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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산책 ]

'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김재완(방송대 법학과 교수), 신하영옥(여성활동가), 윤영전(평통서문예원장), 이광조(CBS PD), 이문영(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정보배(출판 기획편집자), 정재원(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정지영(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사무국장), 조광제(철학 아카데미 상임위원), 천정환(성균관대 국문학과 교수), 최정학(방송대 법학과 교수), 홍미정(단국대 중동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차례씩 글을 씁니다.

작성자 인권연대
작성일 2017-08-09 (수) 17:59
홈페이지 http://www.hright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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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218.xxx.61
빨치산과 아버지 (윤영전)

윤영전/ 평통서문예원장

 내 서재에는 그리운 아버지가 언제나 나를 내려다보신다. 비록 사진으로 보시지만 한 세대 전, 한 많은 세상을 사시다가 그리운 가족을 두고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아버지 영정을 서재에 모시면서 자주 대화를 나누었다. 비록 무언의 대화였지만 부자간 정겨운 대화다.

 “아들아! 오늘도 무사히 살아가고 있느냐?”
 “예, 아버님,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고 있습니다. 너무 염려 마십시오.”
 “염려는 무슨 염려! 내 믿고 사랑하는 아들이 언제나 열심히 살고 있을 터인데...”

 무언의 대화는 계속된다. 아버지가 팔순을 넘겨 사시면서 마지막 응급실에 입원하신 그때에 위급한 순간을 넘기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방금 이 애비는 저승에 갔다 왔었다. 그곳은 엄청난 꿈에도 보지 못한 기기묘묘하고 호화찬란한 곳이었는데 아직은 올 때가 아니라며 나를 돌려보냈다.”
 “아버님도 어찌 저승에 가셨단 말씀이십니까? 잠깐 정신이 혼미하신 순간이셨겠지요!”
 “아니다, 네가 이 애비를 살렸다. 너 아니었으면 애비는 벌써 죽었을 터이다. 고맙다.”
 “자식에게 고맙다니요! 당연히 위급하신 아버님을 성모병원 응급실로 모셨지요”

 아버지가 세상을 하세하시기 3개월 전에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그리운 아버님과 작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을사늑약 해에 태어나 일제하 젊은시절에 나라 잃은 한을 달래시며 살아오셨다. 당시 아버지 10살, 숙모가 17살에 시집오셔 단 3개월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숙모의 양자가 되어 한학과 한글을 공부하셨고 아들딸을 8남매나 두신 다복한 가장이셨다.

 맏아들이 해방공간에서 중학을 졸업하고 군청과 면사무소에 근무해 배급도 타면서 생활은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다. 외로운 청상 양모에 효도하고 결혼해서 자식들 양육에 최선을 다하시고 해방이 되었는데, 미.소에 의해 남북이 38선 분단이 되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처럼 22살 된 맏아들이 하나 된 조국을 위해 지하 건국준비위원회에 가입하였다.

 단란한 가정에서 효도하며 군청과 면에 근무했는데 요주의자가 되었다. 착실해 장차 면장과 군수감이라고 했었다. 건준 요원들이 좌익으로 몰리면서 밤 사람이 되고, 보도연맹에 끝내 가입하지 않고 조국이 하나 된 해방세상의 꿈을 꾸었다.

 1948년 건준과 여순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피해 다녔다. 1949년 1월 하순에 붙잡혀 한 달 이상 모진 고문을 받았다. 조직원을 불라며 이곳저곳 대질신문을 벌이다가 3월 24일 그만 3발의 총탄에 숨을 거두고 그곳에 묻히고 말았다. 22살에 재판도 없이 운명했다. 우리 집의 희망이요 기둥이 무너진 후 을씨년스러운 나날이 계속되었다. 1년이 넘는 세월 후에 한여름 날이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6.25전쟁 중 서울이 점령되고 7월 중순에는 빛고을에 인민군이 들어왔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형이 죽지 않았다면서 아침저녁으로 밥상을 차려 통곡했다. 어린 내가 ‘죽은 형이 어찌 살아온단 말이냐’고 항변도 했으나 철없는 말로 치부되고, 밥상차림은 계속되었다. 그런 여름날 대문을 박차고 들어선 군관동무와 위원장이 들어섰다.

