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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참적의 삶 (윤영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10-10 11:53
조회
50
 


윤영전/ (사)평화연대 이사장


 멀리보이는 서석산 자락으로 이어진 분적 산봉우리 아래, 효골이란 마을이 있다. 선대로부터 오백 년이나 자자일촌하며 살아온 6형제 중 셋째 할아버지 둘째 아들로, 아호(雅號)가 동강(東崗)이신 아버지의 참적(慘迹)의 삶을 돌아본다. 치욕적인 을사 늑약의 해에 나시고 분단조국 46년 동안에 그렇게도 소원하시던 조국의 통일도 못 보시고 82세에 사세((辭世)하셨다.  


 어버이날, 일 년 사이 몰라보게 자란 증손자손녀가 앙증맞은 손으로 만든 빨간 종이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아준다. 그리고 아들 내외와 손자들이 『어버이 은혜』 노래까지 불러 흐뭇하면서도 눈시울이 뜨거워 지셨다. 아마 지난날 험한 세상을 살아오셨던 세월이 생각나시었을 터다.


 이렇게 자식과 손자녀들에게 효도를 받고 있으려니, 한 세대를 넘게 모셨던 부모님 생각에 마음이 허전해 지면서 과거의 일들이 눈앞에 아롱거린다. 나를 세상에 나게 하시어 자식을 얻고 손자까지 두어 대를 이어가고 있으니, 부모님이 한없이 그리워지는 게 당연지사다.


 부모님을 모시는 동안, 아버지는 깊은 밤이면 여러 얘기를 들려주셨다. 아버지가 팔순을 넘기실 때 나는 넌지시 “기록을 남기셨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다. “이 나이에 무슨 글이냐”고 하시면서도 노심초사 기억을 더듬어 몇 개월 만에 원고지 5장 분량의 글을 달필로 써놓으셨다. 여러 차례 당신의 기지(機智)로 사선을 넘나들던 사연과 그동안 내가 알지 못했던 일들도 적혀 있었다. 글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아는 내가 ‘아버지께 못할 일을 해 드렸구나’ 하는 죄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아버지는 열아홉 살에 청상과부가 되신 숙모님의 양자가 되었다. 그러고는 성년이 되어 딸 많은 홍 씨 가문의 맏딸에게 장가를 드셨다. 아들을 많이 낳으시어 자식 농사를 잘 지었다고 집안과 주위로부터 부러움도 샀다. 맏아들이 똑똑해 군청과 면사무소 호적 서기로 근무하여 장차 면장과 군수까지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부모님 사진
사진 출처 - 필자


 그런데 정부가 수립된 이듬해 봄 어느 날, 친구인 김 면장이 집을 찾아왔다.


 “자네 아들이 근간에 자리 비우고 서에서 요주의 인물이라는 통보까지 받아 걱정돼 찾아왔네.”


 아버지는 요즘 똑똑한 젊은이들이 좌편에 서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설마 당신 아들이 그러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에 청천벽력과 같은 심정이었다.


 그 후 맏형은 피해 다니다 결국 붙들렸다. 좌익 활동에 관여한 조직을 불라고 한 달 남짓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재판도 없이 스물두 살의 나이로 진외가 앞산에서 총탄에 숨지고 말았다. 우리 집은 형의 죽음으로 몇 년 동안 절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칠월 어느 날, 낯선 사람이 집에 들어섰다.


 “이 댁이 영철 동지의 집입니까? 아드님의 투철한 조국애를 높이 평가합니다. 오늘부터 아버지께서는 효지면의 위원장이 되십니다.”
 “아니 당신들은 누군데 내 아들을 알고 나더러 위원장이 되라는 거요? 나는 무식한 농부일 뿐이오. 유식한 사람을 찾아 시키시오. 나는 못합니다.”
 “못 하신다고요? 그러면 반동입니다. 그냥 맡으시면 됩니다.”


 아버지는 ‘반동’이라는 위협적인 언사에 그만 말문을 닫고 말았다. 1년 전에는 아들을 잃었는데 이번에는 당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더운 여름은 아버지의 가슴을 더욱 답답하고 심란하게 했다. 좌우익으로 갈린 친척과 면민들의 갈등은 어쩌면 희생을 가져올 수도 있었다. 그러기에 법이 없이도 살아갈 아버지는 선의의 관리자로 중립을 지키며 희생을 막았다.


 국군의 9․28수복으로 인민군은 물러갔다. 아버지는 무등산으로 일단 피신해 가는데 삼거리가 나왔다. 과연 어느 길을 가야 하나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산으로 들어가면 영원히 빨치산이 될 것이고 시내로 나가면 집으로 가는 길이지만 부역자가 된다. 아버지는 노모와 처자식을 생각하여 시내로 가는 길을 택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군경 합동으로 벌이는 토벌대의 검문을 어찌 통과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는데 궁리 끝에 초가집에 걸려 있는 호미와 약초 망태를 둘러멨다.


 한참을 가자 완전무장한 토벌대가 아버지를 향해 총을 들이댔다. “누구냐? 멈추어라.” “나는 노모가 위독해 약초 캐러 갔다 오는 길이오.”


 그들은 의심을 하면서도 효자라면서, 위험하니 빨리 가라고 했다. “대단히 죄송하지만 증명서를 하나 해주시오.” 아버지는 간청을 통해 얻은 확인서로 세 번씩이나 검문을 무사히 통과하였다. 아버지는 마을로 돌아오자마자 ‘부역자는 신고하라’는 공고를 보고 ‘살기 위해 부역을 했노라’고 자진신고를 했다.


