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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국민의 비인격적 도구다(조광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10-01 16:55
조회
634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국가의 구성요소를 주권, 인구, 영토로 보는 것이 상례다. 이 중 핵심 요소는 주권이다. 주권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주권에서 지배를 뺄 수는 없다. 지배는 근본적으로 신체의 자발성에 제약을 가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실현되는 자유는 신체의 자발성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진다. 지배와 자유가 대립하는 이유다.


 민주주의 국가의 주권은 기본적으로 모두가 모두를 지배하고, 모두가 모두에 의해 지배받는 데서 성립한다. 달리 말하면, 지배받는 인민이 지배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민주주의의 발상지인 그리스 아테네에서 민주주의를 지지했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은 지배할 줄도 알고 지배받을 줄도 아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민주주의 국가에 사는 사람은 평소에 지배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해서 실행에 옮길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와 동시에 그는 평소에 지배받아야 한다는 의무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해서 늘 실행에 옮기고 있어야 한다. 미리 말하자면, 이같이 지배의 권리와 피지배의 의무를 정확하게 인식해서 균형을 잡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정치의식이다.


 그런데 누구나 외부의 강압은 물론이고 간섭조차 배제한 상태에서 자신의 신체를 자발적으로 움직이고자 하는 타고난 욕망을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누구나 지배받지 않으려는 욕망을 타고나는 것이다. 그 바탕은 생명이다. 생명은 무제약적인 본능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생명의 무제약적인 본능이 충돌을 일으키면 근대철학자 홉스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이 일어난다. 이를 극복하여 가능한 한 모두가 평화 속에서 복지를 누리고자 형성하는 것이 국가다. 따라서, 지배받지 않고 지배하기만 하려는 사람이나 지배하지 않고 지배받기만 하려는 사람은 국가의 일원으로서 자격이 없다.


 국가가 국가로서 모든 국민에게 권위를 가질 수 있는 바탕은 원칙상 서로가 서로에 의해 지배하고 지배받기로 한 공공의 계약이다. 공공의 계약이 현실화된 것이 법이다. 법은 지배의 권리와 피지배의 의무간의 균형 잡힌 동시성을 바탕으로 국민의 사회적인 행동이 갖는 정당성과 부당성을 규정한다. 이러한 법 앞에서 예외가 있어서도 안 되고 불평등이 있어서도 안 된다.


 현실적으로 국민의 평화와 복지를 위해 누군가가 법을 제정해야 하고 누군가가 법에 따라 국가의 일을 집행해야 하고, 또 누군가는 법 위반을 감시하고 처벌해야 한다. 즉 입법과 행정 및 사법을 담당할 사람들을 정해야 한다. 이들은 모든 국민이 가지는 지배의 권리를 위임받아 그 권한 내에서 권력을 행사한다. 이들에게서 지배할 권리와 지배받을 의무는 직접적이다. 그 반면,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국민은 평소 지배할 권리는 간접적으로 행사하고, 지배받을 의무는 직접 지켜야 한다. 


 이러한 직간접 권리 간의 불균형에 따라, 지배할 권리를 직접 발휘하는 소수가 지배할 권리를 간접적으로 발휘하는 대다수의 국민을 오로지 지배받을 의무를 지닐 뿐 지배할 권리를 갖지 않는 것처럼 착각할 수가 있다. 이 문제가 드러날 가능성이 높은 영역이 사법 영역이다. 사법적인 권력을 지닌 소수는 임시로 선출된 국민의 대표가 아니라, 저 자신의 능력으로 그러한 권력을 소유한 것으로 자타에 의해 인정을 받기 때문이다.


