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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신은 왜 침묵하는가!(조광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09-03 11:32
조회
1025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1. 두 가지 종류의 말이 있다.


 참 또는 거짓의 여부가 판명될 수 없는 말들이 있다. 신이 현존한다는 말이 대표적이다. 이 말은 그 현존하는 신이 전지전능할 뿐만 아니라 그 능력을 언제 어디서건 늘 발휘한다는 말로 발전한다. 이런 말은 그 형식상 사실에 관한 말에 속한다. 즉 ‘가 있다’라거나 ‘는 ……이다(하다)’라는 형식을 띤 말이다. 그래서 “전지전능한 신이 현존한다.”()라는 말은 “코로나19 사태가 지속해 수십만 명이 사망했다.”()거나 “해고노동자 복직을 위해 한때 함께 싸웠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대통령이 되고, 한 사람은 삼십여 년에 이어 지금도 복직 투쟁을 하고 있다.”()거나 “그는 억울한 마음에다 원한이 사무쳐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라는 등의 말과 똑같은 형식을 띤다. 그러나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등의 문장은 감각적 경험에 따라 참인지 거짓인지 이성적인 판명이 가능한 데 반해, 문장 는 참인지 거짓인지 판명할 길이 없다. 원리상 참인지 거짓인지 판명이 가능한 말은 대체로 문장 처럼 자연적인 사실을 지시하거나, 문장 처럼 사회적인 사실을 지시하거나, 또는 문장 처럼 심리적인 사실을 지시한다.


 새로운 각종 SNS 미디어가 발달함으로써 흔히 가짜 뉴스라 일컬어지는 말들이 난무한다. 가짜 뉴스라는 것도 참인지 거짓인지 판명할 수 있을 때만 성립한다. 원리상 참인지 거짓인지 판명이 될 수 없는 말은 진실한 뉴스도 아니고 가짜 뉴스도 아니다. “하나님도 나에게는 꼼짝하지 못해. 하나님, 나한테 까불면 죽어.”()라는 말은 저 위 문장 처럼 사실을 나타내는 형식을 띠고 있긴 하나, 참 또는 거짓을 판명할 수 없다. 즉 경험적인 이성을 적용할 수가 없다. 와 처럼 사실에 관한 말의 형식을 띠고 있긴 하지만, 이같이 경험적 이성에 의해 참 또는 거짓을 판명할 수 없는 말을 난센스한 말이라고 말한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난센스한 말의 한 예로 “장미는 이빨이 없다.”()라는 말을 제시했다.


 조만간에 또는 언젠가는 참 또는 거짓이 판명될 수 있는 종류의 말은 원리상 인간이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만, 이때 감각적 경험은 한 개인의 주관적인 경험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경험이다. 말하자면, 상호 주관적으로 함께 관찰할 수 있고 이성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객관적인 현실에서의 경험이다. “이번 총선은 완전히 부정선거다.”()라거나 “현 정권에서 우리 교회에 코로나바이러스 퍼붓는 테러를 저질렀다.”()라는 말은 난센스한 말이 아니다. 그 성격상 어떻게든 감각적인 관찰을 통해 참 또는 거짓을 밝힐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물리학자들이 “빛은 입자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하다.”()라고 개념상 모순으로 여겨지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실제로 빛이 감각적인 경험을 통해 입자로 관찰되기도 하고 파동으로 관찰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2. 난센스한 말이 오히려 무섭다.


 흥미로운 점은 , , 와 같은 난센스한 말이 참 또는 거짓을 판명할 길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묘하게도 사람들을 현혹한다는 것이다. 그 현혹의 역사는 너무나 오래되었고, 그 영역과 방식은 다종다양하고, 그 생명력은 뽑아도 뽑아도 곧바로 자라나는 잡초처럼 끈질기다.