 추수를 끝내고 의용군에서 자수한 19살의 둘째아들을 국군에 입대시킨 후 1․4후퇴가 있던 날 밤이었다. 갑자기 개 짖는 소리가 마을의 적막을 깼다. 이윽고 누군가 담을 넘어 안방 문을 와락 열었다. “석천이가 개새끼들에게 자수를 해? 우리를 배반했어!” 하며 집안 곳곳을 뒤졌다. 아버지는 마침 진외가에 출타 중이었다. 한참 후 뒷산에서 난 수발의 총성에 부역자 수명이 쓰러졌다.


 어느 날 아버지와 내가 울타리를 엮고 있을 때였다. 남루한 차림의 두 사람이 집 앞으로 다가왔다. 아버지가 피할 사이가 없이 그들은 다가왔다. 이제 틀림없이 붙들릴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아버지 앞에 선 그들이 불쑥 말을 던졌다.


 “말 좀 물읍시다. 이 마을에 윤석천이란 사람이 어느 집에 사나요?”
 “나는 다른 마을에서 일하러 와서 모릅니다. 저 안쪽에 가서 물어 보시오.”


 아버지의 위기의 순간을 지켜보던 나는 어찌 이 순간을 모면할까 마음이 몹시 탔었는데, 아버지는 태연하게 대답하시고는 곧바로 자리를 피하셨다. 나도 바로 육모정자로 가서 그들의 동정을 살폈다. 그 날도 두 명이 붙들렸는데 뒷산에서 총살을 당했다.


 전쟁이 휴전에 임박했을 때였다. 꽃샘추위로 함박눈이 내리던 날 밤, 집안의 귀염둥이 막내가 고열이 심해 단방약을 썼지만 열이 내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주에서 한의원을 하는 친구에게 약을 지으러 갔다. 식구들이 애타게 기다렸어도 아버지는 폭설 때문에 그날 밤 돌아오지 못했다.


 한밤중에 막내가 몹시 보채며 울고 있을 때, 사복차림의 두 사람이 들이닥쳐 이불을 걷어차며 아버지를 찾았다. 할머니가 “아들은 없소. 손녀딸이 아파 약을 지으러 갔소. 제발 돌아가시오.”라고 아무리 호소해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벽장까지 뒤졌다. 나는 이불 속에서 막내를 껴안고 떨고 있다가 잠이 들었다. 새벽에 깨어나서 보니 아이의 몸이 싸늘했다. 숙이가 숨을 쉬지 않는 것 같다고 했으나 어머니는 눈물만 흘리고 계셨다. 어머니는 동생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아침 일찍 한약을 지어가지고 돌아오셨다. 그러나 당신이 늦게 오는 바람에 막내가 죽었다며 자책을 하셨다. 그래도 할머니는 “막내가 아비를 살렸다. 이 험한 세상에서 차라리 잘 갔다.”고 했다. 나는 할머니의 그 말씀이 야속하게만 들렸다. “오빠, 오빠!” 하던 귀여운 다섯 살 배기 동생이 아니었던가.


 숨진 막내에게 예쁜 옷을 입히고 옹기 항아리 관에 묻었다. 그 자리에 나무로 만든 십자가를 꽂았다. 하늘나라에서 큰오빠도 만나고 부디 평안히 잠들라며 빌었다. 4년 전 맏형을 죽관(竹棺)으로 진외가 앞산에 묻었던 기억까지 되살아나 한없이 울면서 산을 내려왔다.


 휴전 협정으로 이제는 부역자들이 생사의 기로에 서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효골 들판에서 일을 끝내고 집에 오셨는데 서 정보과에서 “잠시 조사할 일이 있으니 함께 가자”며 연행해 갔다.


 이제 모두가 끝난 줄만 알았는데 또 무슨 일인가. 일주일이 지나고 3주가 되었는데도 아버지는 풀려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무슨 일로 조사를 받고 있는지 어머니는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마침 맏형이 하숙할 때 이웃의 정미소 집 아들이 서에 근무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어머니는 그를 찾아가 아버지의 그간 사정을 알렸는데 다음날 상세한 내용을 전해왔다.


 인공 기간에 피해를 당한 사람이 고발을 했는데 ‘자신이 아니고 아버지가 지시했다고’ 해서 조사 받고 고문도 당하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온갖 고문을 버티다가 견디기 어려워 그들의 요구대로 거짓 자백을 해버릴까 했으나 결국 아무 잘못이 없음이 밝혀져 누명을 벗고 풀려났다. 고문 후유증에 심지어는 똥물까지 마시면서 차츰 기력을 회복하셨다.


 험한 세상에서 아버지는 목숨을 부지했지만 처남과 아랫동서와 사촌형제들, 그리고 조카들도 전쟁 와중에 죽어갔다. 그러나 단순히 부역자라고 해서 죽어간 사람들도 분단과 전쟁으로 희생된 영혼들이다. 구천을 떠도는 영혼을 달래고 이제는 해원(解寃)하자고 아버지는 적어 놓으셨다.


 아버지의 비망록에는 사선을 넘는 부분이 소설보다 더 리얼하게 그려져 있었다. 여러 번 위험한 고비에서 기지를 발휘해 번번이 위기를 넘기셨다. 이순에 이르러서는 한 많은 지난 세월을 시조창으로 여일하시며 세월을 보내셨다. 구월에 나시어 시월 스무날, 여든두 살에 사세(辭世)하셨다.


 나는 당신의 혼이 담겨 있는 기록을 대하면서 오래 전에 고향 선산에 잠들어 계시는 아버지께 다시 한 번 무한한 존경과 사랑을 드린다. 아버지, 부디 영면하소서.


*한국작가회의, 소설회원. 한국문인협회 수필회원. 한국서예 전통서예 통일비림 초대작가.
*(사)평화통일시민연대 이사장. 통일을준비하는사람들 공동대표.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근묵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