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수요산책

‘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촛불 가족의 가을(안수찬 한겨레 기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5:03
조회
346

안수찬/ 한겨레 기자



하늘이 깊어 밤이 고즈넉합니다. 가을입니다. “효진이 가슴에 멍울이 생기기 시작했어.” 발그레한 반달이 창문으로 들이치는데, 아내가 말합니다. 벌컥 놀랐습니다. “어, 어떻게 하지?” 열 살인데 당연히 그럴 나이랍니다. 어딘가에 부딪히지 않게 조심만 하면 된답니다. 정작 딸아이는 어른이 되고 있다며 무척 좋아한답니다. 아내가 마냥 웃습니다. 잠든 딸의 엉덩이에 뽀뽀해주는 일을 이젠 정말 그만둬야 하는 걸까. 늦된 아빠는 괜히 서운합니다.

소녀가 숙녀가 되는 가을, 아내는 소녀의 동생을 낳을 것입니다. 이제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태 안에서 노는 품새가 꽤 괄괄합니다. 세상 구경에 안달이 났습니다. 할머니는 꿈에서 아주 크고 훌륭한 잉어를 보셨답니다. 열 살 터울의 아이를 가졌으니 늦둥이라 해야 하겠지만, 남세스럽기는커녕 가슴이 뜁니다. 10년 전에는 아이도 어리고 아빠도 어려서 좋은 시간을 제대로 보내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꼭 육아휴직을 낼 겁니다. 시골 부모님은 손자를 바라는 눈치이지만, 장손인 그 아들은 그런 일에는 아무 관계없습니다. 저를 닮아 나중에 가출 같은 것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푸흡 웃을 뿐입니다.

지난달에는 멍멍이 요리를 지난주에는 미역을 바리바리 싸서 며느리에게 갖다 주셨습니다. 돼지고기도 먹지 못하던 서울깍쟁이는 시집온 뒤부터 그 고기를 아주 좋아하게 됐습니다. 시부모님은 텃밭에서 가꾼 주먹만 한 감자에 고추, 토마토 같은 남새도 한 상자씩 안겨 주셨습니다. 이름 짜르르한 마트에서 많은 돈 주고 사는 유기농 야채보다 훨씬 대단하다고 며느리가 추임새를 넣으면, 시골 어른들은 무척 좋아라 하십니다.

주말마다 텃밭에 나가시는 아버지는 올 가을, 환갑이십니다. 그리 높지 않은 자리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일평생을 바쳐 공무원 생활을 하셨습니다. 퇴직 때는 울기도 하셨습니다. 더 좋은 환경에서 자라고 공부했다면 더 높은 자리에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셨음에 틀림없습니다. 아버지는 큰돈을 들여 맏아들에게 외국 어학연수를 시켜줬습니다. 아들은 고작 중국으로 환갑 여행을 보내 드리려 합니다. 유럽 여행이 어떨까 생각했지만, 지금 다니는 신문사 월급으로는 턱도 없습니다. 입사 이후 겪은 대여섯 명의 신문사 사장들 얼굴이 지나갑니다. 밉습니다. 그러나 사원들이 직접 뽑아 올린 사장이니 딱히 탓할 노릇도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결정적일 때 불편합니다. 그걸 감수해야 진짜 민주 시민이라고, 기자인 아들은 매양 글을 써왔습니다.

사돈이 환갑 여행을 하는 동안, 장인 장모는 서울에서 큰일을 치릅니다. 작은 딸이 결혼 합니다. 저한테는 처제입니다. 처제의 부모님은 아주 예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성당에 나가시는 장인과 장모는 조카딸을 작은 딸로 맞으셨습니다. 아무 구분 없이 키웠습니다. 영리하고 총명한 작은 딸은 넉넉하고 성실한 웃음의 남자를 만났습니다. 장인은 요즘 기분이 좋으십니다. 장모는 아주 가끔 눈물을 비치십니다. 저는 아직 ‘동서’라는 말이 입에 붙지 않았습니다. 술잔을 나눠 기울이면 조금 쉬워질 텐데, 큰 사위와 달리 작은 사위는 소주 한잔만 마셔도 얼굴이 벌개집니다. 장인과 꼭 닮았습니다. 이래저래 처가에 술친구가 없어서 큰 사위는 조금 서운합니다.

그런 일의 가운데, 부부는 결혼 10주년을 맞습니다. 딸아이의 가슴이 봉긋해지고, 그 동생이 태어나고, 자매가 결혼을 하며, 부모가 환갑을 맞는 일의 사이에 결혼기념일이 있습니다. 결혼 때의 약속을 조금 미루기로 했습니다. 그림을 좋아하는 부부는 10년 뒤에 유럽 미술관 기행을 하자고 베갯머리에서 꿈같은 약속을 했습니다. 10년이 지난 가을, 그보다 더 중한 일들이 많이많이 생겼다는 핑계로 돈과 시간의 부족을 감춥니다. 아내는 학위 논문 제출을 뒤로 미루고, 남편은 담배 끊는 일을 뒤로 미룹니다.