 “이 댁이 윤영철 동지의 집입니까? 우리는 윤 동지가 조국통일에 혁혁한 투쟁을 하다 운명하심에 심심한 위로를 드리며, 저희가 그 일을 완수하기위해 왔습니다.”
 “아니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신데 내 아들을 안다고 합니까?”
 “네, 다 알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아버님이 효지면 당위원장을 맡으시기 바랍니다.”
 “무슨 말씀이요? 나는 일자무식에 농사짓는 농사꾼이요. 똑똑한 사람 시키시오.”
 “위원장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맡으시면 됩니다. 밑에서 다 알아서 합니다.”
 “정말 부탁입니다. 제발 다른 똑똑한 사람을 시키세요.”
 “자꾸 그러시면 반동입니다. 걱정 마시고 맡으시면 됩니다. 위원장님!”

 아버지는 군관동무의 반동이라는 한마디에 그만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즉 아들이 1년 전에 재판도 없이 운명했듯이 어쩌면 당신도 그리될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주변을 살피던 군관장교는 옆에 있던 둘째형(영선)의 나이를 물었다. 19살이라고 하니 “그러면 바로 우리 의용군에 들어와야지! 나와 함께 갑시다.” 그 후 형은 군관부관을 맡았었다.   

 집안은 이미 운명한 맏형뿐이 아니라 위원장이 되신 아버지와 의용군에 간 둘째형의 안위가 걱정이었다. 10살이던 나는 철이 약간은 들었지만 원두막에서 북의 애국가 김일성 장군노래 ‘전우에 시체를 넘고 넘어...’라는 군가도 배우고 있었다. 어느 사이 인공기가 면사무소, 학교에 게양되고 집에는 인민군들이 오다가다 쉬어가고, 밥을 해내는 부역을 감수해야 했다.

 인민위원장이 된 아버지에게 면민들이 수 없는 탄원 청원서를 제출하고 있었다. 평소에 감정상했던 이웃 일가 등, 세상이 바뀌었으니 처벌을 해 달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논에 물을 밤에 몰래 빼갔다 고발했다. 케케묵은 오랜 감정을 토로하는 것이었다. 허나 아버지는 이런 세상이 오래갈 것 갖지도 않은데, 서로 원수가 되면 안 된다고 설득해 해결했다.

 9.28 인천상륙작전 이후 중앙청에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그 후 9월 말에는 인민군이 후퇴했다. 초등학교 교실마다 쌀과 광목,  솜털, 설탕 등이 교실마다 빼꼭히 쌓여있었는데 면민들이 창문을 부수고 훔쳐가고 있었다. 아버지와 면 간부는 주민들의 행동을 말리고 있었다.

 “면민들이여! 이것은 모두 나라의 것이니 함부로 가져가면 안 됩니다. 자제해 주세요?”
 “뭐라고? 당신은 보아하니 인민위원장인데, 군인과 경찰이 오고 있는데, 당신은 총살이요. 여기서 이러지 말고 빨리 피하시오.”

 어린 나는 방금 그 면민의 충고의 말이 옳다고 아버지에게 다가가서 말씀드렸다.

 “방금 저분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아버지! 빨리 피하세요. 어서요.”

 아버지는 순간 바람과 같이 사라지셨다. 그러나 교실에 있는 군량 물품은 지게와 심지에는 수레를 동원해서 가져가, 난리 통이었다. 이제 그 누구도 막는 사람이 없으니 힘이 센 사람이 장땡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할머니와 어머니께 아버지가 피신을 진외가로 가셨다고 안심을 시켜드렸지만, 정작 나는 아버지뿐만 아니라 의용군에 간 둘째형 걱정뿐이었다. 무사해야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9월 말에 경찰과 국군이 효지면에 복귀했다. 그동안 마구잡이 난리를 치며 가져갔던 쌀 설탕 등 물건들을 반납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순수하게 남북을 그저 같은 의미, 공권력으로 생각했다. 아버지는 안전한 광산군 서창면의 진외가가 아니라, 오히려 무등산을 택하였다. 지산면을 지나 무등산 입구를 한참 가다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내가 지금 일시 피난을 무등산에 가고 있지만 과연 안전한 곳일까? 어쩌면 무등산은 군경의 토벌 대상이 되어 영원히 산을 내려오지 못하고 빨치산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차려 열 식구를 생각했다. 17살에 시집와 남편과 단 3개월 만에 사별, 청상과부로 살아오신 양모님, 손자손녀를 손수 받으시며 살아오신 불쌍한 모친을 생각했다. 또한 결혼하여 양시부모를 모시며 8남매를 낳아 친정과 시가에서 칭찬을 받은 아내를 생각했다. 비록 맏아들을 잃었으나 남은7남매 자식들의 장례를 생각하면서 하산하기로 중대 결정을 내렸다.

