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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이유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19 10:52
조회
253

이유정/ 변호사, 법무법인 자하연


 

길고 무더운 여름이 지나간다. 더위와 습기찬 공기가 불쾌지수를 한없이 끌어올리던 올 여름. 그 불쾌지수에 기름을 부은 것은 지겹게 되풀이되는 학력위조 논란이었다. 신정아 전 동국대 교수가 박사 학위를 위조한 사건에서 비롯된 학력위조 논란은 엉뚱하게도 연예계로 불똥이 튀어 한참 잘나가는 개그맨 출신의 영화감독이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왕년의 여배우며, 우리나라 최고의 연극배우며 가릴 것 없이 대중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며 과거의 거짓말을 반성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대학 졸업장이 있어야만 연예인이 되는 것이 아닌데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물론 학력을 위조해서 학위를 필요로 하는 교수 등의 직업을 갖게 된 사람들은 잘못이라고 하더라도, 학력과 무관하게 다른 재주로 유명해진 연예인들이 차례로 도마 위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는 마음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연예인들에게 “00대 출신”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주고 학력 차별을 조장하던 언론을 비롯하여, “00대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을 실제보다 더 훌륭한 사람으로 여겨 온 우리 모두가 그러한 차별적인 관념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반성해야 함에도 여기저기서 꾸짖는 소리만 요란했다.

불쾌지수를 끌어올린 것은 이 뿐만이 아니다. 아프가니스탄에 봉사활동을 떠난 개신교 신자들 20여명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개신교를 둘러싸고 벌어진 지루한 논쟁들. 납치 소식이 전해진 직후 국내 최고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어느 신문에 무분별한 선교를 탓하는 내용의 사설이 실린 것을 보고, 나는 보수언론이 파병 반대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그러한 논조의 글을 쓰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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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아씨
사진 출처 - 서울신문



그런데 무모한 선교나 봉사활동을 비난하는 여론이 점점 드세지더니, 마침내 위험한 지역에 선교를 하러간 사람들은 죽어도 마땅하다는 식의 극단적인 비난 여론이 난무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인터넷 신문을 보기가 겁이 났다. 어찌되었든 사람의 생명이 달린 문제이고, 봉사활동을 떠난 사람들이 범죄 집단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심한 비난을 퍼부어야 했을까. 이성적인 비판과 진심어린 반성은 온데 간데 없고, 이미 무분별함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인질들에 대한 손가락질과 고함소리만 요란했다.

학력을 속인 연예인들과 무분별하게 봉사활동을 떠났다가 인질로 잡힌 기독교 신자들이 거짓말과 무분별함에 대한 들끓는 비난여론 속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을 동안, 29만원의 재산을 가지고 호화로운 말년을 보내고 있는 전직대통령은 대신 인질로 잡혀갈 생각을 했다는 코믹한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부동산 문제에 대한 의혹이 아직 해소되지 않은 대통령 후보는 그 말이 웃기지도 않은지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어 또 다시 사람들을 웃겨 주었다. 웃으면서도 불쾌지수는 끝없이 상승한다. 더 큰 거짓말과 범죄 앞에서 관대해지는 사람들에게 짜증이 난다. 왜 우리는 작은 일에만 분노하고 더 큰 거짓말과 불의에 대하여는 그토록 쉽게 눈을 감고 잊어버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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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연합뉴스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분다. 짜증스러운 마음도 한결 가라앉는다. 가을에는 우리 안에 자리한 편견, 차별적인 관념, 무분별함, 배타성에 대해 차분한 비판과 진지한 반성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아울러 작은 일에만 분노하고, 더 큰 거짓말과 불의에 대하여는 쉽게 눈을 감는 우리 안의 이중적인 잣대에 대하여도 진지한 성찰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