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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자국 통신 ]

'발자국통신'은 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권보드래(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김녕(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김대원(성공회 서울교구 신부), 김영미(금천문화예술정보학교 교사), 김창남(성공회대 신방과 교수), 김희수(변호사), 도재형(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서상덕(가톨릭신문사 기자), 오인영(고려대 역사연구소 연구교수), 이재상(CBS PD), 이재성(한겨레신문 기자), 이재승(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지상(가수 겸 작곡가), 이찬수(서울대 연구교수), 장경욱(변호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 허홍렬(치과의사), 홍승권(삼인출판사 부사장), 황미선(면일초등학교 교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차례씩 글을 씁니다.

작성자 인권연대
작성일 2017-08-23 (수) 17:42
홈페이지 http://www.hrights.or.kr
ㆍ추천: 0  ㆍ조회: 1278      
IP: 218.xxx.61
‘각을 뜨자’는 저들 (권보드래)
권보드래/ 인권연대 운영위원

권보드래/ 인권연대 운영위원

 ‘각을 뜨자’는 북한의 구호는 참 무시무시했다. ‘미제의 각을 뜨자’는 둥 ‘○○○의 각을 뜨자’는 둥의 말을 들으면 진저리가 처졌다. 초등학교 도덕 시간쯤에 주워들었을 법한 표어다. 능지처참식, 회칼 들고 상대방의 살을 뭉텅뭉텅 저며내는 장면이 떠오르면서 절로 공포가 솟아나곤 했다. 생생한 신체적 상상을 자아내던 그 표어 때문에 악몽을 꾸기도 했었나 보다. ‘이승복 어린이’마저 학살했다는 그들이 아닌가.

 몇 해 전 알게 된 사실로는 ‘각을 뜨자’는 무시무시한 말의 속내는 꽤 다르다. 북한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에 자료를 좀 뒤적여 보니 단박 눈에 띄는 말이었는데, 다만 이번엔 겁에 질린 북한의 모습이 먼저 보였다. ‘각을 뜨자’는 건 터무니없이 강한 상대 앞에서의 생존 노력에 가깝다. 기억나는 대로 대강 소개하자면 “미국은 너무나 강하다. 정면으로 상대해선 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약한 존재라 해도 사생결단의 자세로 덤비면 살점 한 뭉텅이는 베어낼 수 있을 것이다. 여럿이 힘을 합쳐 그렇게 ‘각을 뜨면’ 제아무리 강대국이라 해도 언젠가는 쓰러질 것이다.” 이런 메시지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각을 뜨자’는 말은 스스로 너무나 미약하다고 느끼는 존재의 단말마였다고나 할까.

 당연한 일이겠지만 남북한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앎은 기우뚱하다. 상대방을 적으로 삼아 체제를 유지해 왔던 오랜 내력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너무 모른다. 박정희 시절의 팽팽한 경쟁 국면을 지나, 이제 어느 모로 보나 남한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데도 북한은 아직 미지와 공포의 대상이다. 요즘처럼 긴장의 수위가 높을 때, 답답한 마음에 북한 관련 사이트라도 찾아볼까 해도 접근은 번번이 차단된다. 북한 TV 정도는 이제 터 놔도 될 텐데, ‘남북의 창’ 같은 프로그램에서 인색하게 보여주는 것이 고작이다. 그래도 예전엔 삼엄했던 국토통일원 북한자료실이 통일부 북한자료센터로 한결 여유로워져서 북한의 TV 프로그램 편성표라도 엿볼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할까.

 오늘자 조선중앙 TV를 보니 ‘조국해방전쟁 승리기념관’ 참관 프로그램에 ‘강경에는 초강경으로’라는 표어가 눈에 띈다. 강경에는 초강경으로… 두루 알다시피 북한의 일관된 외교 노선이다. 북한의 주장대로라면 “한 평방킬로미터에 평균 18개의 폭탄을” 맞았다는 한국전쟁 당시의 기억 때문인가, 공포와 그 반작용으로서의 초강경은 북한의 국가론적 기초인 듯 보인다. 자기들이 일으킨 전쟁이라고 해도 그 과정에서 겪은 공포는 공포대로 남아 있을 터이다. 원자탄으로 영토가 다 초토화되리라는 소문도 널리 퍼졌었다고 하는 만큼.


사진 출처 - SBS

 남녘 백성으로선 ‘각을 뜨자’는 말이 여전히 섬뜩하다. 속내를 알았다고 해도 ‘각을 뜨자’는 말이 주는 원초적 이물감이 다 사라지진 않는다. 어쨌거나 죽기살기로 덤비겠다는 위협적 언사가 아닌가. 더군다나 요즘은 핵무기를 수천 킬로미터 너머로 쏘아 올릴 능력까지 과시하고 있는 형편임에야. 북한이 미국에 ‘크고 작은 선물보따리’를 보내겠다고 하고, 미국의 대통령이란 자가 ‘필요하다면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할 때마다, 아직도 분노와 혐오에 앞서 공포가 밀려오곤 한다. 벌써 여러 해째, 두 명의 ‘대북 강경’ 대통령을 겪은 이후의 풍경이다.

 근 10년 대치를 거듭하는 속에서 북한도 많이 바뀌었나 보다. 북한 핵무장이 완성 단계에 이르고 있다는 주장을 들을 때나, 남한은 아예 제치고 미국과 직접 상대하려는 태도가 한결 완연해졌다는 분석을 접할 때면 더 그렇게 느껴진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전해 듣는 북한은 미지의 존재, ‘각을 뜨자’는 살벌한 말로 덜컥 겁부터 나게 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조금쯤 더 알면 안 되나. 저쪽에선 우리를 보여줄 수 없더라도 우리라도 저쪽을 좀 더 전면적으로. 웹사이트는 어렵더라도 북한 TV라도 흔하게 볼 수 없을까. 남한에서 합법적으로 출판된 북한 책이라곤 지금까지 딱 한 종, 홍석중의 『황진이』뿐이라니 아직 멀고 먼 일일까.

권보드래 위원은 현재 고려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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