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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서 사망한 이들은 국가가 명예로운 죽음으로 인정하고 보상하라 (송기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09 15:21
조회
621

송기춘/ 전북대 법학과 헌법학 교수


자식 잃은 부모들의 통곡소리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사랑하는 아들을 군대에 보내고,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이 ‘자살’하였다는 통지를 받은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참혹하겠는가. 더구나 ‘자살’하였다는 아들의 시신에서 또는 부대 동료들의 증언에서 자살이 아니라고 믿을 만한 증거가 나왔음에도 ‘자살’하였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는 군을 대할 때 이들 부모의 아픈 마음을 어디에 비하겠는가. 사고조사를 위한 현장출입도 자유롭지 못하고 관련 기록마저 제대로 열람할 수도 없는 형편에서 어느 부모의 마음인들 이 나라에 대한 애정을 가질 수 있겠는가. 허원근 일병 사건과 같이 오랜 시간이 경과한 후에야 타살이었음이 밝혀진다면 그 동안의 억울함과 고통은 무엇으로 보상하겠는가. 제대로 납득할 수도 없는 아들의 ‘자살’에 국가에서 주는 것이라고는 사망위로금 500만원이 전부인 이 나라는 과연 무슨 근거로 징병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과연 국방의 의무는 진정 신성한 것인가.

 
전투력의 손실?

국가유공자법 제2조에서는 ‘자해행위로 인한’ 사상의 경우 국가유공자 등록에서 제외하도록 하고 있다. 어떠한 이유로도 자신의 건강과 생명을 해쳐서는 안 되며 이는 전투력의 저하를 가져온다고 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군인의 지위에 관해서는 선진적이라 할 수 있는 독일 군인지위법 제17조 제4항은 “군인은 건강을 유지 또는 회복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군인이 고의나 중대한 과실로 자신의 건강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하고, 직무능력평가나 임용적격평가 등과 관련되는 경우 신체의 불가침성에 대한 제한을 규정하고 있다. 자신을 해(害)할 권리 또는 죽을 권리가 기본적 권리로 인정된다 해도 군인에게 자살이나 자해는 군기 또는 전투력에 저해요소가 됨은 분명하다. ‘자원’ 또는 ‘병력’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는 이들에게 군인의 사망은 병력(兵力)의 손실이요, 국방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리라.

 
무엇이 전투력을 약화시키는가?

군대에서 자살자가 발생하는 것은 군으로서는 달가운 일이 아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전력과 단결을 저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전력을 약화시키고 단결을 해치는 것은 국가가 복무에 대해 베푸는 보상이나 보호가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아닐까. 군대에 가서 죽으면 ‘개죽음’이라는 생각, 군대는 안 갈 수 있으면 어떻게라도 안가는 게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야말로 군의 단결과 사기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던가. 부하를 개인의 편의를 위한 사병(私兵)으로 부리는 일, 가혹행위를 가하는 등 인권을 침해하는 것은 오히려 군기문란의 주범이 아닌가. 국민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하여 입대하였는데 그 환경은 열악하고 자신이 가진 문제를 해결할 길은 막막하고 어쩔 수 없는 고립과 한숨 속에서 자살의 길을 택한 사람은 어쩌면 타인에 대한 공격을 스스로에게 돌린 점에서 가장 적은 피해를 일으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죽음을 단지 자살이라는 형식을 가졌다 하여 보상을 하지 않고 불명예스러운 죽음으로 치부하는 것은 남은 이들에게도 엄청난 상실감과 무력감을 일으킨다. 전투력의 바탕이 자발적인 복종과 국방에의 의지라고 한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국가와 군 복무에 대한 자부심은 확보되지 않으면 안 된다. 군복무에 대한 신성한 관념을 형성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가장 힘없이 죽어간 이들에 대한 예우가 그 열쇠를 쥐고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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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겨레




군에서 자살하였다 해도 국가의 책임은 면제되지 않는다

군에서는 자살하였다고 판단하는 이들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으며, 법원에서도 자살이 업무와 관련성이 인정되는 매우 제한적인 범위에서만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하고 있다. 배상책임을 인정하면서도 본인의 과실이 70-80%나 된다고 하니, 사실상 국가책임을 부인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으며 자살한 이들도 명예로운 죽음으로 인정하고 보상을 하여야 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첫째, 병(兵)을 중심으로 얘기하자면, 군복무가 의무에 의한 것으로서 개인의 의사에 반해서도 복무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원에 의한 경우도 일단 복무하게 되면 그 신분을 벗어나기가 매우 힘들다는 점에서 병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개인이 아무리 가지 않으려 해도 소집되면 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군복무이다.

