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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Women's march on Seoul (신하영옥)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5:47
조회
282

신하영옥/ 여성운동연구활동가 네트워크 ‘젠더고물상’


“여성인권이 낮은 곳에서 최초의 무언가가 된다는 것은 때로 목숨을 담보로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멈출 수 없는 것은, 그것을 일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위 글은 <워싱턴 100만 명의 여성과 세계 30개국이 함께하는 여성권리행진>의 주최 측인 <워싱턴 행진>의 대자보 내용의 일부이다. 이 최초의 전 세계적인 여성행진은 反다양성을 주장한 트럼프의 집권에 대항하여 시작되었다. 트럼프 취임일인 1월 20일 다음날인 21일 워싱턴에서 20만 명이 넘는 여성들이 참여의사를 밝히며 캐나다, 호주, 유럽 등 여러 국가들이 동시다발적인 참여를 약속했고, 한국 서울에서도 함께 행진하기로 한 것이다. 서울여성행진은 21일(토) 오후 2시에 강남역에서 행진과 후속행사로 진행된다. 현재 400여명 정도가 참여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모집광고가 있고 길지 않은 시간이었던 것으로 안다. 많은 여성들이 트럼프를 위시한 세계적 반민주주의 세력에 대해 반대하고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여성으로서 ‘나’의 존재가 위험함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여성들이 이 뜻에 공감하고 함께 참여한다는 것은 선/후진국을 불문하고 전 세계적으로 여성에 대한 위험의 존재, 즉 안타깝지만 민주주의가 여성들에게 ‘안전’과 ‘인권’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우리 여성은 ooo에 의하여 위협받고 있다.” “우리는 자유로운 ooo권리를 원한다.”


이러한 구호는 여성이 불안하고 불행하며, 여전히 제1세대적 권리인 자유권조차도 보장받지 못하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특히 여성의 몸과 관련한 자유권 -낙태, 출산, 성범죄- 등은 여성의 통제가 아니라 법률, 즉 (남성)국가의 통제의 대상이 된다. 여성은 과연 ‘신체의 자유’를 보장받고 있는가?


womens-march.jpg?itok=hGCU2qjf<워싱턴 100만 명의 여성과 세계 30개국이 함께하는 여성권리행진>
사진 출처 - 구글


87년 체제로 호칭되는, 87년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대안에 대해 다양한 연구들이 있다. 한국이 민주화를 통해 형식/절차적 민주주의는 이루었으나 다양한 사회세력들이 존재하는 다원화된 사회의 현실이 정치차원에 반영되고 있지 않다는 것에 많은 이들이 동의한다. 이는 실질적 민주주의, 혹은 민주화에 대한 문제이다. 그리고 형식적 민주주의-절차적 평등권- 아래, 무엇보다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됨으로써 정치적 평등이 경제적 평등을 보장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정치가 경제에 종속되는 현상에 대한 문제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경제적 민주주의와 등치시키며, 사회민주주의 즉, 복지국가를 대안으로 삼기도 한다. 실질적 민주화는 과연 경제민주화와 동의어일까? 작금의 국정농단 사태는 국가가 한정된 사회적 부와 자원을 배분하는 과정의 개입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고 정치를 경제의 종속 하에 두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경제적 부를 획득하기 위해 정치를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치의 원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 상황에서 경제민주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는 다양한 사회집단들의 정치경쟁이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 사회내의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이 정치적 장에서도 펼쳐지고, 사회내의 다양한 집단들만큼 다양한 정치집단들이 존재하며 상호경쟁, 감시, 때로는 연대가 작동할 때 가능하다. 이것이 실질적인 민주주의이다. 경제적 민주주의는 실질적 민주주의의 한 부분이고, 실질적 민주주의의 토대가 아니라 그 결과로만 가능하다.


