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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자국 통신 ]

'발자국통신'은 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권보드래(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김녕(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김대원(성공회 서울교구 신부), 김영미(금천문화예술정보학교 교사), 김창남(성공회대 신방과 교수), 김희수(변호사), 도재형(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서상덕(가톨릭신문사 기자), 오인영(고려대 역사연구소 연구교수), 이재상(CBS PD), 이재성(한겨레신문 기자), 이재승(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지상(가수 겸 작곡가), 이찬수(서울대 연구교수), 장경욱(변호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 허홍렬(치과의사), 홍승권(삼인출판사 부사장), 황미선(면일초등학교 교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차례씩 글을 씁니다.

작성자 인권연대
작성일 2017-05-24 (수) 16:25
홈페이지 http://www.hrights.or.kr
ㆍ추천: 0  ㆍ조회: 468      
IP: 218.xxx.74
이 지친 아이들에게 (권보드래)
권보드래/ 인권연대 운영위원

권보드래/ 인권연대 운영위원

 곧 쉰인 나는 배우고 싶은 것투성인데, 10대 복판의 아들 녀석들은 하고 싶은 일이라곤 없단다. 스케이팅도 발레도 재즈댄스도, 피아노와 바이올린도, 목탄화와 캘리그라피도, 세상엔 재밌어 뵈는 일이 너무나 많은데 말이다. 박정희 시대의 교육지상주의를 통과한 까닭인지, 나는 틈날 때마다 엿보고 기회 닿을 때마다 두리번거린다. 라틴어도 더듬거리고 스페인어도 배우고 아랍 문자와 씨름도 해 본다. 코딩 프로그램을 이수하는가 하면 리본 공예 강좌마저 듣고 언젠가 미용학원에 다닐 계획도 세운다. 가히 교육 시장의 모범적 소비자다.

 배워서 남는 것? 사실 별로 없다. 호기심에 약한 만큼 싫증내는 것도 빨라서, 보통은 3개월이고 길어야 1‧2년이다. 친애하는 미셸 오바마 말마따나 ‘싫증날 때야말로 계속해야 할 때’라면 딱 낙제생이랄까. 해본 적 있다는 막연한 만족감만 남을 뿐, 단어는 휘발되고 기예는 망각되고 감각은 제자리다. 그런데도 세상 거의 모든 걸 해 보고 싶다. 수영과 에어로빅에서 시작해 섭렵해 본 운동만도 열 종목을 거뜬히 넘을 정도니 알조다. 반면 자식들은? 다 싫단다. 운동이나 외국어는 물론이고 컴퓨터도 춤도 노래도 배우기 싫단다.

 기가 막혀서. 누가 들으면 학원깨나 다닌 줄 알겠다! 그나마 교과 학원 보낸 적은 드물다는 자신감을 갖고 빽 소리를 질러 보지만, 생각해 보면 애들이 섭렵한 종목도 적지 않다. 기껏해야 서너 번으로 끝낸 일이 많긴 하지만, 한문도 라틴어도 일본어도, 피아노는 물론 바이올린과 플루트와 드럼, 수영과 태권도에 탁구며, 게다가 목공과 코딩까지, 따져 보니 극성이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보통은 내가 가르치거나 나 배울 때 함께 배운 건데, 툴툴거려 보지만, 어쨌거나 아이들이 배우겠다고 먼저 나선 적은 없다시피 하다.


사진 출처 - 이미지투데이

 궁금하기 전에 배움을 강요당한다는 건 얼마나 피곤할까. 어렸을 적 피아노 배우던 기억이 떠오른다. 1970~80년대에 유년기를 보낸 중산층의 딸로서 피아노를 면할 수 있었던 사람은 별로 없었으리라. 우리 엄마들, 피아노를 동경했지만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던 그들은, 숨 돌릴 만 하게 되자 생활비를 쪼개 딸들을 음악 학원에 보냈다. 엄마 때는 하고 싶어도 못 했던 거다, 요즘도 못 하는 사람이 훨씬 많단다― 나만 은혜 받았다는 죄책감마저 부둥켜안고, 직사각형 피아노 가방을 흔들며 다니던 음악 학원은, 그러나 날마다 새삼스레 지긋지긋했다.

 10년쯤 피아노를 배웠지만 지금 남은 건 한두 소절이 전부다. 음악에 대한 이해가 증진되기는커녕 음악 일반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되는 부작용만 남았다. 쉰이 다 돼서야 겨우, 피아노나 음악이 다시 조금 당긴다. ‘피아노 치는 딸’이란 환상에 거금을 투자한 부모님께는 크게 섭섭할 사연이다. 동기야 나쁠 리 없는데― 인생을 즐기는 데 예술과 스포츠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니? 공부 잘 하고 성공하라는 게 아니다, 평범하게 살더라도 자부심을 갖고 인생을 즐기라는 거야― 아마 내 아들들도 내가 내미는 ‘배움에의 권유’가 어지간히 지겨울 게다.

 주말마다 엄마랑 DVD나 한 편씩 볼까? 좀 더 소프트한 권유에도 단호히 노!를 날린 후 아이가 몰두하는 건 그저 게임이다. 내가 모르고 또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장르라 그런지, 그 미지의 세계에 들어가서야 아들은 비로소 행복해 뵌다. 소리 내 웃고 탄성을 올리고 만족스러워 한다. 게임만은 열 시간을 거푸 하고도 지치지 않는다. 아니, 그럼 게임 종류나 좀 바꿔 보든지. 멋지고 심오한 게임도 많더구만 넌 어째 줄곧 슈팅 게임이냐. 단순무식하게 쏘아대고 팀원들이랑 거친 말이나 주고받는 게 그리 좋으냐?

 왜 이리 조급할까. 성공에의 강박 아니면 문화적 풍요에의 강박에 들린 듯. 다수의 삶, 평범한 삶은 어떻게든 거부해 보겠다는 듯. 자라는 아이들에게는 시간이 필요하고, 더구나 수명도 나날이 길어진다는데 말이다. 귀족제적 위계가 발달했던 역사에, 엘리트라야 삶이 그럴 듯 했던 최근 수십 년의 굴곡이 더해져, 대한민국의 교육은 계속 널뛴다. 다들 터질 듯 불만이 팽창했는데도 좀처럼 그 널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에. 오늘도, 나는 더 기다리는 대신 “그럼 이걸 배워 볼래?”라는 카드를 내밀고야 만다.

 달라질 수 있을까? 지난 1주일여, 오랜만에 뉴스를 연속 시청하면서, 1987년 이후 지난 30년간이 아주 허송세월은 아니었구나 싶어 반가웠다. 어딘가에서 힘이 자라고 있었구나, 자산과 능력 자체는 많이 불어났구나, 어쩌면 조금만 배치를 바꿔도 많이 달라질 수 있겠구나. 궁금해지기 전에 배움을 강요당해 온 우리 아이들도, 조금 다르게 살 수 있으려나? 각자 하고 싶은 몫을 기다려 줄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될 수 있으려나? 그러려면 나부터 조금은 바뀌어야 할 텐데.

권보드래 위원은 현재 고려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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