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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민주주의적 파문이 요구된다 (조광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5:41
조회
290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1.
인간 삶에서 기본이 되는 두 축은 에너지와 소통이다. 에너지는 인간 삶의 필요조건이고, 소통은 인간 삶의 충분조건이다.

2.
개인에게서 에너지는 생명력으로써 드러나고, 사회에서 에너지는 생산력으로써 드러난다. 각자는 사회적 존재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개인적 생명력은 사회적 생산력의 요소적인 원천으로 작동하고, 사회적 생산력은 개인적 생명력의 지평적인 지반으로써 작동한다. 하지만 각자가 사회적 생산력과 자신의 개인적 생명력이 정규적인 방식으로 비례한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사회 체제의 구조와 성격에 따라 그 비례 관계는 확 달라진다. 심지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이 오히려 자신의 생명력을 훼손시켜 약화시킨다고 여길 수도 있다. 사회적인 평등과 불평등의 지수는 사회적 생산력이 사회 구성원들의 생명력을 강화하는 데 얼마만큼 고르게 기여하는가에 달려 있다. 이는 당연히 분배와 관련된다. 사회적인 평등과 불평등은 개인적 생명력을 원천으로 해서 유지되는 사회적 생산력의 결과로써의 열매를 얼마만큼 고르게 분배하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다들 알다시피, 이를 정치경제학에서는 생산 관계라고 일컫는다.

사회적 생산력을 강화하는 데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개인들의 생명력이지만, 이러한 생명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에너지 중심의 기계기술의 발명과 발달이 요구된다. 증기기관, 엔진, 모터 등으로 이어지는 에너지 중심의 기계기술의 발달은 그 이전의 사회적 생산력과 아예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사회적 생산력을 높였다.

그 과정에서 각자가 지닌 생명력은 사회적 생산력의 근본 원천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사회적인 기계기술을 활용하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인 양 취급되었다.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왜곡된 사회 체제의 구조와 성격에 의해 사회적 생산력이 배타적 이윤의 창출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쪽으로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이윤과 기술이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결합되어 과잉의 속도로 상호상승의 긍정적 피드백의 과정을 추진하는 과정을 거쳤던 것이다. 모터가 쾌속으로 돌아가는 그 모양으로, 사회 전체가 이윤 창출을 위해 최대한 높은 속도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과잉의 사회적인 속도에 휘말려버린 개인들 각자도 자신의 생명력을 오로지 배타적인 이익을 위한 방향으로 투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이를 활용하여 사회 전체는 더욱 더 이윤을 중심으로 과속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각자는 자신의 생명력을 각자의 존재가 지닌 의미와 가치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활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기회를 박탈당하고 그 방향이 비틀어진다. 그럼으로써 심지어 각자가 자신의 생명력을 강하게 발휘하여 활용하는 만큼 오히려 자신의 존재가 지닌 의미와 가치를 상실하는 쪽으로 치닫게 된다. 개인의 특수성에 따라 이러한 사회 전체의 방향을 역행하는 경우도 물론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심지어 그렇게 역행의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개인들의 활동마저도 이윤과 이익, 즉 부를 중심으로 한 사회 전체적인 흐름에 다시 흡수되기 일쑤인 것이다.

3.
사회적 생산력과 개인적 생명력은 개인과 사회가 선순환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 나름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일 뿐, 그 자체 목적은 될 수 없다.

당연하다시피, 개인들이 모여 사회를 형성한다. 사회의 일차적인 역할은 개인들 간의 상호부조를 통해 각자의 생명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역할만으로는 제대로 된 사회로써 기능을 다한다고 할 수 없다. 사회의 진정한 역할은 개인들 간의 수평적인 상호표현과 상호이해를 통해 각자가 타인들과 수행하는 소통의 폭을 확대하고 깊이를 심화시키는 데서 성립한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사회는 소통의 기술들을 개발해 왔다. 말과 글, 전설과 신화, 축제와 종교, 시와 음악과 회화와 조각, 연극과 오페라, 필사와 인쇄, 사진과 영화, 우편과 전화, 신문과 잡지, 라디오와 텔레비전, 컴퓨터와 인터넷, 인공위성과 스마트폰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술들을 개발하여 발전시키고 활용해 왔다. 그 중에 뺄 수 없는 사회적 소통의 기술이 정치다. 법치와 민주주의를 개발하고, 보편적인 국민 교육을 개발하고, 관료제적인 행정을 개발했다.

