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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산책 ]

'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김재완(방송대 법학과 교수), 신하영옥(여성활동가), 윤영전(평통서문예원장), 이광조(CBS PD), 이문영(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정보배(출판 기획편집자), 정재원(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정지영(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사무국장), 조광제(철학 아카데미 상임위원), 천정환(성균관대 국문학과 교수), 최정학(방송대 법학과 교수), 홍미정(단국대 중동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차례씩 글을 씁니다.

작성자 인권연대
작성일 2016-06-29 (수) 15:39
홈페이지 http://www.hright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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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218.xxx.74
현존철학에 대한 단상 (조광제)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 ‘수요산책’이란 말에 전혀 걸맞지 않은 철학의 근본 문제를 불쑥 끄집어 올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인권연대의 식구들 모두 한 번쯤 들어봄직하다 싶어 제시합니다.

1.철학적 사유에서도 정확한 방법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하고서 평소에 안타까워하는 심정이었다. 물리학과는 달리 철학은, 수학이라고 하는 장구한 역사를 통해 비교적 연속적으로 발전되어 온 바 객관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는 공인된 도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모로 정교한 방향으로 발달해 온 실험 장치들이 있어 직관을 넘어선 뚜렷한 관찰을 반복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곤 했던 것이다.

 철학적 사유를 해 나갈 때 뚜렷한 방법이 있다면, 달리 말해 어떻게든 역사적인 검증 과정을 거친 나머지 상호주관적인 권위를 갖고 있는 그런 방법이 있다면, 그래서 내가 그 방법을 젊을 때부터 숙지해 온 데다 많은 적용을 거쳐 그 성과를 확인한 경험이 누적되어 있다면, 이제 새로운 주제 영역을 선정해서 그 영역을 대상으로 철학적인 방법을 적용하여 기술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이 강력한 권위를 가진 철학적 방법은 더군다나 오늘날 이른바 ‘포스트 시대’에 이르러서는 무망해 보인다.  

 상호주관적인 권위를 가진 철학적 방법이 없다는 것은 철학적 사유를 외롭고 고독하게 만든다. 결국에는 자기 나름의 방법을 안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들뢰즈(Gille Deleuze, 1925~1995)와 가타리(Pierre-Félix Guattari, 1930~1992)는 한통속의 공저인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통해 철학의 작업을 개념을 창조하는 것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지만, 오히려 철학이란 사유의 방법을 창안하는 것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개념미술을 주창하는 일파에서 예술작품 하나가 제작되는 것과 예술론 하나가 창안되는 것이 동시적인 일이라고 한 것처럼, 한 사람의 철학자가 탄생한다는 것은 하나의 특정한 철학적 사유의 방법이 탄생하는 것과 동시적인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철학이 이성적인 분석을 빼놓을 수는 없고,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개념들을 활용하지 않을 수 없다. 기존의 많은 철학자들이 창안하여 활용한 바 있는 개념들이란 그들 각자가 그 당시 놓인 철학사상적인 맥락에서 주어진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조성한 것임에 틀림없다. 물론 그 개념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성했는데도, 오히려 그 개념들 때문에 새로운 문제들이 생겨나기도 했을 것이다.

