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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 성스러운 것이다 (조광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03-14 17:43
조회
319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성(性)은 성(聖)스러운 것이다. 어리석은 성은 천박한 성으로 귀결되고, 성 외의 것으로 거래되는 성은 추잡한 성으로 노출된다. 천박하고 추잡한 성은 성의 세계를 위협하고 왜곡하여 성스러운 성의 불가능성을 유포시키는 독소다.


 성은 근본적으로 폭력적이다. 성스러운 것치고 폭력적이지 않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성스러움은 인격을 충분히 파괴시킬 때, 그런 뒤 인격을 새롭게 재탄생시킬 때, 그때 각자에게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인격은 근본적으로 사회적이다. 성스러움은 사회성을 초월함으로써 사회의 맹목성을 치유한다. 사회와 인격을 아예 떠나있는 곳에서는 성스러움이 없다. 성스러움은 항상 사회와 인격을 ‘먹이’로 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와 인격은 성스러움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성스러움 자체는 맹목적이다. 사회 역시 맹목적이다. 사회의 맹목성은 성스러움의 맹목성으로써 치유된다. 성스러움의 맹목성에는 희열과 그에 따른 환희가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격이 성립되는 조건은 사회다. 하지만 인격과 그에 따른 인권의 절대적 가치가 사회 자체로부터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권의 절대적 가치는 사회가 바탕으로 삼고 있는 성스러움에서 주어진다. 인격의 절대적인 권리 즉 인권은 성스러움과 결합되어 있는 희열과 그에 따른 환희의 필연적인 가능성에 있다.


 사회의 바탕으로서 작동하는 성스러움은 이미 늘 사회 속에 스며들어 있다. 그럼으로써 성스러움은 사회의 맹목성을 알게 모르게 눈치 챈 자들이 발악적으로 사회관계를 악용한 끝에 생겨나는 그 천박하고 추잡한 부패와 그에 따른 악취를 몰아내는 역할을 한다. 부, 권력, 명예 등을 둘러싼 사회관계가 얼마나 발악적이던가.


 사회는 성스러움이 자신을 파괴하고자 하는 측면을 주로 주목하고 자신을 치유하는 측면을 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는 알게 모르게 성스러움과 투쟁을 벌인다. 그 결과, 한 사회가 현실적으로 성스러움을 상실했다고 해서, 그 사회에서 성스러움이 근본적으로 제거된 것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사회가 성스러움과의 투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때, 그때 사회는 성스러움을 마치 납골당에 시신을 보관하듯이 따로 분리해 내어 종교를 비롯한 각종 이름을 붙여 법적으로 따로 관리한다. 일부일처제나 성매매도 그 하나의 이름이다. 그런 만큼 성스러움은 부패한 형태를 띠게 된다.


 성스러움 자체를 둘러싼 근원에서의 투쟁은 크게 성(性)과 신(神) 사이에서 생겨난다. 국가가 주권을 내세워 이 투쟁에 개입하는 것은 그 상층에서의 일이다.


 성스러운 성의 역사는 인류의 기원과 동일한 기원을 지녔다. 완전한 직립은 진짜 인간의 탄생을 알린다. 직립은 손을 만들었고, 손은 도구의 사용에 의해 하나의 욕망에서 새로운 다른 욕망을 만들어내도록 했다. 그런가 하면, 직립은 자궁 및 여성기 입구의 축소를 가져와 여성을 긴 기간 육아에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되게끔 했고, 아울러 남성의 목숨을 건 노동의 대가를 함께 분배받지 않으면 안 되도록 했다. 이를 매개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성을 통한 희열과 그에 따른 환희라고 하는 전혀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냈다. 생명을 중심으로 한 생존과 생식의 욕망이라는 하나의 욕망에서 관능의 욕망이라는 새로운 다른 욕망을 만들어낸 것이다. 생명에의 욕망에서 생명을 넘어서는, 때때로 생명을 아랑곳하지 않고 심지어 생명을 파괴하기까지 하는 관능의 욕망을 만들어낸 것이다.


 성스러움은 근본적으로 생명과 직결된 것이다. 생명을 가능케 하면서 동시에 생명을 불가능하게 할 때, 그 무엇은 성스럽다. 하지만, 우선 성스러움은 성스러움을 온몸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자들이 없이는 그 자체로 성립할 수 없다. 성스러움이 그 자체의 절대성을 갖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인간 없이는 성스러움은 없다. 성스러움 없이는 인간도 없다.


 생명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이중성에 의한 자연의 성스러움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 자연이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자연의 성스러움은 외적인 성스러움이었고, 관능의 욕망을 통한 성의 성스러움은 내적인 성스러움이었다. 이 둘이 한데 결합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신들은 예사로 육욕적이고 관능적이고 폭력적인 것이 이를 잘 나타낸다.