 경험적인 이성을 통해 참 또는 거짓으로 판명이 날 수 있는 말의 경우, 보통교육을 받은 합리적인 사람들은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연적인 사실의 여부에 관해서는 과학이 밝혀줄 것이고, 사회적인 사실에 관해서는 객관성을 중시하는 언론이나 사회 관련 학문 또는 사법기관이 밝혀줄 것이고, 심리적인 사실에 관해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이나 행동을 바탕으로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이 밝혀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 결과에 따라,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참이면 긍정해서 그것에 맞게 행동하고, 거짓이면 부정하고 그것을 무시하거나 어긋나게 행동해서 대처하면 그만이다. 말하자면, 참 또는 거짓으로 판명이 날 수 있는 말들은 인간의 감각적인 경험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참이건 거짓이건 그에 따라 생기는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든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거나 하다못해 사력을 다해서라도 대처해 보려고 노력할 수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크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참 또는 거짓이 밝혀질 수 없는 주장은 그렇지 않다. 우리 인간은 알지 못하는 대상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아무리 해도 알 수 없다고 여겨지는 관념적인 대상에 대해 더 큰 두려움을 느낀다. 알 수 없다고 여겨지면 없다고 해버리면 될 것 같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이상한 소리가 분명히 들리는데 그 소리가 어디에서 나는지, 왜 나는지, 그 뜻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고 여겨질 때, 그 소리는 진정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서 발전하여 그 소리를 인격화하여 숭배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그 소리는 완전히 두려움의 대상이 되면서 그 소리가 자신의 길흉화복을 전적으로 결정하고 지배하는 힘을 지녔다고 믿게 된다. 그리하여 그 알 수 없는 힘을 남들은 느끼지 못하고 나 혼자만 느끼는 데 따른 희열을 느끼기까지 한다. 두려움과 희열이 뒤범벅되면서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밤새도록 기도하다가 아침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대한민국 망한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지구촌에서 없어진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정도 되면, 난센스한 세계에 완전히 빠져듦으로써 자신의 그 세계가 난센스한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의미와 가치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아가 자신의 그 세계를 난센스한 것으로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역할을 하는 구체적인 현실의 세계를 오히려 철저히 난센스하다고 여기게 된다. 즉 구체적인 현실의 삶을 무의미하고 허망하다고 확실하게 치부하게 된다. 적반하장의 완전한 왜곡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마침내, 구체적인 현실의 세계에서 삶의 가치와 의미를 구하고자 하는 자들의 삶이야말로 철저하게 거짓될 뿐만 아니라 가치가 없다고 확신한다.


 그런 확신을 토대로 이제 사실을 아예 벗어난 순수한 가치의 세계로 향한다. 자신의 사유와 감정과 말과 행동은 참 또는 거짓을 판명하는 척도인 감각적 경험에 따른 관찰과 실험을 완전히 무시한 상태에서 이루어질 때, 바로 그때에만 근본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 거짓말을 잘 구사함으로써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났을 때처럼 거짓을 따르더라도 좋을 수 있고, 솔직하게 고백함으로써 죽음을 면치 못했을 때처럼 참을 따르더라도 나쁠 수 있다. 그런데도, 좋은 것은 진리고, 나쁜 것은 거짓이라고 여겨 사실의 세계를 가치의 세계에 복속시킨다. 그리고 좋음을 초월적으로 인격화하여 하나님이나 천사로 여기고 좋음이 온통 지배하는 내세인 천국을 굳건히 설정한다. 그리고 나쁨을 초월적으로 인격화하여 악마로 여기고 악마가 지배하는 내세인 지옥을 굳건히 설정한다. 아울러 그 현존 여부에 관해 참 또는 거짓을 밝힐 수 없는 신이 참 또는 거짓을 분명하게 심판할 뿐만 아니라, 그 심판은 축복과 저주로 나뉜다고 굳게 믿게 된다. 그러면서 이제 참 또는 거짓은 사실에 관한 것에서 순전히 가치에 관한 것 즉 좋음(선)과 나쁨(악)으로 전격적으로 변환된다. 그러니까, 좋음과 나쁨 즉 가치의 여부는 감각적인 경험을 통해 확인 가능한 사실에 근거해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경험의 현실을 얼마나 더 강하고 뚜렷하게 넘어서고 벗어나 무시할 수 있는가에 따라 성립하는 것이다: “아, 우리 목표가 죽는 거야. 원래. 우리는 갈 곳이 정해져 있어, 하늘나라야.”