 법은 국민의 행동을 대상으로 일치와 위반을 겨냥한다. 하지만 사법 권력은 근본적으로 국민의 행동 중 법 위반의 경우만을 다룬다. 법 위반의 행동을 하는 국민에 대해 강제적인 폭력을 동원해 처벌을 가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고 기능이다. 강제적인 폭력에 의한 처벌을 가할 수 없는 국가는 국가로서 존립할 수 없다. 그 강제적인 폭력을 수행하는 일차적인 국가기구가 경찰과 검찰이고, 그 이차적인 국가기구가 법원이다. 그 배후의 국가기구로서 군대가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강제적인 국가기구들의 바탕에는 전체 국민이 있다.


 국가가 수행하는 강제적인 폭력의 일차적인 실현은 법정에의 기소이고 최종적인 실현은 판결과 판결의 집행이다. 기소를 전담하는 검찰과 판결을 전담하는 법원, 그리고 검찰에 속한 검사들과 법원에 속한 판사들은 선출된 국민의 대표가 아니다. 적어도 법 위반을 둘러싼 지배의 권리와 그에 따른 권력은 국민이 행사하는 것이 아닌 셈이다. 국민이 아닌 데 국민의 생활 즉 국가 구성에 의한 삶을 실현하는 데 필요하다면, 그것은 국민을 위한 도구다. 검찰과 법원이 그러하다. 말하자면, 검찰과 법원은 원칙상 비인격적인 도구다. 그래서 모든 정규직 공무원이 그러하듯이, 선출하지 않고 법령에 따라 쓸 만한 도구인가를 판정해 선발하는 것이다.


 비인격적인 도구는 그 도구를 사용하는 자들이 어떤 자들인가에 따라 그 기능을 달리 발휘할 수 있고 그 효과가 달라질 수 있다. 누군가가 자신이 지닌 생활 도구를 잘못 사용해 저 자신을 다치는 것은 다른 누구에게 호소할 수 없다. 하지만, 검찰과 법원은 철저히 그들 자신이 아닌 국민의 안녕과 평화를 위한 도구이다. 도구를 사용하는 자는 도구를 잘 관리하고 잘 사용해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만약 도구가 주인을 아랑곳하지 않고 혹은 그저 눈치만 살피면서 도구 자신을 위해 도구인 자신을 활용하게 되면, 그 도구는 폐기 처분해야 마땅하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도구는 하위의 도구들을 필요로 한다. 컴퓨터라는 도구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모니터도 있어야 하고 자판과 마우스가 있어야 한다. 검찰과 법원이라는 도구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검사들과 판사들이 있어야 한다. 검사들과 판사들은 저 스스로 오로지 법의 도구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법이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것이기에 검사들과 판사들은 국민을 위한 도구다. 만약 그들이 개인적으로 지닌 그들 자신의 인격에 따라 검찰을 인격으로 된 기관으로 생각한다면, 그리하여 검찰을 인격의 집합체로 생각해 이해(利害)관계를 다투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더욱이 그런 생각을 국가적으로 실현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위헌적인 근본 오류이고 그 자체로 범법이다. 강제적인 폭력인 국가 공권력의 배후인 군대가 군대 자체를 인격의 집합체로 생각해 그 자신의 이해(利害)를 다투는 식으로 행동한다면, 바로 그것이 쿠데타인 것과 동일하다.


 국가는 국민의 공동인격체이지만, 검찰은 국민의 도구이지 인격체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검사인 한에서 검사는 인격체가 아니다. 그것은 검찰도 검사도 그 자신의 이해 여부를 다툴 수 있는 기구도 기관도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검찰이 마치 그 자체로 살아있는 인격체인 양 활동한다면, 그런 활동의 기미만으로도 그런 검찰은 폐기해야 하는 것이다. 검찰이 쥐고 있는 것이 칼이 아니라, 검찰이 곧 칼이다. 그 칼을 사용하는 주인은 어디까지나 국민이다. 칼이 주인을 해하는 경향을 보인다면, 당연히 부러뜨려 내버리고 새로운 칼을 마련해야 한다. 민주 시민은 지배할 권리를 언제든지 직접 행사할 태세를 갖추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