 허나 무등산에서 광주를 거쳐 진외가 광산까지 과연 갈 수 있을까? 지혜를 짜보기로 했다. 우선 군경합동 무등산 토벌대의 검문검색을 피해야 했다. ‘인민위원장’이 아닌 순수 민간인 약초 캐는 사람으로 행세했다. 산자락에 허름한 초가집에서 약초 캐는 꼴망태와 호미를 잠시 둘러메었다. 한참을 내려오니 군경합동수색대를 만났다. 허나 담대하게 행동했다.

 “누구냐? 손들어! 산에 좌익 빨치산과 내통한 자가 아닌가?”
 “아닙니다. 보시다 시피 저희 노환의 어머니 병에 쓸 약초를 캐러갔다 옵니다.”
 “이름이 뭐야?”  “네, 저는 광주에 사는 박석천이라고 합니다.”
 “보아하니 효자네. 이곳에 잘 못 왔다 갔다 하다 걸리면 죽을 수도 있소”
 “저 대장님, 대단히 죄송하지만 증명 하나 써 주시오. 앞으로 또 검문이 있으면...”
 “거 참 귀찮게 하네. 효자니 써 주리다. 지구토벌대장 000 싸인 했소”
 “대장님 고맙습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기지는 대단했다. 당시에는 주민증이니 도민증도 없을 때였다. 시내로 나오는 동안 3번이나 검문을 받았지만 그 증명서로 통과해 무사히 시내를 거쳐 광산군 서창면 만호리 진외가에 도착하였다. 그곳에 양자로 가서 서당을 다녔기에 외지인이라 여겨지지 않았다. 허나 걱정은 계속이었다. 과연 집안은 무고 할까? 특히 둘째 아들 영선이 북으로 넘어갔는지?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틀 후에 둘째 아들이 바람처럼 진외가에 나타났다.

 “아니 아들 영선아! 무사히 살아 만날 수가 있구나. 그간 고생이 많았지?”
 “아버지 절 받으세요! 진외할아버지 할머니도 진외삼촌도 절 받으세요.”
 “아니 의용군에 함께 했던 홍 군관은 어찌 되었나. 북으로 넘어갔나.”
 “사실 저와 함께 북으로 가다 군관이 그랬어요. 분단조국에 형을 나라에 바쳤으니 부관은 형 대신해 할머니 부모님 동생들을 잘 보살펴야 하니 귀향해 효도하라며 명령을 했지요.”
 “참으로 좋은 군관이다. 어찌 그런 상관을 만났단 말이냐! 고마운 동포다”

 전쟁은 계속되어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 평양에 입성했다. 이 대통령은 북진통일 완수라도 한 듯 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를 해야 했다. 약 3개월 동안 인민군 수중에서 부역한 많은 인사들이 자수를 했다. 많은 부역자들이 자수했지만 붙잡히면 처형을 당했다. 둘째형은 군관동무의 배려로 남으로 내려와 자수를 했다. 허나 부역자 수배에 둘째형은 국군에 자원입대하였다. 하나의 조국에서 국군과 인민의용군으로 복무를 한 형이었다. 중부전선에서 중상을 입고 울산병원으로 후송되어 6개월 치료에 전방에 투입되지 않고 상이제대를 하게 되었다.

 아버지도 자수를 하고 난 후였는데 위원장직에서 있을 때 월권했다는 모략으로 온갖 고문을 받으며 감옥생활을 하다 무고죄로 풀려나서 시조로 여일하시다 82세로 운명하시었다. 둘째형은 의용군과 국군에서 제대 후 통일조국을 꿈꾸었다. 정당생활 50년을 고하고 지난 7월에 86세로 운명해 국립묘지에 잠들고 있다.

 필자 또한 국군에 입대 후 제대 말년에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전쟁과 평화를 직접 체험하였다. 오직 분단조국의 소망인 평화통일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 희수를 맞이한 필자는 72년이란 너무도 긴 분단국에서 과연 한반도 통일은 요원한가? 자문하고 우리의 소원인 평화와 통일을 위해 남은 생을 살려고 한다.

 반백년 조국분단으로 얼룩진 이념과 사상에도 금강산에 5회, 개성공단에 3회 다녀오면서 ‘조국이 통일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꿈을 꾸는 필자다. 부친의 “빨치산을 접은 결단”으로 우리 가족은 그나마 살아왔다. 지구촌 유일한 72년 분단조국에 평화통일 운동을 계속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지구촌에 평화, 아니 시급한 한반도에 평화통일이 오는 그날이 오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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