 예컨대, 대다수 사람들이 태양을 신으로 확신하는 신화의 시대에 제시한 이성 즉 로고스가 오늘날 첨단 과학의 시대에 제시될 법한 이성과 동일한 의미를 지닐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수 천만 명이 죽어나가는 대대적인 전쟁을 겪으면서 제시한 인간 개념이, 수 십억 명의 노동자들의 활동을 이윤으로 바꾸어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자본주의적인 복잡 미묘한 수탈의 네트워크를 염두에 두면서 제시한 인간 개념과 동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신병적인 고착에 의거한 편집증적인 경향을 지님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거의 차단된 삶을 영위하는 인간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욕망과 감정 그리고 판단과 의지 및 행동에 관련된 개념이, 다른 사람들과 대체로 무난하고 원활한 관계를 맺고서 살아가면서 평상심을 유지하는 경향을 지닌 인간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욕망과 감정 그리고 판단과 의지 및 행동에 관련된 개념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철학적 사유를 전개할 때 제 스스로 붙들고 씨름하는 문제의 성격과 한계를 염두에 두고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왕의 전해오는 개념들을 각자 나름으로 비틀어 또다시 갱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작업은 결국 자기 나름의 철학적 사유의 방법에 의거해서 수행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철학적 사유의 고독이 비롯되고, 그 철학적 사유의 고독이 각종 철학적인 표현의 수행조차 외롭고 고독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철학적 대화와 토론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반대로,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철학적 대화와 토론이 불가피하다. 다만, 비록 쉽지는 않겠지만, 거기에서 각자 설정하고 있는 문제의 성격과 한계를 대화자에게 정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기본 역량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2. 철학적 사유를 해 나가는 데 있어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특정한 부분과 보편적인 전체와의 관계다. 특정한 부분에 집착하여 거기에서 발원하는 뭇 중요한 철학적 개념들이 마치 보편적인 전체에 관해서도 크게 분석적인 위력을 발휘한다고 믿는 것도 문제이거니와, 보편적인 전체를 한꺼번에 포괄하여 그 추상적이고 근본적인 얼개를 제시하기만 하면 그것이 특정한 부분들에 곧바로 크게 분석적인 위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 믿는 것도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는 추상으로의 상승의 길과 구체로의 하강의 길을 동시에 오르내리면서 항상 주위를 주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요컨대, 특정한 부분의 영역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그에 따른 기술을 할 경우, 거기에 이미 늘 보편적인 전체에 관련된 잠정적인 요인들이 지평적인 바탕으로서 작동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그와 동시에 보편적인 전체에 대한 추상적인 분석과 그에 따른 기술을 할 경우에는 거기에 이미 늘 특정한 부분의 영역에서 치고 올라오는 구체성의 위력이 어떻게 추상적인 개념들과 그 구조를 채우거나 그것들에서 벗어나는가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보편적인 전체를 그 추상적인 얼개를 드러내어 들여다보고자 할 경우, 아무래도 체계적인 비판을 수행하는 이성이 크게 요구될 것이고, 특정한 부분을 그 구체적인 내용을 드러내어 들여다보고자 할 경우, 아무래도 집중적인 관찰을 수행하는 직관이 크게 요구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성적인 비판과 직관적인 분석의 재빠른 상호 교환적인 수행이야말로 철학적 사유를 하는 데 기초가 된다고 할 것이다. 따지자면, 이는 일종의 철학적 사유의 방법이다.

 설사 이러한 추상과 구체의 오르내림, 부분과 전체의 상호 적용과 검토, 그리고 이성적인 비판과 직관적인 분석의 재빠른 상호 교환 등이 제법 철학적 사유의 일반적인 방법으로 제시된다고 할지라도, 앞서 제시한 바 철학사상적인 맥락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하는 제반 철학적 개념들을 이제 제 나름의 문제 틀에 따라 독창적으로 갱신하여 활용하는 데 따른 어려움은 여전한 것이다. 더욱이 전통적으로 전래되어 오는 개념들을 본인이 어떻게 다르게 비틀어 갱신할 수밖에 없는가를 드러내기 위해, 그렇게 갱신할 때 그 이전의 개념들이 어떤 의미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일일이 밝히면서 비교해야 하는 거친 수고를 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 어려움은 예사로 배가되는 것이다.


