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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창익의 인권이야기 ]

 

작성자 오창익
작성일 2016-05-26 (목) 22:16
ㆍ추천: 0  ㆍ조회: 311      
IP: 121.xxx.51
'반헌법 행위자'(경향신문, 2015. 8. 18)
반성 없는 아베 정권이 딱하다. 스스로 발목 잡는 짓을 하는 까닭을 모르겠다. 독일이 일본에 비해 과거청산에 적극적인 건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전후 20여년 동안 독일에서는 이렇다 할 과거청산이 없었다. 오히려 일본만도 못했다. 독일과 일본의 차이는 유럽의 68혁명에서 비롯되었다. 유럽 전역에서 진행된 새로운 사태가 독일을 변화시킨 거다. 독일은 고립에서 벗어나야 했다. 때맞춰 사민당도 집권에 성공한다. 1969년 빌리 브란트가 총리가 된 것이다. 동아시아엔 이에 견줄 만한 사태가 없었다. 동아시아가 함께 도약할 만한 민중의 승리는 없었다. 일본 자민당은 여전히 공고하고, 일본 야당의 집권 가능성은 별로 없다. 과거에 대해 짐짓 모르쇠로 일관했던 독일의 변화는 제대로 된 역사는 안팎의 노력만큼 성취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일본이 침략전쟁에 대해 그러는 것처럼, 명백한 과거를 두고도 평가가 상반되는 경우가 있다. 여러 공직자들은 쿠데타를 두고도 머뭇거린다. 아마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심기를 살피기 위해서일 거다. 5·16 군사쿠데타에 대한 역사적·법률적 판단도 못하는 사람들이 공직을 맡겠다니 답답할 뿐이다.

이건 단순히 도덕적 불감증이나, 도덕적 기준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넘어갈 문제는 아니다. 국가에는 엄연히 공통의 기준이 있다. 바로 헌법이다. 헌법은 시민과 국가의 관계, 국가의 운영 원리, 곧 국가의 기준을 정해둔 최고위 규범이다. 헌법이 있는 한, 최소한 5·16과 12·12 등 두 차례의 헌정질서 파괴 행위는 용납할 수 없는 범죄행위일 뿐이다.

직접 쿠데타에 가담하거나 국민을 탄압했던 가해자도 아닌 사람들이 이 지경이니, 가해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누구 하나 반성하지 않고 있다. 진심이 담겼을지 모를, 다만 말뿐이라도 과거에 대해 고백하고 반성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냉전시대 영국 국방장관 존 프러퓨모.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영웅이었다. 그렇지만 소련 국가안보위원회(KGB) 소속 장교의 애인과 맺은 부적절한 관계가 알려져 장관직에서 물러나고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었다. 20세기 가장 유명한 성추문의 하나였다. 사건 직후 프러퓨모는 런던의 복지기관 토인비 홀을 찾아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1963년부터 40년 동안, 그는 묵묵히 자원봉사만 했다. 그저 자신의 몸을 움직여 부지런히 봉사활동에만 매달렸다. 뼈저린 반성, 철저한 속죄의 삶이었다. 당장 프러퓨모보다 더한 이 땅의 악당들을 떠올릴 수 있지만, 개중에 진정 어린 속죄를 한 사람은 없었다.

프러퓨모 식의 개인적 결단은 쉬운 일이 아니다. 원래 좋은 사람이었거나, 가족이나 좋은 친구의 도움을 받은 경우가 아니라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20여년 전 성공한 쿠데타의 주범들을 단죄하던 것과 같은 국가 차원의 노력이나, 프러퓨모 식의 개인적 결단 모두 찾아볼 수 없는 오늘의 상황은 반성 없는 아베 정권의 일본과 꼭 닮아 있다. 그래도 40~50대 지식인들이 ‘반헌법 행위자 열전’을 펴내겠다고 나서니 위안이 된다. 이 사업을 주도하는 한홍구 교수는 반헌법 행위자들을 현실의 법정에는 세우지 못했지만, 적어도 역사의 법정에는 세워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렇다. 국가도 당사자도 꿈쩍하지 않을 때, 우리 시민들이라도 나서 제대로 기록하고, 기억해야 한다. 헌법의 원칙을 확인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에는 공소시효도 없다.

기억은 모든 생각의 뿌리이며, 때론 무기가 된다. 유엔조차 가장 실효성 있는 무기로 ‘거명하고 창피 주기(Naming & Shaming)’를 꼽고 있다. 반헌법 행위자들을 찾아내고, 그들의 이름 석 자를 분명히 기록하고 기억하자. 그게 ‘헬 조선’으로 전락한 이 나라에서 그나마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는 길이다. 민주공화국의 토대를 굳건히 다지며 나라를 살리는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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