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수요산책

‘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생명현상과 사형제도 (이찬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2 17:38
조회
219

이찬수/ 전 강남대 교수, 현 종교문화연구원장



가끔 육식이 불편해
나는 식성이 좋은 편이다. 채식, 육식 가리지 않지만, 가끔 육식이 불편할 때가 있다. 몇 해 전 잠깐 육류를 자제한 적이 있는데 왠지 입이 허전한데다가 가끔 고기 몇 점 생각도 나곤 해서, 한 달이 채 못 되 짧은 채식생활이 유야무야된 적이 있다. 요즘도 종종 고기를 먹다가 불현듯 찜찜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살점이 붙어있는 갈비를 맛있게 뜯다가도 문득 내 뼈와 살이 연상되기도 한다. 살아있는 낙지를 냄비 속에 넣고 부글부글 끓이는 해물탕 같은 음식을 보면 콧등과 미간 사이가 살짝 일그러진다. 마음속에서는 얼굴 전체가 일그러진다. 비록 음식이지만 내 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일은 편치 않다. 그러면 먹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정작 조리되고 나면 또 맛있게 잘 먹는다. 맛있게 먹고는 네 덕에 내가 산다며 아전인수적 해석을 하는 것으로 끝낸다. 그것이 현재 나의 모순이라면 모순이다. 그러면서 “하늘로 하늘을 먹는다”(以天食天)는 해월 최시형 선생의 말씀을 나를 위해 죽어주는 낙지에 대한 변명으로 삼고, 나의 모순을 은근히 합리화한다. 그리고는 가끔 밥상머리 앞에서 종종 생명이란 무엇인가, 누가 왜 무엇을 희생시켜야 하는가 하는 상념을 속으로 슬쩍 떠올리곤 한다.
생명이란
생물학자 로위(G.W.Rowe)에 의하면, 생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첫째 주변으로부터 에너지를 흡입하여 이를 자체 유지를 위해 사용하고(대사), 둘째, 개체의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 대한 복제 능력을 가지며(생식), 셋째, 변화하는 환경에 맞서는 세대를 거쳐 가며 변이와 선택을 통한 적응을 해나가야 한다.(진화)

이것은 생명에 대한 유용한 정의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개별 생명체에만 적용되는 정의이다. 이런 정의로는 내 음식이 되기 위해 죽어가는 낙지와 그로 인해 일그러지는 내 마음의 ‘관계’를 잘 설명하지 못한다. 낙지라는 생명을 먹고 나라는 생명이 살아가는 그런 관계성은 이 정의의 안중에 그다지 없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물리학자 장회익은 로위의 정의에 관계성을 보태 새로운 우주적 생명 개념을 만들어낸다. 즉, 생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대사’, ‘생식’, ‘진화’ 외에 개체간의 ‘협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개체들 간의 긴밀한 협동체계 속에서만 개별 생명체들도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협동체계 전체를 ‘온생명’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나타낸다. 그리고 각 개체들, 즉 ‘개체 생명’과 구분한다.(누군가 ‘낱생명’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는데, 개체생명 보다는 우리말 어감상 더 적절하게 느껴진다. 앞으로 낱생명이라는 표현을 쓰겠다.) 그리고 온생명에서 낱생명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낱생명의 ‘보생명’이라고 명명한다. 보생명은 이른바 ‘환경’에 해당되는 개념이다. 장회익의 요지는 어떤 생명이든 온생명적 구조 속에서 보생명과의 협동을 통해 성립된다는 것이다. 온생명 안에서 낱생명이 유지되어갈 뿐만 아니라 낱생명은 온생명적 구조를 반영해준다는 것이다. 탁월한 정리가 아닐 수 없다.
인간과 짐승의 차이
그런데 이것만으로 끝내기에도 좀 찜찜한 데가 있다. 그것은 짐승과 인간생명의 차이를 어디서 볼 것인가 하는 점 때문이다. 온생명의 논리와 차원에서 보면, 모두가 서로에 대해 보생명이며, 낱생명은 그것이 무엇이든 온생명의 주체이다. 여기서는 원칙적으로 인간과 짐승 간 차이가 전혀 없다. 낱생명들 간의 우열성은 찾을 길이 없다. 심지어 모기 한 마리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 사이에도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일본 철학자 니시타니의 얘기를 한 번 들어보자.

여름밤에 밖에서 한 마리의 모기가 날아든다. 마치 사냥감을 발견하고 환호라도 하듯이 쾌활하고 힘찬 소리를 내면서 달려온다. 그러나 잡혀서 손바닥 안에서 짓눌리는 순간 그 미물은 세찬 비명과 같은 소리를 지른다. 그것은 비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 소리는 분명 개의 비명이나 인간의 비명과는 다르다. 그러나 비명이라는 ‘본질’에 있어서는 같은 소리다. 그와 같은 소리는 모두 공기의 진동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서, 각각 파장이 다를지는 몰라도 우리로서는 그것을 비명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같은 질, 혹은 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소리에 슬픔을 직접 느낀다. 그것은 바로 감응의 장에서 성립하는 현상이 아닐까.

