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수요산책

‘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제주살이 1 - 시골로 왔어요, 진짜 시골 (정보배)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07-25 16:18
조회
826

정보배/ 출판 기획편집자


 벌써 여름이다. 제주에 내려올 때만 해도 아직 외투를 벗지 못했고 어승생 근처에서 눈썰매를 탔다. 서울에서 산 28년 동안 가장 추운 겨울이었고 제주 역시 그랬다고 한다. 5개월은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인데 여러 일을 겪다 보니 벌써 제주에 몇 년은 산 것 같은 기분이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제주에 이주해 적응 중이니 ‘(외지인이) 제주에서 (적응하며) 사는 이야기‘를 하는 수밖에. 회사에 입사하면 처음 몇 달간 가장 질문이 많이 생긴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곳에 이사 와서 적응하려고 신경 써서 눈귀를 밝히고 있는 이주 초창기에 가장 많은 것을 듣고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가족이 집을 얻은 마을은 애월읍 상가리이다. 마을에 변변한 슈퍼마켓도 없고 관광객이 들를 만한 곳이라고는 카페 하나, 음식점 하나 정도. 그러니 외지 사람들은 거의 다니지 않는 조용한 시골마을이다. 마을에서 매해 포제를 지내는 포제단과 400년 된 보호수가 집 건너편 언덕에 있고, 집 근처 리사무소로 걸어가다 보면 한라산이 훤히 바라보인다. 집에서 시우 학교를 가려면 리사무소 마당을 가로질러야 한다. 최근 폭염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매일 아침 학교에 걸어갔는데 거의 그 시간에 할머니들은 경로당으로 걸어오시고 할아버지들은 나무 밑 의자와 정자에 앉아 계신다. 열심히 인사를 하면서 다니긴 하는데 우리 얼굴을 기억하시는지 어떤지 잘 모르겠다. 학기 초에는 한 할아버지가 시우에게 인사 잘한다고 용돈을 주시기도 했다.


 시우가 입학한 학교는 외지인들에게 사진 찍기 좋은 학교로 유명한 더럭초등학교이다. 작년까지 분교였으나 올해부터 초등학교로 승격됐다. 벌써 몇 해 전 전교생이 60명을 넘었으나 전교생이 100명을 넘은 올해 초등학교가 됐다. 제주행이 정해지고 난 뒤에는 어느 지역으로 갈지, 어떤 집으로 갈지를 결정해야 했다. 친구가 사는 애월을 선택한 후에는 아이가 학교에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의 집을 구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학교가 더럭초등학교였다. 가장 큰 이유는 학교가 한쪽 면을 제외한 3면이 도로로 둘러싸여 있고 그 도로들로 대형 덤프트럭이 수시로 지나다닌다는 것과 덤프트럭들보다 더 많은 수의 관광객이 학교를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든다는 점이다. 나의 기준으로는 학교 주변환경이 위험하고 번잡한데다 학교 부지도 상당히 작아서 늘어나는 학생수를 수용할 확장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랬지만 결국 구한 집은 그 학교를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상가리 집이다. 학교에 대한 걱정스럽고 못마땅한 부분들은 전혀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지만, 집에서 학교까지 아이 걸음으로 10분이면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넓고 예쁘다. 이른 봄부터 동백 꽃길이었다가 동백이 질 무렵 벚꽃이 피고 버찌가 익어 떨어지면 수국이 피기 시작한다.



더럭초등학교
사진 출처 - 경향신문


 평소 마을공동체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집과 직장이 멀리 떨어져 있는 도시 노동자에게 과연 그것이 가능한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공동육아를 할 때도 조합원들이 어린이집이 있는 그 동네에 살지 않고서 마을과 어울려 공동육아를 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도시 노동자들이 각자 사는 곳에서 마을공동체 생활이 가능하려면 말 그대로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 직장인들의 평균 퇴근 후 가질 수 있는 여가시간을 고려하면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않나 싶다. 읍내도 아니고 면사무소가 있는 곳도 아니고 리사무소가 있는 곳. 오래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있던 곳. 과연 제주 시골의 마을공동체란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이사하고 일주일 내에 옆집 뒷집에 인사는 했는데 경로당에 인사를 하러 가야 하는 건지, 이장님한테 이사 왔다고 인사를 해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2주가 흘렀다. 마을공동체는커녕 동네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나날이 흐르다 딸의 입학식 날이 되었다. 더럭초등학교 승격 축하식도 입학식날 열렸다. 입학식 전후로 여러 방송국에서 시골 분교가 초등학교가 된 더럭의 사례를 취재해 갔다. 아이들 수가 급격히 줄어든 요즘 학생수가 꾸준히 늘어나 분교에서 초등학교로 승격된 시골 학교는 정말 특이한 경우이다. 입학식을 마치고 리사무소 옆 마을도서관에 들렀다. 이사 와서 갈 곳 없어 마을 이곳저곳 산책할 때 들렀던 곳인데 작지만 아이들이 책 읽기에 편안하게 잘 정리된 공간이었다. 그날은 사서가 있어서 마을도서관(정식 명칭은 상가리 새마을 작은도서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올해 리모델링을 했고, 사서들이 하루씩 자원봉사로 활동하고 있는데 최근 한 명이 그만두어 본인이 이틀을 도서관에 나와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이사 온 뒤 집 근처인 이 도서관 옆을 오가며 시우가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해서 나도 모르게 “그럼, 제가 하루를 맡아도 될까요?”라고 겁 없이 사서를 자청하게 되었다. 이 작은도서관이 올해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