밤의 어둠이 깊으므로, 내일의 하늘이 푸를 것을 압니다. 나이가 들면 왜 보수적으로 변하는지 이제 이해합니다. 자라는 딸과 태어날 생명과 같이 늙어가는 반려자와 노년을 보내는 부모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좀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사람을 볼 때도 누구의 자식인지, 누구의 부모인지 먼저 생각합니다. ‘개인’을 보지 못하고 ‘씨족’만 생각한다고 누가 타박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한때 사회주의자였으며 아직은 민주주의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면서도, 어느새 ‘가족주의자’가 되어가고 있음을 고개 흔들어 부정할 수 없습니다.
조계사 촛불 수배자 농성단 모습
사진 출처 - 한겨레

다만 가족주의에도 ‘계급성’이 있음을 믿습니다. 막대한 재산을 물려줄 아들을 지키기 위해 사회적 자원을 총동원하고, 세상 모든 이를 하나님의 자식과 악마의 자식으로 후려치며, 친미반공을 신념화하는 이들만 형제로 삼는 사람들의 배타적 가족주의와 저의 그것은 분명히 다르다고 믿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나의 자식과 부모만큼 소중하며 그 신뢰 위에 가족과 다름없는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는 믿음이 진정한 가족주의라고 믿습니다. 다툼과 언쟁이 없을 수 없지만, 삶의 걸음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염두에 두는 ‘코뮨주의’의 원형이 바로 ‘열린 가족주의’에 있다고 확신합니다.

지난봄과 여름, 피로 맺은 가족의 미래를 생각하며, 동시에 그런 염려를 흉중에 품은 다른 가족을 모두 아우르며 ‘촛불 가족’이 탄생했습니다.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면 어느덧 세월이 되는 슬픔처럼, 그런 일이 있었나 아련해질 것 같기도 합니다. 이번 가을, 그들은 각자의 일로 많이 바쁩니다. 직장과 학교와 가정에서 치러야 할 일이 많습니다. 촛불 가족은 서로 나눈 약속을 조금 뒤로 미루기로 했습니다. 직장을 구하면, 결혼식이 끝나면,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님 환갑을 챙기고 나면, 그 다음에 만나 안부를 묻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가족이라면 반드시 챙겨야 할 일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목소리 조금 더 높여 외친 딸, 자랄 때부터 괄괄하여 분을 못 견딘 아들, 퇴근 뒤에도 인터넷을 누비며 바른 이야기 퍼다 나른 남편, 말리는 손도 뿌리치고 아이를 안고 거리로 나섰던 아내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조계사에 있고, 방송국에 있으며, 아직도 거리에 있습니다. 제 가족만 챙겼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용기 있게 치러낸 촛불 가족입니다. 그들은 바로 당신을 위해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열린 가족주의’를 인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고초를 치르고 있습니다.

2008년 8월 22일 현재, 모두 1524명이 불법 체포됐습니다. 이 가운데 29명이 구속됐습니다. 10명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평범한 ‘시민’들입니다. 보석이나 집행유예로 풀려나온 이들도 있지만, 아직도 20여명이 갇혀 있습니다. 입건됐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두려움과 외로움에 떠는 이들이 수백 명입니다. 민변 법률지원단 소속 변호사들이 법률상담을 하고 있지만, 그들이 진짜 기대고 싶은 것은 법이 아니라 촛불 가족입니다. 아내의 부른 배를 쓰다듬고, 자라는 딸의 머리를 매만지며, 늙은 부모의 어깨를 주무르는 그 손길이 필요합니다. 능멸의 눈으로 그들을 잡아 가둔 ‘배타적 가족주의자’들에게 세상 다수의 행복을 꿈꾸는 ‘촛불 가족’이 이번 가을에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은 끌려간 이의 아픔을 덜고 돕는 일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코뮨입니다.

촛불 가족은 ‘큰 어른’이 아쉽기도 합니다. 대신 맞고 대신 끌려가며 대신 갇히겠다고 나서는 어른이 없는 듯 하여 마음이 허전합니다. 제자를 끌고 가는 경찰을 막아서는 교수, 감옥 생활에는 이골이 났으니 차라리 나를 잡아가라고 나서는 정치인이 그립습니다. 운동의 위기를 말하지만, 진짜 운동은 ‘대신 죽는 용기’에서 비롯하는 것임을 그 분들이 까맣게 잊어버린 듯 하여 안타깝습니다. 시공을 초월하는 리더십의 전형은 이끌고 보살피면서 고난의 순간에 대신 십자가를 지는 예수에게 있음을 그들 모두 망각한 듯 하여 서럽습니다. 지난 10년간 많이 늙으셨겠지만, 그래도 어른 노릇 하여 분탕질을 꾸짖지 못하고 그저 수염만 매만지는 모습에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구들방을 박차고 나와 ‘이 놈’하고 호통 치실 것을 믿어 봅니다. 그때까지는 젊은 식구끼리 의지가 되어 지내야 합니다. 가을을 견디고 겨울을 버티면서 촛불 가족의 재회를 준비해야 합니다. 광우병 대책회의에서 촛불 구속자 후원금을 모으고 있답니다.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아 도움이 많이 필요하답니다. 우리은행 1002-437-404837 (예금주: 천웅소)를 사용하면 됩니다. 입금할 때 ‘촛불 구속자 후원’이라 쓰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하겠지요. 변호사 비용이나 영치금으로 두루 쓰일 것입니다. 그 곳에 들어가는 돈은 법의 허울을 덮어 쓰고 배타적 권력을 휘두르는 이들과 맞대면하는 촛불 가족에게 또 다른 촛불이 될 것입니다. 내일의 하늘이 깊고 푸를 것을 알기에 우리는 이 밤의 고즈넉함을 저린 가슴으로 견디어 낼 수 있습니다. 촛불 가족은 진정한 연대의 힘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