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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롱과 진보(신하영옥)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12-09 11:38
조회
1075

신하영옥/ 여성운동연구활동가네트워크 '젠더고물상'


 지난 5월, 충북청주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하 충북청주경실련)에서 발생한 성희롱 사건이, 지역의 시민사회연대와 여성연대 단체들이 성명서를 내면서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조직위원회 단합회 자리였다.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수위 높은 발언들이 이어졌고 친목을 빌미로 허그를 강제로 실행하였던 것이다. 피해자들이 2차 허그를 거부하고 악수를 하겠다고 하고 나서야 그러한 행동들이 마무리되었다. 그 자리에 있던 활동가 2명은 심한 불쾌감을 느꼈고, 이러한 행위가 성희롱에 해당함을 임원들에게 알리며 조치를 취해 달라고 요청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들의 사건처리 과정은 피해자들의 관점에서 이뤄지지 않았다. 임원들이 돌려준 말은 ‘법대로 하라’와 고성이었다. 그들은 성희롱을 젊은 세대와 나이 많은 세대 간의 차이로 몰아갔으며, 수많은 2차 피해를 양산하는 방식을 전개했다. 가해자를 두둔하는 SNS 계정을 만들어 피해자들의 사진을 유포하고 조롱거리로 삼기도 하고, 피해사실을 비밀로 할 것을 요구했음에도 피해자들의 공식 입장이 있기도 전에 벌써 언론에서 십여 차례 기사가 나갔다. 뿐만 아니라, 그 기사도 대체로 정확하지 않은 내용이었고 가해자의 관점에서 쓰여졌다는 점은, 사회정의와 민주주의, 진보를 위해 활동하는 시민사회단체에게 여성이란 무엇인가? 라는 고민과 분노를 불러오게 만든다.


 성희롱이 성립하는 데 있어 가해자의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피해자가 불쾌함과 혐오감을 느꼈고, 그것이 그러한 상황에 놓여진 다른 사람도 느낄만한 불쾌한 감정이라면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2018년과 2019년에 대법원과 고등법원은 판결하였다. 이를 “합리적 피해자의 관점”이라고 한다. 피해자의 관점에서 사건을 처리하고, 누구보다 먼저 피해자들에게 그 결과를 알려야 한다. 가장 먼저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격리하고, 피해자가 안전한 상황에서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배려하며, 모든 처리과정을 공개하고, 범죄 유무를 통지해야 한다. 그것이 성희롱 처리과정의 공식적 절차이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구성된 중앙경실련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는 피해자들에게 진상조사결과를 알리지 않았다. 되려 가해자가 진상조사결과에 이의신청하기에 이르렀다. 비대위는 비대위활동결과를 발표하면서 성희롱이 발생했다는 것을 인정하긴 했지만 이를 계기로 충북청주경실련을 ‘사고지부’로 결정하면서 피해자들을 업무정지시키고, 모든 활동을 중단하게 하였다. 피해자들을 일상에 복귀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직으로 유도한 것이다. 성희롱 피해자에게 부당한 노동행위를 한 것이며 위법행위이다.


 경제정의는 정치적 정의가 선행될 때 가능하다. 정치적 정의란 의사결정과정에 모두가 참여할 권리를 갖는 것이고, 이때 가장 낮은, 그리고 작은 권력을 가진 집단에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사결정과정의 민주주의가 정착되었을 때 경제정의를 논의할 수 있는 토대, 경제 권력의 불균형을 완화할 장치의 필요성이 설득력을 가진다.


