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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운동인가? 민족주의운동인가? - 정의기억연대 사건을 바라보며(신하영옥)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06-03 16:30
조회
771

신하영옥/ 여성운동연구활동가네트워크 '젠더고물상'


 2009년 여성학을 배우면서 정대협 운동이 여성주의운동인가? 민족주의운동인가? 에 대해 학습을 한 적이 있다. 위안부 –성노예라는 말을 당사자들이 싫어한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할머니들은 여성폭력의 희생자들이지만, 다른 어떤 여성운동단체들과는 달리 남자들의 지지와 지원이 유난했고, 수요 집회에도 남자들의 수가 여자들의 숫자만큼이나 컸었다. 왜 남자들은 유독 위안부 할머니들에 관심을 보인 걸까? 미군 장갑차에 희생당한 효순이, 미선이 사건 때도 남자들은 유독 비슷한 관심을 보였다. 이 두 이슈의 배경에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복선이 깔려있다. 그리고 구식민지든, 신식민지든 민족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일본이나 미국이나 식민 지배국가라는 관점이 존재했고, 따라서 위안부 사건과 미군 장갑차 사건은 식민 지배국이 피 식민국을 대상으로 한 멸시와 혐오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간의 전선이란 배열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국가란 여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남성연대’에 지나지 않았고, 그 국가들은 국경을 초월해서 여성들의 성을 전시에 군인들의 사기진작을 위한 ‘위안’으로 소모되는 데 기꺼이 합의하였다.


 위안부로 끌려간 할머니들을 제일 먼저 징집한 것도 한국 남자들이고, 끌고 가서 강간의 대상이 되도록 하고 실제 강간한 가해자들도 남자들이다. 그리고 그 남성연대는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한 쪽은 외면하고, 권력에 짓눌렸던 다른 한 쪽은 ‘쪽팔려서’ 할머니들 얘기가 나오면 과장된 반응들을 보인다. 과연 할머니들 문제가 일본과 한국간의 문제가 아닌 전시강간당한 여성들의 인권문제로 정확히 논해진 적이 있던가? UN에서 여성의 전시강간 문제를 여성인권의 주요의제로 다루고 있고 한국의 할머니들도 많이 참석하시고 발언하신 것으로 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결정되었는지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여성에 대한 전시강간 문제도 한국에만 돌아오면 국가와 민족의 문제로 포섭되기 때문이다. 위안부 사건은 정확히 남성지배에 의한 여성의 성적 착취이다. 이 문제는 어디서나 발생되기 쉽고 발생되고 있는 문제이다. 때문에 전시강간, 전시 성 착취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그런 일이 왜 발생되는가? 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가능하다. 여성의 성을 착취와 노리개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남성연대, 가부장제의 밑바닥을 드러내고 보여주고, 논의해야 한다. 이용수 할머니의 말씀처럼 일본과 한국의 시민들, 문제의 심각성에 동의하고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동의하는 사람들이 먼저 만나 대화하고 소통하며 차세대 젊은이들, 학생들에게 알려줘야 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동의하고 합의하는 일본인이 많아지고 사과할 줄 아는 일본시민들이 많아질 때, 일본 당국의 사과와 배상이 가능하다고 본다. 일본의 시민들이 모은 기금마저 거부하며, 대화와 타협이 아닌 증오와 혐오로 일본 당국과 일본시민을 대하는 방식을 고수하고 주장하는 것은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방식이지 여성에 대한 성 착취와 그 한 방편으로서의 전시강간의 인권침해를 드러내는 방식이 아니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앞 담벼락
사진 출처 - 한겨레


 민주당이 윤미향 당선인과 정의기억연대에 의혹을 제기하는 이들을 ‘친일파’나 ‘토착왜구’라는 프레임으로 몰고 가는 것은 정의연의 운동이 이들에게는 여성주의운동이 아니라 민족주의운동 프레임에 갇혀있음을 보여주는 역설적 단서가 된다.


 5월 12일 34개 여성단체들은 “국내 최초의 미투운동이었던 일본군 위안부 운동을 분열시키고 훼손하려는 움직임에 강한 우려를 표한다.”며 정의연 지지성명을 발표했다고 한다. 7일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 후 5일 만에 신속하게 발표한 것은 이례적이다. 아직 의혹당사자인 윤 당선자의 충분한 입장발표나 사실관계가 확인된 것도 없는 상태에서 그랬다는 것에 여성운동에 몸담았었던 필자로서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여성운동에서 여성들은 여성운동가/활동가, 회원, 피해당사자 등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불특정 다수의 여성들도 포함된다. 그러나 공간에 기반한 여성조직에서 여성은 대체로 피해당사자, 회원, 활동가/운동가로 구분된다. 여성인권에 기반한 대다수 여성조직들에서 실제로 활동의 주체는 피해당사자를 대변하고 그들의 문제해결을 위해 기획, 집행하는 활동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회원들은 자발적 동의자이고, 일 년에 한 번 총회를 통해 사업 및 예산의 기획과 집행에 대해 의견을 말하는 것을 통해 의사결정에 참여할 뿐이다. 아니면 세미나 모임이나 다양한 소모임 활동을 통해 의사를 전달하거나 전달 받고 대다수는 온라인 소식지등을 통해 소식을 전달받을 뿐이다. 여성조직의 정책의 일차적 대상은 피해당사자들이다. 이들의 경험을 여성문제로 일반화하고 정책을 입안하고 제도화하는 것이 여성조직의 주된 사업이 된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객관성’과 ‘합리성’의 영역에서 배제되어 온 –여성폭력은 주로 은밀히 발생함으로 인해 가해자와 피해자의 주관적 주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여성피해자들의 입장과 관점, 주장이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 ‘피해자 중심주의’였다. 때문에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이들의 경험과 주장을 수용하고 이들이 운동의 당사자로 성장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여성조직의 운동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적극 경청하고 개별 피해자들의 의견이 상호간의 의견이나 조직의 의견과 다를 때는 모두가 모여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조건 피해자를 감싸는 것이 아니며, 피해자들을 소극적이고 두려움에 떨며 무조건 도움이 필요한 연약한 존재들이 아니라는 관점을 장착해야 가능한 일이다. 피해자들은 ‘남자들의 보호 안에 있어야 하는 미약한 존재로서의 여성’이라는 심신미약자의 위치성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보호만 필요하다고 보는 것은 그 여성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직업과 계층도 다르고, 삶을 대해 온 경험과 피해에 대처하는 방법도 다르기 때문에 피해자를 일원화하는 것은 위험하다. 특히 여성폭력 피해자들이 임파워먼트를 통해 여성운동의 주체로 변화하도록 해야 한다는 원칙에서는 특히 그러한다. 항간에서 피해자 중심주의를 다시 봐야 한다는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피해자 중심주의를 주장하면서 행동은 그렇지 않는 조직들에 대한 성찰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원칙으로써 고수해야 한다. 다만 피해자들끼리, 피해자들과 조직 간의 소통과 대화를 통해 이견이 발생할 때 문제해결 지침을 마련하는 것은 필요하다.


 이번 사건은 다양한 고민을 하게 한다. 여성운동 안에서 여성주의운동은 어떤 모습을 띄고 있는가?, 남성들의 민족주의에 기대고 의지하는 방식은 아니었는가? 라는 성찰과, 피해자 중심주의가 다만 구호와 외양으로만 존재하고 실재로는 조직, 단체, 활동가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지는 않았는가? 라는 고민들. 앞으로 여성운동은 이 문제들을 진지하게 성찰하며 대안을 찾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