사진 출처 - 뉴스1


3. 진정한 가치는 철저히 경험적 사실에 근거한다.


 우리의 삶에 의미 있는 가치는 본래 경험적 사실에 근거한 가치 즉 좋음과 나쁨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경제학적으로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이 얼마나 투입되었는가, 하는 사실에 따라 결정된다. 이를 원용해서 말하면, 나의 행위가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는 그 행위를 할 수 있기 위해 그동안 내가 얼마나 사회적으로 유용한 일을 했는가에 따라, 그리고 나의 이 행위가 앞으로 사회적으로 유용한 일을 얼마나 일으키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즉 가치는 새로운 사실들을 얼마나 어떻게 다양하게 일으키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다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의 행위가 만약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데 도움을 주었다면, 나의 그 행위가 가치가 있는 것은 그의 생명 자체를 유지하도록 한 데 있긴 하지만, 그 내용으로 보면 다시 살아난 그 사람을 통해 여러모로 많은 새로운 경험적인 사실들이 생겨나도록 했기 때문이다.


 더운 한여름에 높은 산에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가 시원한 바람을 맞는다거나 계곡으로 내려가 폭포를 맞아 차갑도록 시원하면, “아이고, 정말 좋구나!” 하고 말한다. 이때 좋다고 말하는 것은 우선 가치 판단이다. 하지만, 이때 가치는 내 몸이나 내 심정의 사실에 근거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덕분에 재생된 활기로써 그렇지 않았더라면 할 수 없었을 일을 할 수 있고 그만큼 새로운 사실들을 엮어낼 수 있음에 근거해서 성립한다. 코로나19 때문에 모든 특강이 끊어져 ‘배고픈’ 프리랜서가 국가로부터 긴급재난지원금을 받으니 좋다고 할 때 그 좋음은 그저 기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사고 싶었던 책도 살 수 있고 모처럼 외식도 할 수 있고 웹캠과 웹 마이크를 살 수 있고 오랜만에 안심 놓고 술도 한 잔 마실 수 있기에 성립하는 것이다. 즉 자연적이거나 사회적이거나 문화적인 욕망을 여러모로 충족함으로써 그에 따른 새로운 사실들을 만들고 그 새로운 사실들을 통해 관련된 새로운 감각들을 느낄 수 있기에 좋음, 즉 가치가 성립하는 것이다.


 좋음과 나쁨 즉 가치 또는 반(反)가치는 사실에 앞서 그 자체로 먼저 존립하는 것이 아니다. 가치는 사실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고, 그래서 사회역사적으로 가치의 척도는 변하기 마련이고 실제로 그렇게 변해 온 것이다. 말하자면 감각적인 사실들의 장기간에 걸친 폭넓은 역동적인 교환에 따라 가치가 발생하고 소멸해 온 것이다.


4. 코로나 팬데믹이 기독교를 딜레마에 빠뜨린다.


 종교를 추구하는 사람은, 특히 이 땅에서 광신적으로 기독교에 매달린 자들은 감각적인 경험을 통해 참 또는 거짓으로 나뉘는 세계를 근본적으로 무시하는 경향을 지닌다. 그리고 인간의 감각적인 경험으로써는 참 또는 거짓을 판명할 수 없는 세계야말로 참다운 세계고, 그것이 참다운 이유는 그 세계야말로 진정한 영원한 행복과 평화를 보장하기 때문이라고 믿는 경향을 지닌다. 그리고 그런 경향을 정확하게 행동으로 보이지 않으면 그러한 세계에 대한 신앙심이 부족한 것이고 그 결과 그 세계에서 쫓겨나 지옥의 문턱에서 ‘슬피 울게 되리라’라고 주장한다.