에드워드 후설
사진 출처 - 구글

3. 그런데 현상학의 비조(鼻祖)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은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을 건립하고자 하면서 다음과 같은 기묘한 말을 한다. “미리 주어진 어떠한 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전해져 내려오는 어떠한 것도 그 출발점으로 삼지 않으며 아무리 위대한 대가라도 그 명성에 현혹되지 않고.” 이는 나중에 저 유명한, 심지어 ‘있음과 없음’ 그리고 ‘…임과 …아님’에 관련된 일체의 판단을 괄호로 묶어 무력하게 만드는 ‘판단중지’(Epoche)라는 기묘한 철학적 방법을 형성하는 바탕이 된다. 후설의 이 ‘판단중지’는 마치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가 ‘방법적 회의’라는 철학적 방법을 내세워 사유하는 자아를 제외하고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일체의 것들을 철학적 사유를 전개해 나가는 바탕에서 제거해버린 것과 같다. 오히려 그보다 더 심하다. 왜냐하면, 데카르트는 사유하는 자신의 정신을 실체로 여긴데 반해, 후설은 사유하는 자신의 순수한 자아마저 제거해버리는 모험을 감행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철학적 사유를 하는 자신의 존재마저 방법적으로 짐짓 제거해 버린 뒤 후설이 발견한 것은 ‘찰나’였다. 말을 하자니 ‘찰나’라고 하지만, 이 지경에서는 그 어떤 개념은 말할 것도 없고 그 개념을 담아내는 기표에 해당하는 그 어떤 언어적인 기호조차 불가능하다. 종이를 불태우면 검게 타 바스라지면서 무한극소의 연기와 재만 남듯이, 일체의 존재를 불태운 뒤 남는 극미한 흔적뿐이다. 이를 일컬어 후설은 ‘의식의 내실적 영역’(reelle Sphäre des Bewußtseins)이라는 어려운 말을 하고, 또 ‘현상학적인 잔여’(das phänomenelogische  Residuum)라고 달리 일컫기도 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이는 극단적으로 극미한 순간에 그런데도 무한소의 두께를 지니고서 무한한 너비로 펼쳐져 있는 일종의 ‘환(幻)의 풍경’이라 할 것이다.

 후설은 워낙 근본적인 이러한 철학적 방법을 안출하여 동원함으로써 존재가 근본적인 것이 아님을 그 나름 밝혀냈다. 그러니 어찌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암송하는 불교철학자들의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싶다. 그러나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극미한 찰나의 얇디얇은 ‘환의 풍경’ 대신에 굳건하기 이를 데 없는 삼라만상의 이 지독한 안정된 지속성, 비유컨대 원자의 구조를 밝혀내어 양자역학의 선구자로 군림하게 된 닐스 보어(Niels Bohr, 1885~1962)가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은 ‘물질의 안정성’ 내지는 ‘원자의 안정성’을 연상케 하는바, 사물의 옹골찬 지속성이 오히려 무한 두께를 지니고서 광대무변하게 도사리고 있다. 그럼으로써 생각하는 자아가 돌아오고, 생각하는 자아가 터로 삼고 있는 하나의 몸이 돌아오고, 하나의 몸과 뭇 사물들이 펼치는 관계의 대향연이 돌아온다. 이 ‘사물 관계의 대향연’을 바라보는 태도(관점)를 후설은 ‘자연적 태도’라고 했고, 이 ‘사물 관계의 대향연’이 벌어지는 세계가 굳건하게 유지된다고 믿는 것을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그러한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을 에포케 함으로써 앞서 말한 현상학적인 절대 잔여인 극미한 환의 풍경이라고 했던 것이다.

 양극이다. 한쪽 극(極)에는 ‘극미한 환의 찰나적인 풍경’이 도사리고 있고, 다른 한쪽의 극(極)에는 ‘옹골찬 사물들 간에 벌어지는 관계의 대향연’이 도사리고 있다. 두 극 중 어느 한 극이 다른 극에 비해 워낙 근본적이어서 덜 근본적인 극을 더 근본적인 극으로 환원하는 일이 가능할 것인가? 아니면, 두 극 중 어느 극이 더 근본적이라고 할 수 없고 그와 동시에 두 극 모두 근본적이라고 하기에는 워낙 서로 모순적이어서, 알고 보면 아직은 알 수 없는 제3의 어떤 극이 기묘하게 대립된 방향으로 분기되어 나온 탓에 두 극이 성립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릴 것인가? 혹은 아니면, 아직은 알 수 없는 제3의 그 어떤 극이 이 두 극이 극적(劇的)으로 충돌하여 이른바 변증법적인 종합을 이룸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릴 것인가?

 이 같은 물음들이 철학적 사유에 있어서 근원적인 문제를 함축하고 있음을 확신하면서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새로운 출발점이라 여겨지는 ‘제3의 극’을 찾기 위한 분석에 돌입하게 된다.  