사진 출처 - 구글


 성스러움은 함부로 쉽게 대상화될 수 없다. 이름은 대상화하는 기본 수단이다. 성스러움이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면 성스러움은 대상화되어 급기야 마치 인간과 사회를 완전히 벗어나 있어 그 자체로 절대적으로 성스러운 것인 양 천상에 봉인된다. 성의 성스러움은 제대로 된 이름을 가진 적이 없다. 아니, 가질 수가 없다.


 성의 성스러움은 인간의 몸속 깊이 곳곳에, 인간들이 모이는 사회의 몸속 깊이 곳곳에, 인격이 성립하는 영역 깊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고 은폐되어 있다.


 성이 워낙 성스럽기 때문에 그 성스러움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일부일처제라는 관행적 제도 속에 성을 묶어 놓은 것이 아니다. 일부일처제는 생명의 장치이지 성의 장치가 아니다. 기원에서 보자면, 일부일처제는 생명의 보존을 위한 것으로서 그 자체 성을 관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성을 북돋우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일부일처제는 성을 관리함으로써 동시에 생명마저 관리하는 강력한 장치가 되었다.


 일부일처제는, 마치 신을 성당이나 교회당에 감금해서 한정시킨 것처럼, 성의 성스러움을 가정 감금해서 한정시킨다. 성이 생명의 자물쇠에 의해 잠긴 것이다. 하지만 성은 생명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고, 그래서 가정의 틈새로 흘러 바깥으로 나온다. 하지만, 그렇게 흘러나온 성은 이미 생명의 맹목성에 한껏 오염되어 부와 권력과 명예와 뒤섞여 어리석게 거래된다. 천박하고 추잡한 성이 이른바 ‘성폭력’이 되어 골방과 길거리에 넘쳐나고 심지어 가정으로 되돌아가 생명마저 더럽힌다.


 성교는 성의 목적도 도달점도 아니다. 성교는 성스러운 성의 필수적인 수단도 아니다. 성스러운 성의 정체를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곳을 향해 가는 길이 전혀 없는지 아니면 너무나 많은지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알몸을 성스러움의 현신으로 확인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성교를 일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인간이 성스러운 성을 포기하고서는 또는 성스러운 성을 함부로 재단해서 어딘가에 안치하고서는 천박하고 추잡한 인간일 수는 있으나 성스러운 인간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무도 성스러운 인간이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자신의 사회적 인격이 갖는 그 절대적 권리가 성스러움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누구나 성스러운 인간이기를 포기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살을 에는 듯 겨울의 폭풍이 매섭다. 지난 가을에 거둔 곡식들과 간간히 잡아 절여 말려놓은 고기들이 위안이 된다. 차가운 밤바람을 마다 않고 가운데 거대한 화톳불을 지피고자 다들 모인다. 어느덧 둘러앉은 악사들이 텅 빈 다양한 나무통들을 멋진 리듬으로 두들기자 다들 일어나 겹겹의 원을 그리면서 춤을 춘다. 그 중 몇몇은 속을 파내어 잘 말려 박제로 만든 짐승의 대가리를 뒤집어쓰고 있다. 다들 신비의 약초를 씹으면서 남녀노소 모두 모여 춤을 춘다. 몸속에서 알 수 없는 강렬한 기운이 올라온다. 두둥둥 타다닥 타닥타다닥, 점점 음악의 리듬이 절로 빨라진다. 하늘에서는 수없이 많은 별들이 춤추면서 내려앉고 거세지는 불길에서 터져 나오는 불티들이 지상의 별인 양 바람에 날리면서 모두의 몸들을 감싼다. 다소 멀리 떨어진 주변의 우거진 나무들과 풀들이 한껏 다가와 함께 도취된다. 다들 괴성을 질러대다 어느새 알 수 없는 신음에 이어 비명을 울린다. 멀리서 짐승들이 울부짖는 소리로 화답한다. 서서히 다들 제 스스로를 벗어나면서 모두가 모두를 향해 알몸의 신들이 된다. 수십 수백 만 년 전부터 우리 인간들이 성스러운 성을 향해 초월해 가고자 했던 것이다.


 성을 둘러싼 모든 투쟁의 밑바탕에는 성의 성스러움을 향한 바람이 작동하고 있다. 여성해방 투쟁이건, 동성애자 권리 투쟁이건, 성 매매자 권리 투쟁이건, #미투 및 #위드유 투쟁이건, 그것들은 모두 다 저 밑바탕에서 성의 성스러움의 위력이 분출된 것이다. 현실적으로 그런 측면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인데, 만약 그것이 사회의 틀 내에서 생존을 중심으로 한 생명에의 욕망으로 회귀하려는 속성을 띠고 있다면, 그런 만큼 기존의 거래 관계 속으로 편입되고 마는 것이다. 성의 성스러움은 근본적으로 생명을 넘어서면서까지 제 자신을 분출하기 때문이다. 인간 생명이 신성한다면, 그 바탕에 성의 성스러움이 작동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