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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행가문의 삶 (윤영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04-18 12:09
조회
1253

윤영전/ (사)평화연대 이사장


 효골의 문중 춘제(春祭)에서 선대의 효열비(孝烈碑)앞에 섰다. 내 고조 선대 조부모의 효와 열행에 대한 공적비다. 일찍이 광주지(光州誌)와 향교지에 효열기록과 함안대종회 족보와 호남편람에도 올라있다. 선대의 충효가전이 가훈이고 수백 년도 넘은 문중에서 직계조모 이하 삼대(三代)가 효행가문(孝行家門) 일원으로 살아오고 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조선조 성종 때의 행정구역으로는 광주군 효우(孝友)동이다. 무등산 자락으로 이어진 지명이 효천(孝泉)으로, 또한 효지(孝池)와 효덕(孝德)동이다. 1950년도부터는 초등학교 명칭도 효지(孝池)학교에서 효덕(孝悳)학교로 오늘에까지 이어 오고 있는 효골의 고장이다.


 이렇게 지명이 효(孝) 자(字)로 있어, 고을 이름을 효(孝)골이라 했다. 심지어 성(性)까지도 효골 윤 씨라 부르기도 했다. 효우동이나 효골이기에 효자 효녀 효부 효손의 기록이 광주고을의 자료집에 게재되어 있다. 효골에 나의 7대 조부 함안윤씨(咸安尹氏) 광훈(光訓)이 효자(孝子)로, 조모인 나주임씨(羅州林)가 열부(烈婦)로 기록되고 있다. 함안(咸安)윤씨는 파평(坡平)윤씨의 장자(長子)계 가문이기도 하다.


 효열 실행이 자료에만 있는 게 아니다. 60년 전, 어린 시절에 백부 추강(秋崗)과 부친 동강(東崗)이 선대의 효열비를 건립하려고 석물을 준비하고 비문을 짓고 쓰는 모습을 눈여겨보았다. 당시에는 석공을 정하여 몇 달이나 사랑채에서 숙식하면서 2천자가 넘는 비문을 손수 돌에 새기었다. 참으로 힘든 효열비 건립이었다. 요즘 같으면 기계로 7일이면 가능한 비문 작업이었다.


 거의 6개월 만에 효열비를 완성하여 대로에 세웠다. 많은 효골사람들이 비문을 보고, 지극한 효열의 사연에 감탄하기도 했다. 이에 우리 가문의 효열행이 널리 알려졌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후에도 3대 효열가문이 계속 이어졌다. 나의 양조모는 효열비 선대의 고손이 되는 며느리이다. 양반가에 시집와서 3개월 만에 부군의 급병으로 17살에 청상과부가 되어 67년을 사셨다가 운명하셨다.



사진 출처 - 경남도민일보


 재가(再嫁)하지 않고 양자를 입적해 8남매 손자녀를 양육하여 열녀로 표창되었다. 여기에 양자인 부모님도 생부모와 양부모에 효도하여 효자 효부가 되고 손자인 필자도 20년 전에 효자로 표창되어 지난해 파평윤씨 대종회에서 표창을 받았다. 또한 두 손자며느리가 효부와 열부로 표창 받아 직계로 3대가 7인의 효 가문을 이루었다.


 이렇듯 효골에 효 열행 후손들이 이어져갔다. 예전에 효부가 드물게나마 있었지만 현대에까지 이어져 온 것은 아무래도 지명인 효에 대한 연관성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바로 내 집안의 효행이기에 효행 표창을 받은 우리 가문은 그저 조신하며 살아가야 했다. 양조모의 오랜 수절과 후손들 양육은 아무래도 고조 시부모들의 행적에 영향을 크게 받았을 터이다.


 내 부친과 나의 효자표창은 물론, 손자며느리까지 효행을 이어간다는 것은 드문 일이다, 시대의 변화에 차츰 효행이 외면당하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충효가전의 유훈은 지켜가야 한다. 그러기에 효에 대한 실천을 은근히 독려한 면도 없지 않다. 필자도 백부와 부친이 선대의 효열비를 건립하는데 열심히 바라보았었다.