 첫째, 가장 넓은 의미에서 본 그러한 의식을 벗어난 자가 원리상 존립할 수는 없다. 따라서 위 양극의 근본 사태는 어떻게든 의식과의 관련을 벗어날 수 없다.

 둘째, 전자의 극인 ‘극미한 환의 찰나적인 풍경’이 의식되는 방식은 최대한으로 의식에 의거한 방식이고, 후자의 극인 ‘옹골찬 사물들 간에 벌어지는 관계의 대향연’이 의식되는 방식은 최대한 의식으로부터 분리된 방식이다. 말하자면, 전자의 경우에는 의식이 한껏 앞으로 나가 있고, 후자의 경우에는 의식이 한껏 뒤로 물러나 있다.

 셋째, 두 경우 모두 워낙 극단적이기에 분명 추상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둘이 순전히 정신적이라거나 또는 물질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정신이나 물질이란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세 가지 정도의 분석에 입각해서 ‘제3의 새로운 극’을 모색하고자 한다. 그 일책은 의식이 너무 한껏 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너무 한껏 뒤로 물러나 있지 않은 지경을 오히려 두 극에 비해 더욱 근본적인 사태로 확인하는 것이다. 그 근본적인 사태는 다름 아니라 ‘지금·여기’이다. 이때 ‘지금’은 열려 있으면서도 일정하게 지속하기에 결코 찰나의 순간도 아니고 무한정한 연속도 아니다. 또한 이때 ‘여기’는 두툼한 질적 부피가 상하좌우로 펼쳐지면서 열려 있으면서도 일정하게 제한되고 있기에 무한정한 텅 빈 공간이 아니다. ‘지금’과 ‘여기’는 혼연(渾然)한 일체를 이루고 있어, 방금처럼 사유를 통해 억지로 구분할 수는 있으나 그 존립에 있어서 따로 분리될 수는 없다. 이러한 ‘지금·여기’를 일컬어 ‘현존’(現存, existence)이라고 한다.

 ‘현존’은 ‘본질’(本質, essence)과 크게 구분되는 것으로 여겨져 왔지만, 오히려 ‘존재’(存在, being)와의 관련에서 보아야 한다.

4. [존재]

 플라톤(Platon, 기원전 427~347)은 존재를 본디 형상(形相, eidos)인 ‘이데아’에 귀속된 것으로 보고,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는 존재를 감각적으로 드러나는 속성(屬性, symbebecota)들의 바탕으로 작동하는 제1실체로서의 ‘기체(基體, hypokeimenon)’에 귀속시켰다. 그리고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라 존재를 일반적으로 실체에 귀속시키면서 궁극적으로는 근원적이며 단순한 실체인 ‘신’에 귀속시켰다.

 근대로 들어서면서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 존재를 ‘사유 자체’에 귀속시켰고, 이를 넘겨받은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존재를 구성된 현상계로서의 자연에 귀속시켰다. 그러면서 이러한 존재를 근원적으로 가능케 하는 근본 역량인 ‘초월론적인 통각’(transzendentale Apperzeption)이라는 근원적인 주체와 ‘사물 자체’(Ding an sich)를 존재 너머의 세계, 이른바 ‘초월론적인 예지계’를 논리적인 요청에 의해 설정하게 되었다. 칸트가 남겨놓은 이러한 분리된 이중의 세계라는 난제를 헤겔(G.W.F. Hegel, 1770~1831)이 등장해 해결하면서 존재를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자신을 전개하면서 결국에는 절대지에로 포섭되어 완결되는바 ‘구체적 보편자인 절대 정신’에 귀속되는 것으로 여겼다.

 이후,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은 ‘존재 전체’(Seinsganz)를 넘어서면서도 포괄하는 ‘절대적인 의식의 흐름’(absoluter Bewußtseinsstrom)을 제시하게 된다. 그러면서 의식을 전혀 실체가 아닌 것으로 여겼다. 아울러 이 의식에서부터 시간이 근원적으로 형성되어 나온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 이러한 후설의 시간의식 이론 내지는 의식시간 이론은 근원적인 심층 자체에서 볼 때 ‘의식이 곧 시간이고 시간이 곧 의식임’을 밝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시간을 근본 형식으로 하지 않는 존재는 성립할 수 없는 것임을 주장한 것이기에, 이미 그의 제자인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존재론을 마련해 놓은 것이라 할 것이다.

