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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인권 충돌과 경찰권 행사의 한계(이윤)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1-02-03 16:19
조회
956

이윤/ 경찰관


 몇 년 전 서울의 한 지구대에서 근무할 때였다. 경찰서 여성청소년과에서 우리 지구대에 주의를 주었다는 말을 들었다. 어떤 집에서 거의 매일 가정폭력을 이유로 112신고를 하는데, 출동한 직원들이 현장 조치로 사안을 종결할 뿐이고 신고는 계속 반복되고 있으니 일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받고, 지구대 및 경찰서 전체 성과평가 점수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낮은 성과평가는 다음 해 급여액 감소를 의미하여 직원들 모두가 신경 쓰는 일인데 왜 신고처리를 부실하게 하였을까? 더욱 걱정되는 것은 가정폭력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나중에 누군가 죽거나 크게 다치는 위험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팀장들과 직원들은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112 신고자는 아들과 함께 사는 여성인데, 20대 중반인 아들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집안 물건을 부수거나 엄마를 폭행한다는 것이다. 약을 먹으면 괜찮은데, 엄마가 매일 일을 하러 나가야 해서 챙겨주지 않으면 잊어버리고 약을 먹지 않는 경우가 많고, 특히 아침 출근 시간에 아들이 행패를 부리면 출근할 수가 없어서 112신고를 하여 경찰관들이 아들을 붙잡고 진정시키면 자신은 출근한다고 하였다. 이 분의 목적은 아들을 진정시키고 자신이 출근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들에 대한 처벌이나 격리, 접근금지 등 다른 가정폭력 관련법상 조치를 원하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성과평가에도 좋지 않고, 직원들도 매일 돌아가며 시달리고 있지만(그 아들이 힘이 엄청 세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가서 도와주고 있고, 과거에 몇 가지 조치를 취해 봤지만 엄마 스스로 아들을 돌보고 싶어 하여 결국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고 하였다.


 고민스러웠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성과평가나 직원들 힘든 것도 문제지만 지금까지 하던 대로 계속 아들을 저지하고 진정시키기만 해도 괜찮은 걸까? 상태가 갑자기 나빠져서 칼 같은 흉기를 휘두르거나 집에 불을 지른다거나 하여 자신의 엄마나 주변 사람들의 생명과 신체, 재산에 위해를 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위험이 장래에 예상된다는 이유만으로 아들을 엄마 의사에 반하여 떼어놓는다거나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는(가능성 여부를 떠나) 것이 옳은 일인가? 혹시 그 엄마는 아들을 입원시킬 경제적 여유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럼 먼저 이 엄마와 상담하여 진정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다음은 아들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한 후 위험성 평가를 거쳐 조치결정을 하는 것이 맞는 순서일까? 등등 많은 생각을 했다. 자치단체 복지담당 직원을 찾아 그 가정에 대한 일종의 솔루션을 추진하는 방안도 생각했다. 이런저런 생각과 고민만 하던 와중에 갑작스러운 인사발령으로(1월 말에 갔는데 3월 초 인사는 정말 예외적이다) 그 지구대를 떠났다.


 양천 아동학대 사건이 집중적으로 조명되었을 때 문득 지구대에서의 그 일이 떠올랐다. 만일 그 아들에 의해 엄마나 주변 이웃들에게 끔찍한 일이 발생했다면 무고한 희생이 따랐을 것이고, 신고와 출동이 반복되었음에도 아무런 조치가 없었던 부분에 대해서는 엄청난 비난과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당시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그와 함께 위험 발생 예방과 피해 우려인의 의사, 당사자 조치방법 사이에서 갈등해야 하는 현장 경찰관들의 고충도 느꼈다.


 경찰을 필요로 하는 대부분의 사안에서 관련된 권리는 서로 충돌한다. 때로 그 권리들은 생명권, 주거권, 행복추구권 등 기본적 인권에 해당한다. 인권 충돌 상황에서 경찰관은 어떤 판단과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스럽다. 그나마 고민할 시간이 있다는 것은 사치다. 흥분되고, 소란하고, 혼란스러운 현장에서는 부족한 정보를 가지고 빠른 판단하에 즉각적인 행동이 요구된다. 어떻게 하지? 이럴 때 어떻게 하라고 했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지? 이거 해도 위법한 것은 아닌가?


 이럴 때 즉각적인 판단에 적용하라고 만든 기준이 비례의 원칙이긴 한데, 도대체 충돌하는 인권 중 무엇이 중한지 모를 일이다. 사람과 직업에 귀천이 없듯이 인권에도 가벼운 인권과 무거운 인권이 따로 있지 않은데 뭘 비교하란 말인가. 이럴 때 과거 경찰 선배분들은 ‘주변 상황을 면밀히 고려해서, 현명하게 판단하여, 슬기롭게 대처’하라고 했는데 비례의 원칙은 이보다 거의 한 발자국 정도 나은 기준일 뿐이다. 즉각적이고 적절한 행동을 하려면 요건과 조치 행동, 효과가 구체적이고 명확한 법규와 매뉴얼이 필요하다. 그리고 실무자가 법규와 매뉴얼을 따랐다면 그 결과에 대해서는 형사·민사·행정상 책임을 묻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일관되고 신속하며 당당한 경찰활동이 가능해지고, 가래로 막을 위해를 호미로 막을 수 있다. 그래서 입법의 역할이 중요하다.


 또한, 많은 분이 경찰권을 굉장히 대단하다고 여겨 경찰이면 강제로 뭐든 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계시는데, 시간 되시는 분들은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경찰관직무집행법을 한 번 읽어 보시라. 경찰관들은 질문하거나, 보호하거나, 경고하거나, 피난시키거나, 제지하거나, 통행을 제한 또는 금지하거나, 출입하거나, 조회할 수 있는 정도의 권한을 가질 뿐이고, 이 모든 것에 강제력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있더라도 상당히 미약하거나 간접적인(공무집행방해죄를 매개로 한) 강제력에 불과하다. 체포, 구속, 압수와 같은 엄청난 강제력은 전체 경찰업무의 1/4에 지나지 않는 범죄 수사에 필요한 형사법적 강제조치일 뿐, 사전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강제력은 아니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누군가의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해 누군가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 불가피한 경우가 있다. 아이러니하지만 경찰에게 기본권을 보호하게 하려면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도 허용해야 한다. 기본권 침해는 헌법에 의해 유보된 법률에 근거해야 한다. 그것이 ‘법치주의’이고 이 역시 입법의 영역이다. 비극적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형벌을 높이는 방식의 입법 조치와 책임질 사람을 찾아 처벌하고 징계하는 것보다는, 사회가 보호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그 가치를 위해 허용할 것과 포기할 것은 무엇인지, 절차적 정당성과 실효성을 확보하는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한 민주적 논의와 합의를 활발하게 하여 다음에는 동일한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