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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천만다행이다(조광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06-10 15:04
조회
984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비록 개원에 진통을 겪고 있긴 하지만, 다행히도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을 비롯한 진보진영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코로나19’의 위기를 잘 극복한다는 평가를 비롯해 다른 요인들이 긍정적으로 함께 작동했다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근본적으로는 촛불 혁명의 민주적인 정신이 지난 지방선거에 이어 흔들림 없이 유지되어 총선에까지 힘을 발휘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총선 전 수개월 동안 불안했었다. 속칭 태극기 부대, 광신적인 전광훈 무리, 이에 편승한 보수 우파의 정치꾼들과 언론 집단이 대대적으로 거동하여 만만찮은 세를 과시했다. 그들은 촛불 혁명에 의한 현 정권에 최대한 흠집을 내고 끌어내리기 위해 온갖 극언을 스스럼없이 쏟아내었다. 그 핵심은 문재인 정권이 친북 사회주의적인 정권으로서 나라를 북한의 김정은에게 갖다 바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저들의 본심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저들은 정말 그렇다고 확신하는 걸까, 아니면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면서도 혹세무민의 빌미로 내거는 전술적인 구호에 불과한 걸까? 어느 경우건, 저들이 격렬한 충동적인 감정을 끌어모아 대대적으로 터뜨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광화문을 휩쓰는 저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특히 손수 지어 입은 괴이한 군복을 차려입고서 대오 정렬하여 행진하면서 마치 쿠데타라도 일으켜 세상을 뒤집는 데 성공이라도 한 것처럼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노라면 절망적인 분노가 일었다.


 저들이야말로 언론과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 체제의 설립을 부정하고 방해하던 세력이 아니던가. 그런데 애써 길 닦아놓으니까 미친 X가 먼저 지나가는 식이었다. 목숨을 잃어가면서까지 갖은 고초와 희생을 거쳐 겨우 민주주의 체제의 길을 닦아놓았더니 오히려 저들 반동의 세력들이 얼씨구나 광란의 집회를 마음껏 벌이면서 잡아가지 않는다고 안심 놓고 입에 담을 수 없는 극언의 막말을 대명천지에 마음대로 쏟아내면서 기염을 토하는 것이었다. 같은 국민이라는 사실에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절망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그런데 대다수 국민이 이처럼 대대적인 총선 승리를 가져다주었으니, 얼마나 다행한가. 지나고 보니 그럴 리가 없다고 여겨지지만, 혹시라도 만약 저들 광란의 세력이 지지하는 당이 과반수의 의석을 차지하는 일이 벌어졌다면 과연 이 나라가 얼마나 어떻게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면서 퇴행의 길을 재촉하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어질병이 인다. 참으로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보고 싶은 사실을 실제 일어난 사실로 둔갑시키는 데 열을 올려 경쟁하게 될 것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적개심으로 자발성에 의한 평화 대신에 약육강식의 예속만이 살 길이라고 외칠 것이고, 참다운 상호 인격적 삶을 위한 자유 대신에 남을 억누르는 부와 권력에 의한 자유가 진정한 자유라고 여겨 추구할 것이고, 가난한 자들은 본래 게으르고 무능력한 자신들의 탓에 그러하니 국가가 도와줄 필요가 없다고 강변할 것이고, 일인숭배의 파시즘적인 형태의 종파들이 대세를 이루며 종교 생활을 미신의 늪으로 몰고 갈 것이고, 첨단의 과학기술들을 오로지 경제 성장을 위한 도구로만 여겨 미래의 인간과 지구가 어떻게 되건 상관하지 않는 방향으로 발달시키고자 할 것이고, 차기 정권을 잡는 일에 몰두하여 불리한 위치에서 차별받는 뭇 소수자들을 인권과 상관없이 내팽개칠 것이고, 민족의 역사와 미래를 걱정하여 과거에 있었던 비극적인 사건들에 관련해 시비곡직을 제대로 가리고자 하는 노력을 과거에 얽매어 분열을 조장하는 짓이라고 매도하면서 덮어놓고 뭉치자는 파시즘적인 얼빠진 정치놀음을 일삼게 되었을 것이다.


 총선 개표의 결과를 지켜보면서 무엇보다 쾌재를 부른 것은 그동안 조금의 양식이라도 있는 자라면 도대체 입에 올릴 수 없는 괴이하기 짝이 없는 말을 예사로 하면서 미쳐 날뛰던 정치꾼들이 하나같이 다 낙선했다는 것이었다. 십 년 묵은 체증이 씻은 듯 내려가는 것 같았고, 심지어 드디어 해방되었구나, 하는 심정에 이르기까지 했다. 국회의원이란 국민을 대표하는 독자적인 헌법 기관일 정도로 그 어떤 개인적인 욕망이나 사특한 짓에 조금의 여지를 주어서도 안 되는 준엄한 책임과 의무를 지는 직무인데도, 그들은 이를 전혀 망각한 채, 마치 막말의 극단적인 정도가 곧 그들 당에 제대로 충성하고 아울러 국민의 원한을 제대로 풀어주고, 따라서 진정한 정치적 행위를 하는 기준인 양 여겨 광분했다. 몇몇 초선 국회의원들은 도무지 창피해서 국회의원을 더는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자진해서 총선 출마를 포기한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오죽했으면 그랬겠는가. 저들 국회의원이라는 명함을 앞세운 정치꾼들이 무작한 광화문 세력과 한통속임은 다들 아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한통속의 선두에 당 대표라는 자가 나서 지휘를 했다.