둘째, 오늘날 군대와 관련하여 특별권력관계라는 관념을 부인함으로써 군에서도 기본권이 보장되게 하려 하지만 아직도 군복무는 그 실질이 포괄적인 지배관계라는 점이다. 의식주를 비롯한 사생활까지도 내무생활을 통하여 규제하고 있다는 점을 보면 이 점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외부와의 접촉을 거의 차단한 채 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규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포괄적인 지배관계에서 국가는 그 규제에 상응한 책임을 져야 한다.

셋째,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할 의무를 진다는 점이다. 헌법 제10조 후문에서는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기본권의 보장은 우선 기본권의 주체인 개인의 자발적 노력과 행동을 통하여 주장하고 이를 보장받도록 하는 것이 원칙이다. 만약 모든 기본권의 보장을 위하여 국가가 개입한다면 이는 또 다른 기본권 침해를 초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본권 주체의 기본권보장을 위한 행위의 가능성이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기본권보장을 위한 국가의 의무는 보다 현실화된다. 스스로 기본권주장이나 구제노력을 하지 못하는 유아나 정신병자의 경우는 국가의 기본권보장의무가 더욱 강하게 인정된다. 교도소와 같은 수용시설에 감금되어 스스로 권리구제를 위한 노력이나 소통을 하기 어려운 경우도 그러한 기본권침해방지와 구제를 위한 국가의 의무와 책임이 보다 강하게 인정되어야 한다. 군대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넷째, 많은 이들이 대체복무를 하고 일부만 군에 입대하라는 명령이 이뤄지는 것이라면, 입대하는 이들은 현역복무적합자라는 판단을 한 것이므로 그 복무관계에서의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국가가 포괄적인 책임을 시인한 것이라는 점이다. 보험사의 경우도, 일반적으로 가입자에게 보험가입결정여부, 보험금액 결정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도록 하여 판단하고, 일단 가입이 되면 제공한 정보가 허위이거나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부분에 대한 책임을 제외하고는 사고 발생시 보험금을 지급한다. 군복무명령을 한 것은 군복무적합자라는 판단을 한 것이고, 자살을 한다는 것은 결국 그 복무적합판정이 그릇된 것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그 사람이 소질상 사회에 있었어도 자살할 가능성이 높았다 해도 이를 간과한 채 복무하도록 하였다면, 이는 현역복무적합 여부에 관한 국가의 중대한 판단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국가는 복무부적응 또는 부적격을 판단하여 결정하여야 하기 때문에 어떠한 사고라도 발생하면 군의 책임이 면제되지 않는다. 더구나 군에 수많은 보직이 있기 때문에 능력에 따른 배치에 만전을 기하고 복무부적응의 경우 배치전환을 하여야 한다는 점도 근거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군에서의 생활은 대체적으로 군복무와 관련하여 근무 또는 대기상태에 있으며 항상 긴장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24시간을 업무와의 관계 속에서 긴장하는 군인들에게 무엇이 업무관련적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으며 모든 부분을 군복무관련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마치 정당이 선거를 통하여 국가기관을 구성하는 공적인 부분과 그 밖의 사적인 부분을 구분하는 것이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섯째, 자살은 자유의지의 결과라기보다는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이뤄진다는 점이다. 엄격하게 폐쇄적인 사회에서 문제를 달리 해결할 길이 없는 상황에서 이뤄지는 자살이 어떻게 개인의 자유의지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결국 당사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국가가 군복무에 종사하도록 강제하였다면 이들에 대하여 발생하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는, 그것이 설사 자살이라고 하더라도 국가의 책임이 면제되지 않는다. 다만 전투중이나 전우를 구출하기 위해 사망한 경우 등의 경우와는 포상 등 대우의 차이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양적인 차이”에 불과하고 근본적으로 국가책임이 부정되어야 할 정도의 문제는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살자에 대한 처우는 군복무관계에 대한 인식, 자살에 대한 과학적 인식, 예산 등에 의하여 결정되는 문제다. 군대에서 자살하였다 해도 이는 군대에서 사망한 것의 한 유형일 뿐이요, 달리 대우할 사항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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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해동)는 28일 오후 서울
국회도서관 강당에서 '군내 자살처리자,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란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국립묘지 안장이 그렇게 어려운가?

