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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피의자 신문과정 녹음‧녹화 활성화를 위한 조건 2(이윤)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07-22 15:56
조회
714

이윤/ 경찰관


 故 최숙현 선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 감독과 팀닥터 등의 상습적인 폭행사건이 수사 중에 있다. 현재 검찰과 경찰에서 수사가 진행 중이지만 피해자나 다른 사건 관계인들은 수사 사항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위 사건에서 최 선수의 가족이 기자들에게 제기하거나 다른 동료 선수들이 기자회견에서 제기한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된 사건 수사의 문제점을 언론 기사에 의해 파악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최 선수가 고소한 내용이 아닌 자극적인 진술은 더 보탤 수 없다며 수사관이 일부 진술을 삭제했다.
2. 벌금 20~30만원에 그칠 것이라고 말하여 고소인이 좌절하게 했다.
3. 고소하지 않을 것이면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위 내용만 보면 경찰 수사관이 매우 소극적으로 수사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으나 이 역시 정확한 사실관계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1번은 고소인이나 주변 참고인들의 진술 중 일부 내용을 고소내용과 관련이 없다는 이유로 수사관이 조서에 기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찰 수사 중 피해자와 참고인들은 무척 많은 진술을 한다. 그 중에는 범죄사실과 관련된 것도 있지만 범죄사실과 관련 없는 주변적 정황 및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였지만 범죄까지는 이르지 않는 모든 행위가 포함된다. 수사관들은 처벌 대상이 아닌 내용도 들어주기는 하지만 굳이 조서에 기재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조서는 녹취록이라기보다 보고서이므로 나중에 수사결과를 쉽게 정리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조서에 진술인이 말한 내용을 모두 그대로 기재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일이다. 이 때 만일 진술내용을 녹음하거나 녹화한다면 조서에 기재되지 않은 내용까지 나중에 확인할 수 있다. 과연 조서에서 삭제된 ‘자극적인 진술’이 무엇일까? 그 내용은 범죄혐의 입증에 도움이 되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불필요한 것이었을까? 삭제는 정당한 것이었을까? 이를 명확히 하는 것은 진술인뿐만 아니라 수사관에게도 도움이 된다. 녹음된 진술을 근거로 진술을 모두 청취하고도 조서에 기재하지 않은 것은 수사상 필요에 의한 취사선택에 불과했음을 항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이 사건에서는 진술이 녹음·녹화되지 않았다.


 2번은 필자도 과거에 피해자나 피의자들로부터 ‘수사가 끝나면 어떤 처벌을 받게 되나요?’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들었기에 나름 상상해 볼 수 있다. 수사는 과거에 어떤 위법행위가 있었는지를 탐색하여 조사하는 과정이고, 이를 통해 밝혀진 사실을 바탕으로 재판에 의해 법원에서 처벌여부 및 양형이 결정된다. 수사관은 처벌의 주체도 아니고 양형을 판단할 수도 없으므로 어떤 처벌을 받을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수사관으로서는 ‘저는 처벌을 어떻게 받을지 모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정답이다. 그래도 ‘수사를 많이 하셨으니까 어느 정도 처벌을 받을지 아시잖아요’라며 계속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일반적으로 폭행사건은 벌금형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상해정도가 심하고, 피고인이 주거부정이거나 도망우려가 있거나 하면 구속이 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해주었다. 이런 문답은 당연히 조서에 기재하지 않는다. 보통은 조서작성을 다 마치고 열람 내지 간인, 날인하는 중에 이루어지거나 전화상 대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건 수사관이 어떤 취지로 어떻게 말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만일 녹음·녹화 하였다면 (조서 열람 등 종료과정도 모두 녹화한다) 수사관의 소극적 수사에 의한 응답이었는지, 문의 사항에 대한 일반적인 답변이었는지 명확해 질 것이다. 언론에 발표된 전화통화 녹취록에 의하면 일반적인 답변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3번은 다소 모호하다. 참고인 조사 중에 참고인 자신이 당한 피해사실을 진술하니 ‘그건 고소할 생각이 있으면 별도로 고소하고 지금은 고소된 사건인 최 선수 관련된 내용만 말하라’고 한 것인지, 참고인이 최 선수 관련된 내용을 진술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고소된 범죄사실과 관련 없는 별건에 해당하기에 ‘새로운 내용으로 고소하지 않을 것이면 여기서는 말하지 말라’고 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전자라면 수사관이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지고(그래도 진술을 못하게 하면 안 된다), 후자라면 고소인에게 그 내용도 고소내용에 포함되는지 확인 후 조치할 수 있다. 수사관이 했다는 말의 맥락과 진의를 알기 위해서는 역시 녹음·녹화가 필요하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나는 이 글에서 위 사건 수사관을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만일 위 수사관이 운동선수가 감독을 고소한 폭행사건 수사 과정에 피의자들이 부인하고, 대부분의 동료선수가 피해자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고 있음에도 한 두 명의 참고인 진술이나마 청취하여 이를 근거로 기소의견으로 송치하는 과정에서 양형과 수사사항에 대해 일반적인 내용으로 응답한 것 때문에 감찰조사와 징계를 받는다면, 이 또한 가장 만만한 한 사람의 희생양을 찾아내어 제물로 바침으로써 감정의 정화조로 삼고자 하는 또 하나의 사회적 폭행이 될 수 있음을 염려하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조사과정의 진실을 확인하여 잘잘못을 가리는 데에 녹음·녹화는 필수적이다. 녹음·녹화를 하면 진술인뿐만 아니라 수사관도 보호받을 수 있다.


 그런데 참여인 조항과 함께 녹음·녹화를 가로막는 또 하나의 장애물이 있으니 그것은 ‘의무적 조서기재’ 조항이다. 형사소송법 제244조 제1항은 ‘피의자의 진술은 조서에 기재하여야 한다’고 되어있다. 진술녹화실에서 조사하면서도 별도의 조서를 반드시 기재해야 한다면 편리성이나 용이성이 없는데도 굳이 녹화실을 이용하려는 수사관은 많지 않을 것이다. 피해자나 참고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형사소송법에 피해자나 참고인의 진술을 반드시 조서에 기재하라는 조항은 없으나 제313조 제1항에 의해 이들의 진술을 기재한 조서가 몇 가지 조건에 의해 증거능력이 인정되므로 수사관으로서는 녹음·녹화를 하면서도 별도의 조서를 따로 작성하지 않을 수 없다. 현행 형소법 하에서 영상녹화물은 조서를 대체한 증거가 될 수 없다(성폭력 사건은 예외).


 녹음·녹화물에 증거능력을 부여하는 것은 조작의 위험성이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다만 녹음·녹화를 장려하여 억울한 질타로부터 진술인과 수사관의 인격과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이전 글과 같이 녹음·녹화할 경우 참여인을 두지 않아도 되도록 규정하는 것과 함께 조서 작성을 생략할 수 있도록 법률을 개정하고(피의자의 경우), 전체 진술의 취지만 기록한 간이한 조서를 작성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검사와 판사의 태도가 변화해야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조서는 단지 수사관에 의해 작성된 보고서일 뿐이다.


 이미 14년 전 전국 경찰관서에 마련된 진술녹화실 사용을 이제라도 활성화함으로써 진술인과 수사관 모두 보호받을 수 있도록 형소법 일부를 개정하고, 조서를 중시하는 사법 제도/관행이 변화하기를 바란다. 사람의 행동을 변화시키려면 변화에 필요한 조건을 충족시켜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