 당 대표라는 자가 정치인으로서 전혀 자격이 없다는 것은 개표하는 밤에 여실히 드러났다. 명색이 당 대표로서 총선을 지휘했다는 인물이 자신이 출마한 지역구에서 낙선이 확실해지자 간단하게 당 대표직을 사임한다 하고서 그날 밤에 자리를 뜬 뒤 코빼기도 내보이지 않았다. 당 대표직 사임이 그렇게 급한 일은 아니었다. 낙선한 자들을 위로해야 하고, 물러나더라도 대참패에 대한 자신의 잘못과 책임을 공식적으로 밝히고 사과한 뒤 앞으로도 백의종군하듯 당에 계속 충성하겠다고 하고서 물러나야 하지 않는가. 어찌 보면 사필귀정이긴 하나 예상치 못한 참담한 모습이었다. 저런 자가 제1야당의 대표였으니, 어찌 국회를 비롯한 정국이 마비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싶었다. 말로만 앞세운 국민이고 당원 동지 여러분이었지, 실상 그의 내심에는 저 자신뿐이었다는 사실을 여실히 입증해 보였다. 그의 단식과 삭발의 장면이 궁색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으로 함께 떠올랐다.


 정치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충동과 광기다. 설혹 대의명분이 정당한 혁명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충동과 광기로 돌변한 원한과 복수심에 의해 수행되면, 반드시 실패하고 만다. 프랑스 혁명이 그랬고, 러시아 혁명도 그랬다. 우리의 촛불 시민혁명은 원한이나 복수심 그에 따른 충동과 광기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근본적으로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고자 하는 냉엄한 조치로써 대중적인 이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이성의 힘이 반동적으로 날뛰는 충동적인 광기를 눌러 이긴 것이 이번 총선이다.


 이로써 이제 더는 저 광신의 무리로 출몰하는 충동과 광기에 의한 정치 행위가 시민 정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되었으면 한다. 물론 전혀 낙관할 수는 없다. 이렇게 정치 지형이 유리한 쪽으로 바뀔수록 오히려 더 경계해야 하고, 더 깊은 성찰의 허리끈을 동여매야 한다. 이제 합법적인 강력한 무기를 갖추었으니, 이를 어떻게 현명하게 활용하여 선진적인 민주국가를 이룩하는 데 진심과 성실을 다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해결되었으면 하는 현안들은 많아 복잡하고 그렇기에 마음은 더욱 성급하다. 언제쯤이면 국가 사회적인 삶을 적극적으로 긍정할 정도로 흔쾌한 마음을 이룰 수 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상존한다. 동서 양쪽에서 북쪽을 향한 평화의 철길이 열려 남북으로 서로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으면 한다. 이를 위해 우리나라가 미국의 간섭에서 확실하게 벗어날 수 있었으면 한다. 그 와중에 분단과 전쟁에서 입은 트라우마와 같은 깊은 상처가 아물어 이데올로기적인 사유가 진취적이고 합리적인 사유의 발목을 잡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세계적인 ‘코로나19 팬데믹’에서 암시되는 반(反)생태적인 경제 성장을 지양하면서 안정된 경제 성장을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복지국가를 이루어 빈부귀천의 질곡을 벗어났으면 한다. 돈 벌어 부유하게 잘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인문예술적인 교양의 깊이를 더해 서로가 공유하면 할수록 더욱 풍부해지는 정신적인 삶을 목적으로 삼는 일이 아예 당연한 것으로 자리 잡았으면 한다. 그럴 수 있도록, 특히 거대 금융자본이 세계인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일이 크게 완화되었으면 한다. 성별, 인종, 성적 특수성, 계급, 민족 등에 따른 차별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누구나 타고난 신성한 인권을 실질적으로 누릴 수 있도록 했으면 한다. 그리하여 길에서건 카페에서건 어떤 종류의 모임에서건 만나는 사람마다 좋고 힘찬 건강한 긍정적인 기운을 주고받을 수 있었으면 한다. 기술이 인간을 지배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특히 A.I. 기술을 비롯한 NBIC의 기술융합, 즉 나노기술, 바이오기술, 정보기술, 인지과학기술 등의 융합이 인간 존재를 무시하고 삭제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인간 존재의 신비를 축성하는 쪽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서로 인간임을 더욱 다행스럽게 여길 수 있는 방향으로 발전해 나갔으면 한다. 그리하여 비관적이고 종말론적인 사념을 불식시킬 수 있었으면 한다.


 이런 바람들이 각기 외따로인 것은 아니다. 서로 얽혀 연동한다. 천재일우의 기회라 말하고 싶을 정도로 크고 좋은 기회를 맞은 이번 21대 국회의 구성에 크게 기대를 건다. 통속의 정치에 휘둘려 좌고우면하는 일이 더는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현명하고 성실하고 실천력 있는 국회의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 국가와 민족의 책사들로 전면에 나서서 흔쾌히 용기 있게 활동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