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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노동/노동자성’의 재자각과 그 너머 (김재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5:47
조회
396

김재완/ 방송대 법학과 교수


인간은 필요하고 더 나은 무엇인가를 향해 우리의 세계와 실존을 만들어 간다. 그러한 세계 형성과 구축의 역사는 ‘인간 노동의 역사’라고도 감히 말할 수 있겠다. 노동의 역사를 통해 형성된 우리의 세계는 항상적으로 변화하며 그 방향은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이어진다. 인간의 노동은 수고를 요구하며 이를 통해 결과물들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한편 그에 조력하기도 한다. 어원적으로도 고대 그리스어에서 'ponos'는 수고의 측면을, 업적 또는 성과물을 'ergon'으로 지칭했다. 로마에서는 노예들이 짐을 지고 힘겹게 가는 모양을 ‘laborare’라고 불렀는데, 영어의 ‘labour’의 어원이 되었다. 또한 로마에서는 노예와 제대로 노동을 하지 않는 자들을 벌하고 옥죌 때 사용했던 일종의 멍에를 ‘tripalium’이라고 표현했으며, 이는 프랑스어 ‘travail(노동)’과 스페인어 ‘trabajo(노동)’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업적 또는 성과물을 로마에서는 ‘opera’라고 하였고, 이것은 프랑스어 ‘oeuvre(제작물, 창작물)’가 되었다. 한편 이것이 점차 의미 분화를 하면서 ‘창의적/자발적 노동자’를 지칭하는 ‘ouvriers’와 ‘수동적/단순 노동자’를 지칭하는 ‘laboureurs’로 구분되기도 했다. 아직도 영국에서는 ‘labour’를 ‘수동적/고통적 노동’으로, ‘work’를 ‘자발적/창의적 노동’으로 그 의미에 차이를 두고 인식하고 있다. 라틴어에서는 어떤 것을 산출해내는 것을 ‘facere’, ‘faber’라는 말로도 나타냈는데 이로부터 'faktum(사실)', 'gemachte(만들어진 것)'이라는 말들이 생성되었다. 이들은 공장을 지칭하는 ‘fabrik(영어로는 Factory)’, 제작이나 제조를 지칭하는 'fabrikation(영어로는 fabrication)'을 만들어냈다.


오늘날 우리의 노동/노동자문제는 인간 노동의 역사성에서 어떤 것을 산출해내는 수고와 그 프로세스로서의 노동성을 희석시킨 채, 노동자를 옥죄는 멍에로서의 자본 우위적 지배체계를 형성하고 구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고 감히 주장하고 싶다. 인간의 노동은 우리 세계를 유지하고 존속하는 것에 필요한 소비재로부터 다음 세대가 노동하는 데에 있어 토대가 되는 제반 생산물들까지도 만들어내는 속성을 가진다. 노동은 인간 생활의 재생산을 위한 전제조건을 만들어내며, 이와 함께 노동자의 노동에 대한 내외적 인식론의 자각을 항상적으로 불러일으키고 노동자가 인식했든 하지 못했든지 간에, 노동은 그 자체의 활동으로서 새로운 사회적 환경들을 만들어내고 기존의 사회적 환경들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현재의 세계를 변혁하게 만드는 목적 지향성을 가진다. 그리고 그 변혁의 방향은 폭력적이고 전체 획일적인 자본 우위적 지배체계의 제도적 멍에의 사슬들을 제거하여, 인간 존엄성에 바탕을 둔 사회적 공동체로서의 인간/인간성을 회복하고 존속하는 상호 ‘인정(認定)’으로 향해야 한다.


depositphotos_70176851-stock-illustration-group-of-people-worker-from.jpg사진 출처 - depositphotos.com


일반적으로 정책과 법은 사업/사업자, 정치/정치가, 공무/공무원, 교육/교육자 등과 대항적으로 노동/노동자를 구분 짓는다. 때문에 일반인들의 인식구조도 그 틀에 갇혀서 사고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그러나 그러한 구분은 각 영역과 주체, 대상들에 대한 지배와 규율의 편의성을 위한 것일 뿐이다. 실질적인 내용은 사업(노동)/사업자이면서 사업노동자성, 정치(노동)/정치가이면서 정치노동자성, 공무(노동)/공무원이면서 공무노동자성, 교육(노동)/교육자이면서 교육노동자성을 가진다. 인간 노동과 그 역사성은 수고를 통해 제작물/제도들을 산출해내고, 이것을 통해 현재와 미래의 우리 실존과 세계를 변화해 나아가는 것을 구성본질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세계의 모든 사회적 환경들은 자발적이든 수동적이든지 간에 모든 노동자의 노동 프로세스에 토대를 둔 목표물이자 결과물이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형식적인 지위나 계급의 외관적인 틀만을 강조하여 노동/노동자성을 애써 부인하고 거리를 두어 구분 짓는 것은 온당치 못한 것이다. 이러한 형식적 구별인식이 노동/노동자문제를 더욱 심화시키고 확대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시대의 정의의 저울은 노동/노동자를 심하게 들어 올려놓고 있다. 그 평형을 맞추는 첫 출발점은 저울의 반대편에 있다고 인식하는 모든 영역과 사람들의 노동/노동자(성)을 본질적으로 다시 자각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작금에 적폐 되어 있는 법적 사회적 구조들을 청산하고, 정의로운 방향으로 변혁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글은 2017년 1월 1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