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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들이 오래 남도록 (이찬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19 10:59
조회
342

이찬수/ 전 강남대 교수, 현 종교문화연구원장



일 년 일정으로 동경으로 오기 전 해외 은행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는 모 은행 현금카드를 하나 만들었다. 국내 은행에 잔고가 있으면 해외 대부분의 현금인출기에서 현지 화폐로 인출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현금 일부는 국내 은행에 두고 일부는 손에 들고 동경으로 날아왔다. 동경에 머문 지 일주일 쯤 지나서 나는 현금 인출이 과연 자유로운지 시험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듣던 바와는 다르게 내가 시내에서 만난 어떤 현금인출기에서도 카드 사용이 불가능했다. 사용할 수 없으니 발행기관에 문의해보라는 메시지만 뜰 뿐이었다.

몇 번 시도 끝에 나는 카드를 발행해준 은행 동경 지점에 문의하러 숙소 근처 허름한 공중전화를 찾았다. 동경지점 직원 말에 의하면 아무 은행에서나 되는 것이 아니라 미국계 은행과 우체국에서만 사용 가능한 카드라고 했다. 특히 우체국은 곳곳에 있으니 우체국 현금 인출기를 이용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왜 한국에서 들은 말과 다른지 간단한 항의를 한 뒤 약간 불안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 때가 초가을 어느 날 오전이었다. 이어 나를 초청해준 일본 교성학림 학장을 비롯한 전문학교 교장, 일본종교인평화회의 관계자 등 여러 사람들을 만나 환담을 하고 숙소로 돌아오니 늦은 오후였다.

잠시 휴식하다가 은행 직원에게 들은 말이 생각나 우체국에서는 내 현금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지 시도해보기로 했다. 우체국이 어디 있는지 이리 저리 물어 알아놓은 뒤 그 카드를 찾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지갑에 있어야 할 카드가 없는 것이었다. 온갖 주머니, 가방, 방안을 샅샅이 뒤져도 나오질 않았다. 순간 불안한 마음이 들었고, 사고를 쳤나보다 싶었다. 침착하게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최근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면 동경지점에 문의하기 위해 갔던 그 허름한 공중전화 근처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작은 기대를 품고 옷을 챙겨 입고는 그 공중전화로 향했다. 가면서 생각했다. ‘그 공중전화 자리에 카드가 있을까, 있었으면 좋겠다, 만일 그대로 있다면 일본이라는 나라를 신뢰할 수 있게 될 거야....’

부지런히 도착해 허름한 공중전화 보호대 문을 여는 순간 전화기 옆에 놓여있는 내 은행 카드가 한 눈에 쏘옥 들어왔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단면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다들 휴대전화를 쓰니 어쩌면 그 공중전화에는 나 이후 아무도 다녀가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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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이나 다름없었던 카드는 여섯 시간 동안
공중전화 부스 안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사진 출처 - 필자


 

그래도 중요한 것은 공중전화 부스 안에 거의 여섯 시간 동안 카드가 그대로 놓여있었고, 나는 현금이나 다름없는 그 카드를 다시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카드를 들고 나는 바로 근처 우체국으로 향했다. 은행 직원 말마따나 우체국 현금 인출기에서 현금을 찾을 수 있었다. 한 번 더 다행이었다. 동경의 외곽 한적한 동네우체국 뒤로 넘어가는 저녁 햇살 속에서 무언가 따뜻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한 뒤 이 날의 느낌을 남겨놓으려 한국에서 쓰던 노트북 컴퓨터를 켰다. 그런데 수십 여 개 의미 없이 깔려있는 바탕화면의 아이콘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삭제해도 되는 아이콘들은 정리해야겠다 싶어 이리 저리 마우스를 클릭 하다가 뜻밖에 가수 윤도현의 거의 모든 노래가 담겨있는 폴더를 하나 발견했다. 생각해보니 내가 윤도현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언젠가 나의 아들이 저장해놓은 곡들이었다. 이것이 바탕화면에 있었는데 그동안 전혀 몰랐다니... 여러 음악 파일 중 눈에 띄는 노래가 있었다. 언젠가 딱 한 번 듣고는 인상적이었다가 그 뒤로는 전혀 들을 기회가 없었던 노래, “가을 우체국 앞에서”였다.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노오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려가고
지나는 사람들같이 저 멀리 나는 걸 보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지난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있는 나무들같이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저 홀로 설 수 있을까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우연한 생각에 빠져 날 저물도록 몰랐네


서정적이면서 깊이 있는 가사가 좋았고, 멜로디는 반복적이었지만 따뜻함과 강렬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나는 그 노래 분위기에 푹 빠졌다. 반복해서 수십 번 들었고, 외워버렸다. 일 년 이상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었지만 한 번도 듣지 못하던 이 노래가 뜻밖의 상황에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내게 이렇게 묘한 감동을 주다니 역시 세상 이치는 다 알 수 없었다. 여섯 시간 동안 현금카드를 공중전화기 옆에 고스란히 놓아주었던 그 “아름다운 것들이” 노래 가사처럼 “오래 남을 수 있기”를 바랬다. 이 노래를 만들고 부른 가수가 고마웠고, 이 노래를 나도 모르게 컴퓨터에 저장해준, 지금은 멀리 떨어져 있는 아들이 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한 사람일지, 두 사람일지, 아니면 전혀 없었을지 모르지만, 공중전화기에서 그 카드를 보고도 그대로 둔 이가 고마웠다. 이런 고마움들이 내가 일본으로 오게 된 흔치 않은 상황과 미묘하게 어우러졌다.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지난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있는 나무들같이...” 한국과 일본 사회에 “아름다운 것들이 오래 남도록” 하는 일, 내가 할 일은 그런 것이어야 하리라는 생각에 날 새는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