여성들은 사회 내 다양한 집단들 중의 하나로서, 실질적 민주주의를 위한 여정에 있다. 민주주의가 ‘자기결정’을 핵심원리로 한다고 할 때, 여성들은 남성, 남성적 국가로부터 폭력, 억압, 차별의 과정 속에서 ‘자기결정’을 진압, 거부, 무시당해왔다. 그것을 자각한 여성들이 “여성도 인간”이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제 권리들을 “인권”의 이름으로 보장하라고 주장해왔다. 보편선거권, 헌법이 명시한 문장으로서의 성평등이 아니라 일상에서 여성들이 ‘자기결정’을 할 수 있는 실질적 평등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형식적 민주화였다. 법과 제도만 만들어졌고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과 차별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일상인 온라인을 통해 은밀하게, 악랄하게 확장되고 있다. 이제 일상적으로, 수시로 여성폭력현장과 문화를 접함으로써 강간이 상품이 되고, ‘성폭력’(장면)을 통해 ‘성’을 ‘배우는’ 결과가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 사회의 절반이 또 다른 절반에 대해 공포심을 갖고 살아가고 다른 절반은 또 다른 절반을 강간의 대상으로 삼는 이러한 현실이 가능한 사회와 정치가 과연 민주주의인가? 이러한 상황에서 재벌 몇 명, 부패정치인 몇 명 구속하고 대통령이 바뀐다고 사회 구성원들이 ‘자기결정’의 주인, 즉 정치의 주체가 되는 그러한 민주주의가 보장될 수 있는가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정치철학과 시스템을 바꾸는 기획, 현재 민주주의의 정의와 작동방식에 대한 철저한 성찰과 반성, 다음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철학과 정의의 확립, 다음으로 작동방식에 관여하는 시스템에 대한 다양한 입장의 총화라는 과정이 놓여져야 한다.


주부인 나는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해야 할 때가 있다. 놓친 드라마를 보면서 세탁기를 돌리고, 그 동안에 음식을 만들거나 청소를 한다. 그럴 땐 드라마를 ‘본다’가 아니라 ‘듣는다’이다. 그 와중에 가족 중 누군가 아무런 말도 없이 티비를 ‘확’ 꺼버리면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티비 앞에 앉아있지 않을 뿐, 여전히 들음으로써 드라마를 보는 중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무시당했다는 것과 상대의 비민주적 행위에 화가 난다. 이런 것이 민주주의를 둘러싼 차이이다. 드라마를 보는 이가 많지만, 듣는 이도 있을 수 있다는 고려를 하는 것과 못하는 것. 이러한 일상의 민주주의에 대한 차이는 정치민주주의에 대한 온도차이로 연결되는 것이다. 사소할까? 일상에서 ‘자기결정’에 대한 배려를 익히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정치적 배려라는 것이 생겨날 수 있을까?


여성행진은 이렇게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존재하는 여성 배제적, 혐오적, 무시적 행위들과 그 행위를 성찰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정치적/사회적 시스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결합된, 그래서 생활과 존재 모두를 위협하는 모든 구조와 그 구조를 지탱하는 남성 집단에 대해, 특히 반다양성을 정책으로 떠들어대는 반민주적 세력들에게 여성들은 결코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것을 보고만 있지 않겠다는 실천이다. 동시에 민주주의 자체가 사회적 투쟁의 과정에 있다는, 즉 민주화로서의 민주주의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걸음 더 나아가 한국의 민주주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의 정책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는 투쟁으로서 미국의 문제를 국내문제와 연결시켜 낸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도 의미를 가지는 투쟁이다. 단선적인 ‘반미’와 ‘양키 고홈’이 아닌 방식, 세계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미국의 반민주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구체적인 목표를 가진 투쟁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한국에서 미국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한 선도적 의미를 가지는 저항인 것이다. 모든 소수자 운동이 그렇지만, 특히 여성운동의 목표는 실질적 민주화로서 다양한 사회세력의 정치지형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민주화에 대한 대안은 현실정치권에 있지 않고, 남성들에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새로운 대안을 만들고 실천하는 여성들, 그리고 이들과 연대할 수 있는 세력들에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이 나라가 여성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
“우리가 화가 나면 변화가 일어나고, 일이 일어난다.”


이번 행진의 공동 창립자인 ‘Tamika Mallory'의 말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변화는 이미 일어나고 있다.


이 글은 2017년 1월 1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