 그것을 믿는 이들에게 비슷한 깊이를 지닌다. 기독교인에게 그리스도의 의미와 불자들에게 아미타불, 지장보살 등 다양한 구원자들이 지니는 의미는 깊이의 차원에서 대립되기는커녕 상통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의 표현 형식은 모순과 우열 차원에서 밝혀질 성질의 것이 아니라 저마다 신앙 체험의 근거가 되는 각 전통의 깊이 혹은 그 전통 안에서 발생한 신앙체험의 깊이에 서로 물리칠 수 없을 유사성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교수는 신학자 존 캅이 “기독교 신자들은 불교 신자가 아미타에서 배운 것을 연구함으로써 그리스도에 관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불교 신자들도 기독교 신자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배운 것을 연구함으로써 아미타에 관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한 말에 동의했다.

또 “산의 등정로는 다르지만 호연지기는 비슷하다. 구원에 대한 이론과 개념 설명이 설혹 종교마다 다양할지라도 ‘구원받은 사람’의 삶의 태도에는 상통하는 점이 있다”라고 한 한신대 김경재 교수의 말을 인용하면서, 저마다 궁극적 진리라고 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 내지는 근거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체험은 세계관과 그 표현 방식 상의 차별성에도 불구하고 서로 물리칠 수 없는 비슷한 깊이를 지니는 것으로 보았다.

예수에서 그리스도로, 고타마 붓다에서 보신불로, 구체적 몸에서 정신적․영적 몸의 차원으로 전개되어 나간 두 종교 전통의 역사는 인간 종교 심성의 구조적 유사성과 함께 무엇보다 신앙적 깊이의 상통성을 잘 보여주는 예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교수는 “불교와 기독교에서 쓰는 용어들은 다르지만 신앙의 마음은 다르지 않다”며,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세계로, 불자는 불성의 세계로 받아들이면서 세계 해석의 기초로 삼는다”고 했다.

아울러 “표현에서는 문화적 다양성과 차별성이 드러나고 교의적 표현 내지는 세계관에서는 상반되는 듯 보이는 기독교와 불교지만, 인간 구원의 차원에서는 저마다 비슷한 깊이를 지닌 동서양의 대표적 종교전통이다”라고 정리했다.

2월 6일(화)에는 ‘똘레랑스의 의의와 종교적 관용’을 주제로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이, 2월 8일(목)에는 이찬수 교수가 ‘성서적 타종교관’을 주제로 마무리 강의를 한다.
개별 강의를 수강할 수 있으며, 신청 문의는 인권연대(02-3672-9443)로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