 가장 낮은 지위의 사람, 피해자의 관점으로 고려하고 민주적 절차를 지키지 않는다면 어떤 정의도 성립되기 힘들다. 2000년도에 ‘100인 위원회’가 구성되어 운동권 내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운동이 있었다. 운동권 내 ‘미투’였다. 그동안 ‘조직의 보위’, ‘시민운동의 도덕성’이라는 외피에 의해 은폐되었던, 운동단체 내부에서 활동가들에게 가해진 성폭력을 드러내어 바로잡자는 의미였다. 그러나 ‘100인 위원회’의 구성원들은 즉시 ‘마녀’가 되어, 온․오프라인에서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2020년의 경실련 사태도 이에 못지않다. 어떤 조직보다 성적 감수성에 민감하고, 민주적인 절차와 합법성을 갖춰야 할 시민단체가 오히려 저질의 성적 감수성을 지닌 데다 억압적이고 위계적이었음을 드러냈고, 사건 처리 과정은 위법했다.


 시민사회단체가, 민주주의와 국민의 인권 보장을 진일보시킨다는 본연의 비전과 목적에 부합하지 못하는 행태를 보인다면 그 조직은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 그런 점에서 중앙경실련이 충북청주경실련을 사고지부로 통보하고 폐쇄한 것은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실련이 문제해결과정에서 ‘피해자들에게’ 보여준 태도는 민주적이지 않았다. 인권을 보장하지도 않았다. 실제로 폐쇄 당해야 할 곳이 어디였을까? 안타깝게도 조직이 오래되면, 운동을 목적으로 하기보다 조직의 지속성을 목적에 두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발전되면 ‘조직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는 행위는 억압되고, 은폐되며 격리된다. 이것이 그동안 운동조직에서 성폭력/성희롱 사건을 다뤄온 태도들이다. 이 사건은 새로운 국면에 돌입했다. 해당지역의 시민사회단체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피해자들 지지모임도 새로운 활동을 준비 중이다.



사진 출처 - 충북인news


 이번 사건만이 아니라 성희롱을 제대로 근절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직장 내 성희롱과 성폭력이 ‘산업재해’에 포함되어야 한다. 산업재해는 사업주와 국가의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 노동자의 안전한 보호와 피해의 보상, 사고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감소하고자 하는 조치다. 산업재해의 중요한 구성 요건은 ‘업무상 사유’및 ‘업무와의 관련성’이다. 1963년 소위 ‘굴뚝 산업’이라 불리는 2차 산업(건설 및 제조업)에서의 노동자 안전을 위해 마련되어 2013년 업무상 질병의 범위를 넓혔으나 ‘신체 부상’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많아 여성 노동자들이 겪는 다양한 질환 등은 외면되고 있다. 남성과 여성 노동자 성비는 57:43이지만 산재판정 노동자 성비는 80:20으로 나타나는 것은 여성 노동자들의 특수한 상황이 배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산업 안전은 모든 노동자에게 매우 중요하지만 ‘안전’을 체감하는 범주는 남녀 노동자에게 있어 차이가 존재한다. 예전에 가스검침원이 가정 방문 중 남성에게 감금당했다 풀려난 뒤 자살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남성이라면 이런 경험을 겪지도 않고, 이런 종류의 안전을 걱정하지도 않는다. 안전과 위험에도 성별차이가 존재한다. 직장 내 성희롱은 업무상 사유(위계)에서 발생하고 업무와 관련한 장소-회식이나 야유회 역시 사업주의 관리가 영향을 미침- 및 일과 관련하여 발생기 때문에 업무 연관성이 존재하며, 따라서 산업재해의 구성 요건을 충족한다. 직장 내 성희롱을 산업재해로 포함한다면, 성희롱 예방을 위해 사업주는 더욱 신경을 쓸 수밖에 없고, 성희롱 및 성폭력 가해자들도 실질적으로 줄어드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또한, 피해의 극복을 위한 제도적이고 실질적인 지원을 통해 피해자의 조속한 일상복귀를 도울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인권의 목록’을 확대하는 일은 녹록하지 않다는 점이다. 위에서 언급한 사건을 비롯한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들과 지지자들의 연대를 바탕으로 한 지속적인 투쟁의 과정이 필요하다. 산업재해에 성희롱을 추가하는 것은 ‘인권의 목록’을 확장하는 동시에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이다. 성희롱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민주주의와 사회정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해결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진보성을 판단하는 기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