짐승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에는 적어도 평면적으로 보면, 별 차이가 없다. 모기 한 마리의 비명이나 인간의 비명은 물리학적으로 보면 공기의 울림 정도에서 차이가 날뿐, 개체적 생명의 소멸이라는 점에서는 모기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은 매일반이다. 원자나 전자 단위로 해체시켜놓고 보면 더욱이나 그렇다.

하지만 인간의 손가락 하나로 까딱 꺾여 스러지고 마는 코스모스 한 송이를 보면서도 인간에게는 연민이나 안타까움이라는 마음의 파장도 일어난다. 그래서 모기의 비명에서도 자신의 비명을 연상하기도 한다. 아무리 침실을 방해했기로서니 나의 파리채에 맞아 압사당한 파리의 최후를 보는 일도 유쾌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파리의 죽음에서조차 크든 작든 나의 죽임을 보기 때문이다.

 

080217web01.jpg
서대문 형무소에는 사형수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21



연민과 감응

이런 연민 내지 감응을 경험할 줄 아는 이가 바로 인간이다. 짐승들에게 그런 감응이나 연민이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어느 정도 있는지 지금으로서는 잘 알 수 없다. 물론 짐승에게도 자신의 새끼를 보호하려는 본능 같은 것은 있지만, 다른 생명체의 죽음에 대한 연민까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상적 인간이라면 남의 죽음을, 심지어 미물의 죽음도 자신의 죽음과 연결시킬 줄 안다는 것이다. 간혹 그런 연민이 전혀 없어 보이는, 말 그대로 짐승 같은 희대의 살인마들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분명 치유의 대상이다. 연민과 감응의 능력을 최소한이라도 회복시킬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하는 것이다. 더욱이 누군가에게 벌어진 억울하고 무참한 희생도 사실은 내가 포함된 보생명과의 관계성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나도 그 사건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내 책임을 통감하는 차원에서라도, 살인마에게조차 치유의 기회는 부여되어야 한다. 그리고 치유되고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어야 한다. 그런 희망이 없이 어찌 교육을 하고 종교를 하며 의료를 하겠는가. 몸의 치유든 마음의 치유든, 치유를 통해 더 인간다워질 수 있다고 믿기에, 종교도 추구하고 교육도 도모하며 사람을 치료하겠다는 의사들도 나오는 것 아닌가. 그런 희망을 가질 때 사라져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사형제도이다.

없어져야 할 것, 사형제도
사형은 사적인 살인에 대응하는 공적인 살인이다. 사형의 논리에는 연민도 동정도 없는 인간에게는 똑같이 연민도 동정도 필요 없다는, 고대의 동태복수법적 발상이 들어있다. 하지만 그러한 연민을 무시하고서 어떻게 인간이기를 바라고 보장받을 수 있겠는가. 억울한 희생을 당한 당사자나 유가족의 분노도 한편에서는 존중해야겠지만, 살인을 살인으로 갚는 것은 결코 연민이라는 인간의 깊은 본성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 깊은 본성을 외면하고 무시하면서 어찌 짐승과의 차이를 말할 수 있겠는가. 연민과 감응이 무너지는 곳에서는 인간도 무너진다. 미물의 죽음에서조차 연민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능력이자 짐승과의 차이라면, 하물며 사람의 죽음에서이겠는가. 사형은 인간의 본래적 능력을 억지로 거스르는 행위이다.

사형 선고가 아무리 ‘공식적’ 판결이라 하지만, 그러한 판결이 이루어지고 집행되는 과정 속에는 인간의 근본적인 연민에 대한 의도적인 외면이 들어있다. 재판장이 사형을 선고하지만, 그가 기꺼이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이 사형을 직접 집행하지는 않아도 되는 공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죽음, 공식적 살인이 자신과 상관없이 저 너머에서 이루어지는 일인 냥 외면해도 될법한 장소에 있기 때문이다. 만일 재판장이 직접 사형을 집행까지 해야 한다면, 사형 선고 자체가 없어지거나 현저하게 줄어들 것이다. 그 연민의 요구를 근본적으로 거부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사형집행인인들 어찌 마음 편안한 일을 하는 것이겠는가. 사형수를 눈앞에서 보고 죽음을 확인해야 하는 집행인은 죽음이라는 사건에 대한 기본적인 연민에도 불구하고 자본과 직업이라는 일종의 권력 구조 속에 있기에 피치 못하게 사형을 집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연민의 목소리는 늘 가슴 속 깊은 곳에 남아서 꿈틀댄다. 오랫동안 사형수 담당 교도관으로 일했던 고중열씨가 사형제가 폐지되어야 비로소 다리 뻗고 잘 수 있겠다며 과거의 아픈 상처를 고백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이의 고백은 직업이라는 이유로 인간에 대한 연민을 애써 외면하고자 했으나 결코 외면할 수 없었던 인간적 본성을 잘 보여준다. 사형제도는 폐지되고, 연민의 마음은 보존하고 키워나가야 한다. 사형이 폐지되고 치료가 확대될 때 사형해야 할 일 자체가 줄어들 것이다. 그것은 설령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인간이 인간으로 사는 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신동아>(08년 1월)에 소개된 전직 사형수 담당 교도관 고중열씨의 사연을 읽고 떠오른 생각을 적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