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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올림픽의 비극적인 위대한 계시 (조광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5:35
조회
281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 더 힘차게, 더 정교하게, 더 조화롭게, 더 정확하게, 결국에는 더 아름답게, 인간의 맨몸으로 수행할 수 있는 그리고 표현할 수 있는 최고도의 경지를 추구하면서 세계 각지의 젊은이들이 모여 경연을 펼친다. 적어도 지난 4년 동안 말 그대로 뼈를 깎는 노력을 경주하여 훈련함으로써 해당 종목에서 타고난 인간 몸의 잠재성을 누가 최고도로 실현했는가를 경쟁적으로 실연해 보인다. 지구 반대편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중계 장면을 보는 데도 과연 인간의 몸이 저렇듯 뛰어나고 탁월할 수 있는가를 실감하면서 감탄해마지 않는데, 경연이 펼쳐지는 현장에서 직접 관람하면 그 감흥의 밀도와 강도가 얼마나 더할 것인가 싶다.


올림픽의 모든 종목에서는 그 어떤 기계적인 장치도 동원되지 않는다. 동원되는 각종 도구들은 제 스스로는 그 어떤 작동도 하지 않고, 오로지 인간의 맨몸에 의해 직접 다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순전히 수동적인 것들뿐이다. 이번 러시아의 도핑 문제나 박태환의 우여곡절의 사건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올림픽의 근본 전제는 인간이 타고난 순수한 맨몸의 자연성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올림픽이라는 온 인류의 스포츠의 제전(祭典)이 갖는 유독(惟獨)한 매력은 바로 이같이 일체의 인공적인 기계성, 특히 기계의 자동성을 완전히 벗어난 상태로 인간 몸이 지닌 순전한 위력들을 온갖 방식으로 표현해 낸다는 데 있다고 믿는다.


올림픽이 갖는 매력에 대한 이러한 필자의 믿음은 현실 세계가 이른바 고도과학기술로써 전혀 새롭게 규정됨으로써 ‘맨몸으로서의 인간’과 ‘맨몸에 입각한 인간성’이 거의 망실 내지는 삭제되다시피 되고 말았다는 위기의식과 짝하고 있다. 컴퓨터-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한, 스마트폰, 네비게이션, 사물 인터넷, 증강현실, 빅 데이터 분석, 인조지능 및 인조감정 등과 결합되는 각종 로봇들이 전 세계를 뒤덮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야말로 몸이 증발해버린 시대가 된 것이다.


“몸이 증발하고 있다.” 필자는 불행히도 이 명제를 제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자동화된 기계의 세상, 자신의 몸을 자동화된 기계의 인공지능적인 체계에 맞추지 않으면 의미 있게 생존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은, 클라우스 슈밥이 제시한 이른바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대한 몸 철학적인 명제다. 제리 카플란은 ‘인공지능 시대의 부와 노동의 미래’라는 부제를 단 책 제목을 ‘인간은 필요 없다’라고 달았다. 인간은 필요 없다는 카플란의 생각이 사회경제적인 차원에서의 것이 몸이 증발하고 있다는 필자의 생각은 존재론적인 차원에서의 것이라 점에서 다르긴 하지만, 지시되는 내용이 섬뜩하기는 둘 다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로서는 ‘필요 없는 인간’ 또는 ‘증발하는 몸’ 등, 현재 진행형의 전 인류적인 사태에 대한 진단에 대해 불행하다고 또는 비극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지척에서 들이닥치는 열차 앞에서 맨몸으로 팔을 벌리고 마주 서서 “나 돌아갈래!” 하고서 외치던 영화 <박하사탕>의 남자 주인공의 절규가 바로 우리 모두의 절규가 아니겠는가, 하는 상념이 함께 떠오른다.


그런데 “과연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하는 물음과 함께 “과연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이 떠오르면서, 설사 돌아갈 곳이 있다 할지라도 돌아갈 수 없을 터이고, 돌아갈 수 없기에 돌아갈 곳이 없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일종의 종말론적인 상념이 압박해 온다.


오늘이 8월 17일, 리우 올림픽이 아직 한창이다. 몸이 증발하고 인간이 필요 없는 종말론적인 상황을 맞이하여 올림픽이 어떤 묵시록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닐까, 올림픽이 혹시 인류 구원의 한 가닥 암시적인 실마리라도 던져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서 잠시 기대를 걸어보는가 싶은 순간, 절망에 가까운 현실 인식이 확 다가온다.