 한 세대 전에 효부열녀인 양조모님을 효골 도선산 광유재(光裕齋)옆에 이장하고 정성스럽게 열녀비를 세워드렸다. 5년 전에는 나주 봉황 선산에 부친의 효자비도 세웠다. 이처럼 효가 이어져 자랑스러운 가문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중압감이기도 하다. 가문은 조선조 성종 계비인 제헌왕후(齊獻王后) 윤비의 15대 후손이다. 양반가 시대도 아니기에 운신의 폭이 좁다. 허나 효는 필요덕목이 아닐까?


 효열의 후손들은 절제하고 겸손하며 행실에 있어서도 제약이 뒤따른다. 효는 친 조부모님에 대한 효도뿐만이 아니다. 형제간이나 집안 일가 간에는 물론, 이웃 간에도 효도는 마땅한 행실이다. “효자 집안에 효자 난다”고 하지만 “효자 집안에서 그런 불효 행실을 할 수 있느냐?”는 주변의 시선도 따갑다. 효행의 실천은 도덕과 윤리에 충실한 모범이기에 효행가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일 터이다.


 이제는 선대의 효열에 대한 기준과 현실의 차이가 크기만 하다. 가령 후손들 중에 예전 같은 청상과부로 남는 일이 쉽지 않다. 현대의 흔한 이혼들이 후손들에게 다가오고 있는 현실이다. 당사자들이 좀 더 신중하면 극단적인 결정을 쉽게 내지지도 않을 터이다. 사별이라면 어찌 할 수도 없다. 효행은 가화만사성의 근간이다.


 이제는 효열가의 기준을 달리하는 방법밖에 없다. 청상과부에게 절개나 정절을 지키라고 하기보다 효에 대한 정성을 다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간 양반에 대한 비난과 원성이 높았다. “양반이 밥 먹여주느냐? 돈이 없으면 양반도 없다. 돈이 제일이다” 라는 소리가 높더니 배금주의가 고개를 들었다. 너무나도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고 돈과 권력 앞에 무력한 사회이기는 하지만, 돈과 권력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나는 그동안 생각했다. 효열가문 후손의 삶은, 무엇보다도 윤리도덕을 바탕으로 실천하는 길이리라. 아무리 돈과 권력이 세상을 좌우 한다지만, 양심과 인간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정의와 진실 앞에 정정당당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부정과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공동선을 향한 길로 가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정의사회를 이루고 효의 실천에 다가가는 평화로운 사회가 오지 않을까.


 현대에 와서 효열에 대한 인식이 점점 쇠퇴하고 효를 행하려는 자에게도 부담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러나 효야 말로 오늘날의 우리사회의 가장 큰 덕목이요 버팀목이다. 효를 근본으로 알고 바른 행실로 가는 사회와 가정은 곧 평화와 화목을 이룬다. 도덕과 효보다 돈과 권력에 함몰되어 있는 사회와 가정은 공동선을 이루는데 큰 걸림돌이 된다.


 성년이 되어서 윤문대종회를 출입하면서 종훈이 “충효가전”이었다. 여기에 장자계 대종회장을 맡으면서 실훈을 “충효덕학”으로 정하고 효자 효부 열녀를 널리 표창했다. 갈수록 귀한 효와 열행에 대한 표창자 찾기다. 아울러 개인적으로 모교 초등학교에 효행장학생을 뽑아 매년 졸업식에 표창을 하면서 효행을 실천하고 있다.


 부족한 효자로 살고 있는 필자가 오늘의 효열에 대한 생각을 해보았다. 사라져 가는 효열정신이 구시대적 발상이 아닌, 살아가는 귀감이 근본이라고 믿는다. 삼대효열가문으로 살아가기가 순탄하지 않았고 앞으로 더욱 어려울 터이다. 그러나 그 길이 충효가문의 전통을 이어가야 하기에 어떠한 난관에도 효행을 실천해 나갈 것이다. 이 길이 효정신이 사라져가는 현실에 효 정신을 살리는 길이 아닐까.


  * 윤영전(尹永典) 아호: (九巖 孝崗) 당호: 전호당(傳孝堂)
    작가(수필 소설 서예) 칼럼니스트. 한국작가회의 회원
    저서: 수필집(도라산의 봄)소설집( 못다핀 꽃) 에세이집(평화, 아름다운 말)
            고희문집(인연,아름다운 만남) 수필선(강물은 흐른다) 구암가곡선집(CD)
    편저: (평화통일 삶을 살다) (한반도 평화통일디자인) (통준사 평화통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