‘자살’하였다고 하는 이들에 대한 예우문제에는 항상 국립묘지 안장문제가 수반된다. 국립묘지는 명예로운 죽음을 당한 이들이 안장되는 곳이므로 자살자는 그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입장이 강하게 주장된다. 심지어 ‘힘든 군대생활 잘 견디고 제대한 사람도 유공자가 안 되는데, 그것도 못 참고 자살한 ×들이 무슨 유공자이며, 국립묘지냐’고 비난한다.

그러나 국립묘지를 유공자에 대한 관념에 철저하게 만들 것이면 전투 또는 훈련 중 사망한 사람이나 기타 공을 인정할 만한 경우나 국가에 대한 공적이 있는 자에 한정하여야 한다. 단순한 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실상은 유공자는 아니다. 그 죽음을 낮게 평가해서가 아니다. 국가유공자 여부는 그 죽음의 실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국가가 평가하여 부여한 것이다. 결국 국립묘지 안장 여부는 그 죽음의 실질보다는 국가의 평가에 달려 있다. 국립묘지가 반드시 명예로운 희생자만이 안장되는 곳은 아니고, 명예는 부여된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자살자에 대한 평가의 변화에 따라 국립묘지 안장 문제도 전향적으로 생각하여야 한다. 물론 국립묘지 안장에 철저하게 ‘유공자’일 것을 요구한다면 임실이나 영천에 있는 호국원에 유족의 원에 따라 안장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단순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왜 유공자인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다만 고려할 점은 호국원에 안장되는 이들이 대개 한국전쟁 전후 참전자, 월남전 참전자 등인 것을 고려하면 그곳에 안장된다는 사실 자체가 명예롭지 못한 평가를 수반할 수 있으므로 매우 조심스러운 방안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현재 국립묘지가 그 죽음 자체의 명예 여부가 아니라 국가의 죽음에 대한 평가에 따라 대상이 결정되고 있으므로 자살자에 대해서도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여 안장을 허용하는 것이다. 군에 입대하여 사망한 사람이 죽음의 경위는 다를지언정 어느 목숨인들 소중하지 않을까. 특히 자살자의 유족이 원하는 것이 금전적인 보상보다도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당하였다는 평가이고 보면 적극적으로 고려할 부분이다. 사망자에 대한 예우의 문제는 엄격하게 말하면 죽은 자에 대한 예우라기보다는 유족들에 대한 예우가 아닌가.

 

 

이들에 대한 예우로 얻는 것

자살한 것으로 처리된 이들에 대한 충분한 보상과 예우는 사랑하는 자식과 친구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의 마음을 최소한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충분하진 않지만 적어도 마음에 위로는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국민이 가지는 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타파하고, 적극적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기꺼이 군복무에 종사하고자 하는 자발적 의무이행에 대한 의지를 촉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들에 대한 대우가 열악한 것은 예산문제에서 기인한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예산측면을 고려하더라도 자살자가 1년에 60여명까지 줄어들고 있는 현실(2004년 67명, 2005년 64명)에서 이들을 충분히 보상하는 것은 국가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군복무에 대한 의지를 고취하는 것만으로도 비용을 지출할 이유는 충분하다.

법은 따뜻한 것이다. 아픈 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고 아픈 가슴을 어루만져 주는 것이어야 한다. 국가는 자식 잃고 통곡하는 부모들의 피울음소리를 언제까지 외면하고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