맨몸의 운동감각적인 순수한 세계를 따로 떼 내어 올림픽이라는 대대적인 괄호 속에 집어넣어 마치 골동품을 완상(玩賞)하듯이 임시로 잠시 온 인류가 휴식을 취할 뿐, 올림픽이 끝나면 곧바로 누가 더 먼저 더 빨리 더 정확하게 더 깊숙이 더욱 강력한 인공지능을 비롯한 고도과학기술의 세계 속에 들어가 부와 권력을 획득할 것인가를 치열하게 다투어야 할 것이다.


맨몸의 운동감각적인 세계는 인위적이기 이를 데 없는 환상의 세계가 되고, 인공지능적인 탈(脫)운동감각적인 가상의 세계가 오히려 자연스럽기 짝이 없는 실재 현실의 세계가 되어 온 인류를 지배하는, 정확하게 뒤집어진 의미의 체계가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고도로 자동화되어 정밀하기 이를 데 없고 그래서 오히려 최고도로 반(反)인간성을 한껏 드러내지 않고서는 발달할 수 없기에 결국에는 인간의 살아있는 맨몸들을 공략하여 볼모로 삼는 오늘날의 고도과학기술의 체계, 더군다나 그 체계가 본격 자본주의의 이윤증대 중심의 체계 및 사드 미사일을 정점으로 하는 군사기술의 체계와 정확하게 결합하여 복합통일의 거대체계를 이루고 있으니, 여기에 인간 또는 인간성이라 일컬을 수 있는 운동감각의 근원적인 영역은 아예 뿌리 뽑히고 있는 것이다.


20090406.01100121000009.01M.jpg사진 출처 - 경향신문


이런 현실 인식의 생각을 하게 되면서 올림픽의 의미를 그야말로 고대 그리스 올림픽의 정신을 바탕으로 되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말하자면, 비극적으로 전개되는 온 인류의 역사적인 존재 때문에 자연의 존재 전체를 향해 제(祭)를 올리는 것이 바로 올림픽이라는 생각이다. 올림픽은 순수한 맨몸이 아니고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감각운동의 세계를 온 인류에게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맨몸의 감각운동의 세계 즉 순수 자연의 세계야말로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가장 탁월한 세계임을 웅변하는 인류 전체의 ‘제전’(祭典)인 것이다. 정치경제적인 배후의 국가적인 경쟁과 자본주의적인 음모의 구도를 짐짓 싹 제거하고서 보면, 올림픽은 종말론적인 반(反)인간의 시대를 맞이한 온 인류가 모여 잃어버린 자신들의 순수한 인간성을 되살리고자 순전하기 이를 데 없는 자연의 맨몸들로써 그야말로 애원하듯 빌면서 온갖 형태의 제(祭)를 올리는 것으로 다가온다. 말하자면, 올림픽에 참가하면서 올림픽을 관람하면서 온 인류는 암암리에 계시를 받는다.


도구 사용자는 도구를 닮게 된다는 말이 예부터 전해져 온다. 예컨대 자율주행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 자동기계로서의 인간으로 변해갈 것이라는 이야기다. 온갖 자동기계들이 생산과 소통의 작업 현장에서 다양하게 활용되면, 그 덕분에 노동자인 우리 인간들은 더 자유로워지고 더 시간적인 여유가 많아지고 그럼으로써 제 자신의 존재를 더 깊고 넓게 향유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 왠지 사태는 오히려 정반대의 과정을 밟고 있는 것 같으니 어떻게 된 것인가?


핵심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고도의 자동장치 및 구조적인 시스템이 너무도 강력하게 깊숙이 그리고 폭넓게 치고 들어와 사람들을 오히려 시스템 자체가 굴러가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인 양 부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모든 고도과학기술들이 그런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테러나 폭동 그리고 각종 심각한 인사 사고들은 어쩌면 이처럼 막다른 단단한 벽을 향해 고속으로 치닫는 반(反) 내지는 탈(脫) 인간적이고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집단무의식적인 반발일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일체의 반(反)인간적인 매개 장치들을 제거한 상태로 맨몸과 맨몸이 부닥치면서, 운동감각적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서로의 자연적인 생명력을 한껏 느끼면서, 그럴수록 서로의 생명력을 극단적으로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올림픽의 각종 장면들이 어찌 감동적이지 않겠는가. 비록 종말론적인 비극의식이 가미된다고 할지라도. 한반도 남쪽 미군의 사드 배치의 결정에서 드러나는, 인간 생명의 근본적인 말살을 가능적으로 염두에 둔 탓에 인간 생명을 살린다는 핑계를 대지 않을 수 없는 종말론적인 비극의식이 가미된다고 할지라도.


이 글은 2016년 8월 2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