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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점령 50년, 국제사회의 역할 (마흐디 압둘 하디)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6:00
조회
412

마흐디 압둘 하디/ 팔레스타인 국제문제연구소장
(Mahdi Abdul Hadi, Head of PASSIA, http://www.passia.org)


□ 1947년 유엔의 팔레스타인 분할계획이 유대민족고향을 건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서 국제사회의 역할을 재검토할 때,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 사이에 존재하는 오늘날 분쟁의 뿌리를 먼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 분쟁은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중동역내 전체 문제이기도 하다. 1914년부터 1945년까지, 유럽, 미국과 소련은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 고향 건설이라는 시온주의자 운동의 목표를 수용하였다. 1916년 사이크스-피코 협정은 오스만제국의 아랍지역을 다양한 영국과 프랑스 통치 지역들로 나누었다. 1917년 밸푸어 선언은 팔레스타인에서 유대민족 고향 건설을 지지하였고, 1920년 산레모회의는 팔레스타인, 트랜스 요르단, 메소포타미아(이라크)에 대한 위임 통치권을 영국에게 할당하였다. 오스만제국 붕괴 이후, 킹-크레인 위원회는 아랍인들의 희망 사항을 조사하면서, 1919년 팔레스타인으로의 무제한 유대이민과 시온주의자 계획이 끼치는 영향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그러나 킹-크레인 위원회 보고서의 권고사항은 실행되지 않았다.


반면, 이러한 많은 시도들은 아랍지도자들과 저명인사들로 하여금 시온주의자 운동의 목표를 용인하도록 만들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을 우회하였다. 영국위임통치 시기에, 팔레스타인인들과 유대인들이 함께 평화롭게 살 수 없었고, 1930년대 필 위원회, 우드헤드 위원회 등 수 많은 위원회들이 팔레스타인을 두 국가로 분할하는 안을 제안하였다. 최종적으로 1947년 11월 29일 팔레스타인 분할 계획으로 유엔 총회 결의안 181호가 통과되었다. 이 결의안은 팔레스타인을 유대국가와 아랍국가로 분할하고,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을 특별히 국제 통치를 받는 독립적인 실체로 두면서, 사실상 시온주의자들이 열망해온 유대 민족 고향을 건설하였다.



□ 수치스런 50년 점령이후, 이제 국제사회는 국제법을 준수해야 한다.


1948년 이스라엘 국가 건설이후, 1967년 6월 이스라엘이 서안과 가자를 점령할 때까지, 국제사회의 노력들은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 사이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것이었다. 팔레스타인의 대의는 주변부로 밀려났고, 난민문제, 보상과 재정착으로 해결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인들은 점차 아랍 국가들로부터 ‘구원’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특히 1964년에 팔레스타인인들의 공식 대표로 PLO를 창설한 이후). 국제사회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역내적 국제적 차원을 깨닫기 시작하였고, 1970년대 동안에 느리지만 점차 PLO를 승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냉전의 현실은 많은 국제적인 외교를 허락하지 않았고, 아랍-이스라엘 분쟁은 당시의 양극 체제의 세계질서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소련은 외교적, 군사적으로 아랍인들과 한 편이었고, 서구 국가들은 확고하게 이스라엘로 치우친 정책을 폈다. 공산주의와 소련권의 붕괴는 대체로 제1차 인티파다와 동시에 발생했고, 이 인티파다의 메시지는 “우리는 여기 있을 것이고, 우리는 공존을 원한다”였다. 이러한 상황은 유럽 국가들을 고무시켜서 두 국가 사이의 문제 해결을 추구하는 접촉과 대화를 촉진하는데 연루되도록 만들었다.


1994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창설이후, 국제사회의 주요한 역할은 원조였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자금 지원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지만, 그 원조는 이스라엘이 부과한 무역 제한과 자원에 대한 접근 제한 조치를 감추는 무화과 잎이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접근 제한 조치는 수 년 간에 걸쳐 팔레스타인 경제의 생산 능력을 침식하였다. 국제적인 연구 성과들이 보여 주듯이, 이스라엘의 접근 제한 조치가 없었다면, 원조 필요성은 상당 부분 줄어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오늘날 팔레스타인에 대한 원조는 개발 지원을 거의 완전히 무시하고, 예산 지원으로 사용된다.


국제사회는 또한 안보분야 발전을 위하여 막대한 양을 투자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과 안보협력을 하도록 압박한다. 이스라엘과의 안보 협력은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에서 매우 논쟁적인 문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도시와 마을에 대한 이스라엘 보안대의 침략이 점점 증대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팔레스타인 안보는 논의에 적절한 요소가 아니라고 간주된다.


특히, 오슬로 협상 이후, 국제 사회의 역할은 원조 산업의 형태를 취했다. 국제사회는 그들 눈앞에서 펼쳐지는 부정의를 이야기하거나, 또 하나의 보고서 이상의 더욱 결정적인 행위와 함께 법률적 도덕적인 책임을 이행하기보다는, 점령을 피해서 일하고 제3국가들의 활동부족을 경감시키기 위하여 자금과 개발을 활용하였다. 사실상 이것은 점령자에게 계속해서 일을 진행시키고, 모든 이 보고서들을 오만하게 기각하는 허가증을 주었다. 비극은 국제 공동체가 이 사실을 알지만, 더 넓은 지정학적인 환경과 그 자체의 내부적인 이익과 정치 때문에 조치를 취하는데 주저한다는 것이다.