 하이데거는 자신 이전의 모든 철학자들이 논구해 온 존재는 실은 존재(das Sein)가 아니라 존재자(das Seiendes)임을 역설했다. 그리고 존재에 대해서는 오로지 존재의 의미를 탐구할 수 있을 뿐임을 강조하면서 그 존재의 의미를 시간으로 보았다. 이는 “존재(Sein)를 시간(Zeit)으로부터 파악해야만 하고, 존재가 [여러모로] 양식화되고 파생될 때 그 다양한 양식들과 파생들이 실로 시간에 견주어 이해되어야 한다면, 그와 더불어 존재 자체(das Sein selbst) - 다만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인 존재자(Seiendes)가 결코 아닌 - 는 그 ‘시간적인’(zeitlichen) 성격에서 명백하게 될 것이다.”라는 1) 하이데거의 말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렇게 발전되어 온 존재에 대한 철학사적인 논변들을 바탕으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얻는가?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후설을 재해석하게 되면, 후설이 말한 ‘존재전체’를 ‘존재자 전체’로 읽게 되고, 후설이 말했다고 할 수 있는 ‘존재 너머의 의식’과 ‘의식≒시간’을 ‘존재자 너머의 존재≒시간’으로 읽게 된다. 이를 우리 나름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존재의 규정을 얻기 위해 후설의 시간론과 하이데거의 역사성에 관한 논변들을 실마리로 삼아 다음 몇 가지 사안들을 추출해 내는 동시에 일종의 귀결을 얻고자 한다.      

 (1) 후설이 극미한 간극으로 일어나는 의식의 ‘파지’와 ‘예지’의 작용에서 시간을 ‘근원적으로 종합’해내는 의식은 근본적으로 축적 작용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2) 후설이 ‘절대적인 의식의 흐름’에서 ‘초월론적인 역사성’(transzendentale Geschichte)을 그 근본 성격으로 해서 발생적인 구체적 자아를 건립할 수 있었던 것은 의식의 축적 작용에 의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 하이데거가 현존재 자체(das Dasein als solches)가 생기(生起, Geschehen)할 때 현존재 자체의 존재구도(Seinsverfassung)로서 ‘역사성’(Geschichtlichkeit)을 제시하고 이를 근거로 해서 ‘세계역사’(Weltgeschichte)가 가능하다고 한 것 2)은 후설이 말한바 의식의 축적작용에 의거한 시간의 구성적인 발생에서 시간이란 그저 맹목적으로 그리고 평면적으로 흘러가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축적에 의거한 것임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4) 지금·여기의 현존은 극단적으로 미분화해서 보면 한 순간의 극미한 ‘길이’의 흐름이지만, 그 미분적인 흐름조차 근본적으로 축적에 의거해서 밀려 응축됨으로써 이미 늘 밀도와 강도를 자아내는 방식으로 존립한다. 하물며 현존의 활동을 통해 이루어지는 주체의 활동과 그 성과는 어떻게든 축적되어 밀려 응축됨으로써 이미 늘 밀도와 강도를 자아내는 방식으로 존립하는 것이다.

 (5) 이를 바탕으로, 우리 나름으로 ‘존재란 현존의 축적에 의거한 시간적인 밀도이다.’라고 말하게 된다. 또한 동시에 ‘존재를 지평적인 바탕으로 해서 지금·여기에서의 현존이 발휘된다.’라고 말하게 된다. 따라서 현존에 입각해서 볼 때, 존재는 ‘축적에 의거한 시간적인 밀도’를 계기로 해서 현존에서의 과거로 작동하고, 또한 ‘지금·여기에서의 현존에 활동에 대한 지평적인 바탕’으로서 현존에서의 미래로 작동한다고 말하게 된다.

1) Sein und Zeit, 18쪽.
2)
 같은 책,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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