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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산책 ]

'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김재완(방송대 법학과 교수), 신하영옥(여성활동가), 윤영전(평통서문예원장), 이광조(CBS PD), 이문영(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정보배(출판 기획편집자), 정재원(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정지영(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사무국장), 조광제(철학 아카데미 상임위원), 천정환(성균관대 국문학과 교수), 최정학(방송대 법학과 교수), 홍미정(단국대 중동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차례씩 글을 씁니다.

작성자 인권연대
작성일 2016-07-13 (수) 16:06
홈페이지 http://www.hrights.or.kr
ㆍ추천: 0  ㆍ조회: 503      
IP: 218.xxx.74
우리가 몰랐던 톨스토이, 성자인가 전사인가 (이문영)

이문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얼마 전 톨스토이와 관련한 작은 책을 냈다. 제목은 <톨스토이와 평화>. 이 자리를 책을 홍보하는 불순한 목적으로 이용할 생각은 없다. 다만 책을 쓰게 된 문제의식을 칼럼의 독자들과 나누고픈 생각이다. 다음 달이면 톨스토이 탄생 188주년을 맞게 되니 맞춤 맞기도 하다.

 한국사람 중 톨스토이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파지는 그 두꺼운 책을 정작 끝까지 읽어낸 사람은 얼마 없더라도, 아마 이름 정도는 누구나 알 것이다. 걔 중에는 고전영화 <전쟁과 평화> 속 상큼하기 이를 데 없는 오드리 헵번의 모습을, <안나 카레니나> 속 소피 마르소의 처연하게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릴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마음대로 사랑하고 마음대로 떠나버린 첫사랑 도련님과 정든 밤을 못 잊어...” 운운하는 오래된 유행가 <카추샤의 노래>를 흥얼거릴 사람이 있을지도.

 그런데 이런 작가 톨스토이의 모습에는 인생의 스승, 삶의 지혜를 전해주는 현자(賢者)의 이미지가 어김없이 덧씌여져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진 속의 그는 한결같이 흰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소박한 러시아 농민복을 입은 모습이다. 그 할아버지 톨스토이에게서 우리는 성자나 구도자를 발견한다. 특히 2003년 MBC 교양프로그램 <느낌표>에서 『톨스토이 단편선』이 고전베스트로 뽑힌 이후로 “바보 이반 이야기”,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같은 교훈적 우화가 큰 인기를 끌면서 이런 인상이 더욱 강해졌다.

 성자 톨스토이의 이미지는 무엇보다 평화주의자 톨스토이로부터 비롯한다. ‘악에 대항하지 말라’던 그의 비폭력주의, 바보 이반이 보여주는 바보 같은 사랑, 물질에 대한 집착과 탐욕을 들어내고 진정한 믿음으로 영혼의 곳간을 채우라는 그의 설교가 무한경쟁에 내몰려 그 어느 때보다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위안이 되는 모양이다. 그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그러한 비폭력이, 그러한 사랑이, 그러한 믿음이, 그리하여 마침내 진정한 평화가 어떻게 가능하다고 말했을까. 톨스토이는 이 모든 것이 ‘악에 대한 투쟁’ 속에 가능하다고 했다. 그가 직접 밝힌 바 있듯이, 흔히 알려진 그의 무저항주의는 악에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는 의미에서의 무저항인 것이지, 결코 악에 대한 투쟁을 포기하라는 수동적인 무저항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때의 악은 ‘혁명을 목전에 둔 차르 통치 하 제정 러시아’라는 구체적인 사회 조건 속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악이었다.

 톨스토이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폭력을 제도화하는 국가, 인간에 의한 인간의 노동 착취를 합법화하는 경제 질서, 그리고 그러한 폭력을 신의 법칙으로 정당화하는 기성 종교 등을 만악의 근원으로 여겼다. 이에 따라 그는 차르 정부, 군대, 경찰, 사법기관, 농노제나 자본주의 소유 구조, 그리고 러시아 정교회와 평생에 걸쳐 간단없이 가열차게 싸웠다. 악의 실행자들에 대한 톨스토이의 증오, 그들의 기만과 위선을 폭로하는 그의 언어는 너무나 강렬하고 신랄해서, 이 사람이 과연 ‘화내지 말라’, ‘원수를 내 몸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그 누구보다 충실히 따르고자 했던 그 톨스토이가 맞는지 헷갈릴 정도다.

 또 그는 차르 전제정부를 넘어 모든 국가 권력을 부정했을 뿐 아니라, 애국심과 민족주의를 전쟁이라는 최고의 악을 초래하는 또 다른 악의 근원으로 매섭게 질타했다. 자연히 톨스토이는 보수 극우세력은 물론, 민족주의자나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모두와 불화했을 뿐 아니라, 당대 국제 평화주의자들에게조차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톨스토이, 즉 사랑과 용서, 무소유, 무저항을 설교하는 성자(聖者) 톨스토이의 후광 뒤에는 이렇게 탈국가, 탈민족을 외치던 근대의 이단아, 적그리스도라 불릴 정도로 파격적인 신앙을 설파하며 기성 권력과 맹렬히 싸운 전사(戰士) 톨스토이가 서 있다. 톨스토이의 유토피아는 국가로 대표되는 모든 제도화된 폭력의 거부 위에, 나아가 그러한 구조적 폭력은 물론, 정당방위로서의 개별적 폭력조차 허용하지 않는 견결한 비폭력주의에 기반한다. 이러한 절대적 평화주의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 무엇보다 전투적이고, 따라서 불온한 평화주의로, 안전한 이상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톨스토이 사상의 이 불온함, 과격함, 위험성은 그가 평생 추구했던 ‘평화’를 오히려 생동하게 만든다. 평화는 너무나 당연해 진부해진 단어다. 그러나 인류는 한 번도 평화를 제대로 실행한 적도, 따라서 제대로 누린 적도 없다. 일본의 메이지 사상가 나카에 조민(中江兆民)의 말을 빌리자면, “언사로는 극히 진부해도 실행으로는 신선한” 것, 그것이 평화다. 다시 조민의 말. “자, 그 실행으로는 신선한 것이 이론으로는 진부한 것은 과연 누구의 죄인가.” 평화 잘못도 있고, 우리 잘못도 있다. 톨스토이의 급진성, 그의 과격함, 그의 모순은 평화의 규범성, 상투성을 뒤흔들어 그것을 살아 숨쉬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우리를 자꾸 생각하게, 돌아보게 만든다. 그런 톨스토이를 도덕 타령, 사랑 타령이나 하는 고리타분한 성인군자로만 알고 끝난다면, 그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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