이들 소통의 제반 기술들을 조금만 생각해 보면, 소통이 에너지와 얼마나 다른가를 쉽게 알 수 있다. 에너지 기술에서 파악할 수 있듯이 에너지는 수단이다. 이에 반해, 여기 소통의 기술들을 통해 얼마나 다양한 인간 삶의 내용들이 흘러넘치는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듯이, 소통이야말로 그 자체로 인간 삶의 의미와 가치를 실현해 나가는 활동이며 목적이다. 그런 점에서 에너지가 인간 삶의 필요조건인 데 반해, 소통은 인간 삶의 충분조건인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내가 얼마나 어떻게 수평적인 동등성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다양하게 그리고 깊이 있게 소통하는가에 따라 내 존재의 의미와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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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허핑턴포스트


4.
그러고 보면, 각자가 자신만의 배타적인 내면적 고유 영역을 형성하여 누리는 것만으로는 결코 인간다운 삶을 누린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일러주는 것이 소통이다.

왜곡된 사회 체제로 인해 사회 전체가 이윤과 이익 즉 부를 중심으로, 게다가 과잉의 속도로 진행되다보니, 각자가 자기 나름의 배타적이고 내면적 고유 영역을 형성하는 것이 마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데 긴급한 요청인 것처럼 여겨지게 되고, 그런 탓에 배타적인 자신만의 내면적 고유 영역의 확보와 향유야말로 인간다운 삶의 의미와 가치를 꾸려나가는 외길인 양 오인되었을 뿐이다. 이는 배타적인 부를 중심으로 사회가 굴러가는 것과 더불어 사회적으로 참다운 소통의 길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음을 일러주는 또 하나의 사회적인 증좌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각자가 사회적으로 배타적인 부를 추구하는 것과 자신만의 배타적인 내면적 고유 영역을 추구하는 것이 비록 서로 대립된다고 할지라도 일종의 동전의 양면처럼 작동하면서 서로에 대해 알리바이 역할을 할 소지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배타적이고 내면적인 고유 영역을 확보하고자 할 때, 그 배타성 역시 배타적인 부와 연결되면서 왜곡되어 나타나는 것이 권력이다. 철학자 하버마스가 적절히 제시한 것처럼 부와 권력은 철저히 왜곡된 소통의 방식이다. 부와 권력은 배타적인 상대적 격차를 전제로 해서 성립한다. 부와 권력이 사회적 소통의 핵심적인 수단으로 작동할 때, 진정한 소통을 중심으로 한 인간다운 인간의 삶을 사회적으로 구현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5.
제대로 된 진정한 소통은 사람들 간에 수평적인 동등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폭과 심오한 깊이를 일구어 낼 수 있을 때 성립한다. 이러한 진정한 소통을 위해서는 부와 권력을 중심으로 한 왜곡된 소통을 몰아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사회적 생산력에 의거한 각종 에너지를 평등하게 분배하는 것이다. 에너지가 소통의 필요조건이기에 에너지의 평등한 분배가 없이는 그런 만큼 그렇게 불평등하게 배분된 에너지를 사회적 기반으로 삼아 배타적인 부와 권력이 소통의 핵심 수단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서로 소통할 수 있는 폭과 깊이를 지닌 소통의 내용들을 최대한 다양하게 개발하여 서로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배타적인 부와 권력에 대한 욕망보다 상호 동등한 수평적인 소통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한껏 공유하여 발전시키고 그러한 발전을 향유하는 데 대한 욕망이 사회적으로 더욱 강화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일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 바로 통치 행위다. 이러한 일을 도모하기 위해 모두가 민주주의 제도라는 사회정치적인 소통의 기술을 개발했고, 이를 통해 모두가 진정한 소통을 더 효율적으로 잘 하기 위한 새로운 민주적인 소통을 통한 통치 행위를 설정했고, 또 이를 위해 민주적인 선거 제도를 통해 임시로 통치 행위를 맡아 진정한 사회적 소통이 확산되고 더욱 강화될 수 있도록 책임과 의무를 다할 수 있는 자들을 선발하여 일을 맡긴 것이다.

그런데 만약 통치 행위를 부와 권력을 중심으로 한 철저히 왜곡된 소통의 방식을 더욱 강화하고 심화시키는 데 활용한다면, 그러한 통치 행위를 하는 자나 집단은 사회적인 이른바 공공의 적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그러한 행위를 하는 자나 집단은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파문(excommunication, 소통 바탕으로 내몰아 버림)시켜야, 즉 소통 공동체에서 아예 제외시켜야 마땅하다. 말하자면 ‘민주주의적인 파문’을 단행해야 한다.

수단일 뿐인 에너지를 인간 삶의 근본으로 삼고, 게다가 불평등하게 편중된 배타적인 에너지의 결과물인 배타적인 부와 권력을 인간 삶의 근본으로 삼아, 진정한 인간다운 삶인 진정한 소통을 백안시하다 못해 아예 망각케 만드는 자들과 그러한 자들을 용인하는 사회는 근본적으로 반민주적이며 범죄적인 사회가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사회를 만들어 강화해 온 역사는 반민주적이고 범죄적인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민주주의적인 파문’을 통해 이러한 범죄의 사회와 역사를 단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