2011년에, 유엔은 팔레스타인 기구들이 국가 지위 획득을 준비한다고 선언하였다. 거의 부전승에 이 방향으로 계속 큰 규모의 자금이 흘러 들어오면서, 국가건설 안은 난국에 봉착하고, 특히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기구들에게 완전히 기능하도록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위의 내용에 비추어, 실제적인 점령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나머지 세계라는 인식이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나머지 세계의 도덕적 재정적 후원이 없었다면, 점령이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겠는가?
□ 국제적인 개입이 없다면, 50년 동안의 점령을 종결시키려는 어떤 시도도 실패할 것이다.


50년이라는 점령 기간 동안, 해외 국가들과 국제기구들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으로 바빴고, 기껏해야 이 분쟁을 관리하고, 저지하려고 노력해왔다. 상기할 주요 사건들은 1973년 중동 평화를 위한 제네바 회담을 포함하여 다음과 같다. 1975년 유엔이 PLO에게 영구적인 옵저버 지위를 부여, 1978년 캠프데이비드 협정, 1980년 EC의 베니스 선언, 1981년 파흐드 왕자 계획, 1982년 아랍 연맹의 페즈 계획과 레이건 브레즈네프 계획, 1983년 제네바 국제 대회, 1988년 슐츠 평화안, 1991년 마드리드대회와 계속된 양자간, 다자간 회담들, 1993년 임시 자치정부에 관한 원칙 선언, 1994년 오슬로 협정 I, 1995년 오슬로 협정 II, 1998년 와이리버 규약, 1999년 샤름 알 셰이크 협정, 2000년 캠프데이비드 협정, 2001년 타바 협정, 2002년 아랍 평화안, 2003년 미국의 로드 맵, 2007년 아나폴리스 회담, 2010년 근거리 회담, 2013년 케리 특사 그리고 2016/17년 프랑스 기획.


아마도 세계적으로 팔레스타인 문제만큼 이렇게 많은 기획들, 제안서들, 회의 개최, UN결의, 국제법 채택과 통과 회의들 및 협정 체결이 이루어진 문제들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 노력들 중 대부분은 미국의 정책과 관련되는 것이며, 이스라엘에 편향적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분쟁해결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거의 결과를 내놓지 못한 지구상의 다른 지역은 없다. 사람들은 당연히 국제사회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과 50년간의 점령을 종식시키는데 실패한 이유를 물어볼 수 있다. 1967년 11월 유엔 안보리 결의 242호가 이미 이스라엘에게 점령지로부터의 철수, 상호 인정, 난민 문제 해결 등을 요구하였다. 1977년 10월 미국-소련 공동 성명은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합법적 권리를 인정하였다. 매우 간단히, 끝내야만 할 모든 일은 이 분쟁에 국제법과 판결을 적용시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미 자신들의 역사적인 고향 땅 중 단지 22%에 대한 협상에 합의하고, ‘땅과 평화의 교환 방식’을 수용함으로써 역사적인 양보를 하였다.


오늘날 외관상 처리하기 힘든 문제는 모두 새로운 것이 아니며, 부끄럽게도 점령 초기부터 협상 테이블에 있었던 것이다. 국제사회가 ‘협상’에 매달려 있는 척하는 동안, 이스라엘은 ‘협상과정’을 사용해서 효과적으로 시간을 벌고, 팔레스타인 땅에 더 많은 현실들을 만들어 갔다. 두 가지 예들, 즉 정착촌과 예루살렘문제가 이것을 설명한다. 1978년 세계시온주의자기구(WZO)는 정착촌 개발에 관한 종합 기본계획을 출판하였다. 당시 소련 및 유럽과 나란히 하고 있던 미 국무장관 반스는 이스라엘에게 정착촌 건설 활동을 중단하도록 요구하였다. 오늘날 팔레스타인 영토에 거의 60만 명의 정착민들이 있다. 1) 역사적 팔레스타인 전체 인구의 약 52%를 구성하는 유대인들은 역사적 팔레스타인 전체 영토의 85% 이상 사용하고 있으며, 역사적 팔레스타인 전체 인구의 48%를 구성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은 역사적 팔레스타인 전체 영토의15%이하의 땅을 사용하고 있다. 2)


1980년 8월 20일, 유엔 안보리 결의안 478호가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이 결의안은 동예루살렘에 대한 이스라엘의 합병 시도를 비난하는 7개의 유엔 안보리 결의들 중 하나이며, “성지 예루살렘의 지위와 특성을 변경시키거나, 변경시키려는 점령세력 이스라엘이 취한 모든 법률적 행정적인 조치들과 행위들은 무효이며, 당장 폐기되어야한다”고 결정하였다. 수많은 유네스코 결의들도 예루살렘의 역사적 문화적 상태를 유대화시키려는 이스라엘의 시도들을 비난하였다. 오늘날, 동예루살렘은 사실상 합병되었고, 이스라엘은 충분히 입증되는 차별적인 조치들과 정책들을 방해받지 않고 유지한다.


이제 국제사회는 국제법 준수를 반드시 보장하고, 회유, 모호한 시도들과 공모문화를 의미 있는 압력으로 대체시키고, 면책 특권을 폐지시켜야한다. 정치적 담력과 강력한 개입으로 이스라엘에게 책임을 지우고,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도록 해야 할 때다. 분쟁뿐만 아니라 불법점령을 종식해야한다. 팔레스타인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이 똑같은 공범자들로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 점령당한 사람들이 점령자의 안보에 대한 책임을 질 수는 없다. 유럽 및 비동맹운동, 이슬람 협력기구(OIC), 아랍연맹 등과 같은 국제단체들을 포함하는 전 세계는 초강대국 미국을 따르고 있다. 오슬로 협상 과정이 실패 한 이후, 이제 두 국가 해결안은 국제사회의 책임이다.


1) CBS, Statistical Abstract of Israel 2016
2) PCBS, Press Release on the Occasion of Land Day, March 2017


이 글은 2017년 6월 9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