 그 행동은 마침내, 감각적인 경험을 통해 주어지는 여기 이 땅에서 행복과 평화를 이루고자 하거나 그 바탕이 되는 평등과 정의를 이루고자 하는 자들을 적으로 여겨 철저하게 공격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문재인은 빨갱이다.” 자신들을 적으로 여기지 않는 자를 적으로 여겨 공격하는 것은 마치 풍차를 적으로 여겨 창을 꼬나 쥐고서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와 같다고 여겨질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을 적으로 여겨 공격하려는 세력을 허상으로라도 만들어내야 하고, 마침내 그 허상이 진상이라고 정확하게 착각하는 데까지 자신들의 의식과 무의식을 몰고 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빨갱이’라는 상징적 코드야말로 그러한 적을 만드는 데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라고 여긴다.


 광신은 이성을 적으로 여긴다. 기독교적인 초월 세계에 대한 광신은 감각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이성에 따라 여기 현실에서 사회공동체를 구성하고자 하는 행위를 적으로 여겨 대립한다. 그동안 오랜 역사를 지닌 기독교는, 특히 로마의 국교가 되고 난 뒤 이른바 세속과의 연결을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세속의 현실을 정치 사회적으로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데 알게 모르게 기여하지 않고서는 현실 사회에서 그 정당성을 획득할 길이 없었다. 그 결과, 언제나 현실에서 사회적인 정의와 평화를 위해 투쟁하고 노력하는 만큼 제대로 된 신앙의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거꾸로 말하면, 자의든 타의든 또는 위장을 통해서건 노골적이건, 교회가 세속의 권력과 부와 명예에 빌붙어 이성을 저버릴 때 그만큼 신앙적으로 타락한 것은 물론이지만, 그 반대로 이성을 무시하고 가상적인 초월적 세계에 올곧이 빠져들어 자신들만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현실에서 일어나는 불의와 불평등과 그에 따른 인민들의 불행을 백안시하는 것 역시 신앙적으로 타락한 것이었다.


 그중 가장 타락한 형태는 광신을 퍼뜨려 활용함으로써 저 자신의 권력과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다. 기묘한 광신의 열정으로 무장한 특정한 누군가가 나서서 자신의 말을 무조건 믿고 따르면, 천국을 상으로 받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권력과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다고 유혹하여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한다. 그리하여 제정신이 아닌 그들의 힘을 끌어모아 이용하는 것이다: “여신도가 빤스를 벗으라고 할 때 벗으면 내 성도요, 거절하면 똥이다.” 말하자면, 광신적 신비주의가 현실의 권력과 결합할 때 가장 신앙적으로뿐만 아니라 세속적으로도 타락하게 된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세속인들뿐만 아니라 신앙인들의 목숨 역시 대대적으로 위협한다. 이에 신앙인들 역시 경험적 이성에 따라 참 또는 거짓을 판명하고 실천하는 과학의 역량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딜레마의 상황에 몰려 있다: “방역은 신앙의 영역이 아니고 과학과 의학의 영역이라는 것을 모든 종교가 받아들여야만 한다.” 참 또는 거짓의 판명이 불가능한 세계를 추구하는 기독교의 세계관이 딜레마적인 위기에 처한 것이다. 어떻게든 함께 모여 서로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래서 함께 모이면 목숨이 위험하고,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거리 두기에 따라 뿔뿔이 흩어져야 하는데 그러면 신앙이 위험한 것이다. 특히 ‘신천지 교단’ 사태와 ‘사랑제일교회’ 사태가 하나님이라는 신을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 물론 하나님의 침묵에서 그의 섭리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우슈비츠 유대인 대량 학살이 계속 이어질 때 거기에 잡혀 있었던 어느 유대인이 외쳤던, “야곱의 하느님은 어디로 갔는가!” 하는 말이 메아리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