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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5년을 어떻게 기다리지?”(신하영옥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정책팀장)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4:54
조회
198

신하영옥/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정책팀장



중학교 2학년 딸아이가 광우병협상이 타결되고 촛불이 막 타오르기 시작하던 시점에 던진 질문이었다. 처음엔 질문의 의미를 파악 못해 잠시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잠시 후, 그 의미가 파악된 후 난 좀 허둥거렸다. 이유는 그저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그 나이의 나로서는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질문을 하는 딸에 대한 놀라움과 기쁨, 다른 하나는 현 정부 들어 소주잔 기울이며 열심히 뉴스 보며 개탄만 하고 있던 소위 운동 한답시는 나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0교시, 야자부활, 방과 후 교실 영리단체에 허용’ 그리고 광우병 미국소의 수입에 대운하의 문제까지 조목조목 나름의 논리로 따지는 딸을 보면서 ‘컴퓨터만 한다고 타박할 일은 아니구나...’ 하는 위안을 받았다면 너무 오버인가? 그러나 그 날 이후 딸과 정치를 주제로 대화가 통하고 관계는 더욱 살가워졌다. 나는 딸이 자랑스럽고 딸은 엄마의 일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뉴스를 함께 보며 흥분, 분노하고 5년을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 중에 있다.

그러던 딸이 오늘 6/10 100만 촛불문화제에 참석하자고 했더니 안하겠다고 한다. 그 이유는 지난 5월말 경찰의 과잉진압과정에서의 시민에 대한 폭행, 특히 여대생에 대한 군홧발 폭행을 보고나서 무서워졌단다. 시민에 대한 무차별 폭행을 보고 누구나 가슴 한 구석에서 서늘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같이 참석하고 싶었지만 굳이 설득하지 않았다.

“걔네들은 트라우마가 없어서 그래”
“난 아직도 시위를 나가려면 무서워”

지난 6월 5일 72시간 릴레이 문화제를 앞두고 5월 31일 물대포현장에 있었던 386세대 활동가들의 말이다. 물대포를 쏘아대자 “온수! 온수!”를 외치고 경찰이 해산을 종용하자 “노래해!”, “개인기!”를 외치던 풍자와 해학이 넘치던 시위대를 묘사하면서 한 자조 섞인 말이다.

그렇다. 우리에겐 트라우마(상처)가 있다. 군부독재의 정권연장을 저지하기 위해, 거의 매일 거리로 나갔던 우리들의 시위양상은 현재와는 사뭇 달랐고, 전투경찰, 백골단, 최루탄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 당시 열심히 거리로 나섰던 사람들 중에는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폭력을 경험해야 했다. 거리에서, 닭장차 안에서 군홧발과 곤봉에 짓이겨져야 했고, 발밑에서 씩씩대며 어지러이 돌아다니거나 내 머리통을 맞출 것만 같던 최루탄은 그 당시의 ‘시위’를 두려움으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그런 두려움을 직면해야 하는 것은 쪽팔림, 비참한 고통이다.

촛불문화제를 통해 ‘시위’ 양상이 많이 달라졌음을 실감하면서, 어쩌면 저들은 정말 ‘시위’에 대한 상처가 없어서 저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도 해본다.

가정폭력피해여성들이 그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 상황을 견딜 만해서가 아니라 두려움의 노예가 되기 때문에 그 상황을 벗어날 엄두조차 못 내는 것이다. 도저히 어찌해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거대한 벽, 힘에 대한 무력감이 원인이다. 그것이 폭력이 갖는 잔혹함이다. 인격의 파괴, 존엄성의 파괴... 두려움과 두려움을 느끼는 자신을 외면하기 위해 심리적 노예상태를 자초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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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새벽 서울 경복궁역 부근에서 광우병위험 미국산쇠고기 수입반대 및 재협상을
요구하는 학생들이 스크럼을 짠 채 경찰 살수차(물대포)를 맞으며 버티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80년대 시위를 경험했던 우리는 인정하기 싫지만 심리적으로 ‘시위’=‘두려움과 긴장’ 이라는 도식의 노예상태는 아닌지 모르겠다. 그나마 그런 두려움을 앞두고도 또 다시 ‘시위’ 속으로 들어가는 용기를 가진 것은 불행 중 다행이지만, 트라우마가 없는 요즘의 참여자들이 부럽고, 여전히 두렵다는 누군가의 말에 팍! 공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나, 우리를 들여다봐야 하는 것은 슬픔이다.

“상처는 절대 없어야 해, 상처는 삶에서 많은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 우리 아이들은 상처 없었으면 좋겠어.”

경찰의 폭력진압에 항의하기 위해 경찰청장 퇴진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하며 나누었던 얘기들이다. 여성으로서, 사회에 저항하는 세력으로서, 우리는 개인적, 공적 상처들이 많았다는 얘기다. 상처를 극복할 힘이-유머든, 해학이든, 내공이든-부족하고 방법을 몰랐던-가르쳐주지도, 있지도 않았던-우리들은 상처를 보지 않기 위해 도피를 택한 경험들이 있고, 그 도피는 또 다른 상처로 우리 안에 각인되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지난 40여년은 그 상처를 직면하고 치료하기 위한 몸부림의 과정이었고, 그러한 과정을 ‘부당한 세상에 적응하기 힘들어서...’ 라는 말로 포장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체육관을 다니며 ‘때리는 법’을 배우는 것은 나름 상처에 저항하기 위한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시대적으로 상처를 많이 만들어내는 상황에 던져져 봤던 우리는 그래서 내 딸들만큼은 상처가 없는 청정지대에서 자라길 바란다. 그러나 경찰 군홧발에 짓밟힌 여대생과 그 장면을 화면으로 본 많은 아이들은 간접적으로 폭력을 경험하고 상처를 내면화 했을 수 있다. 딸아이의 참석거부이유가 바로 그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폭력으로 인한 상처는 여성이나 아이만이 아니라 남성, 어른, 경찰도 예외는 아니다. 양천구의 한 전투경찰은 선배들의 구타와 성추행으로 괴로워하다 자해까지 시도했었다. 자신을 해치면서 까지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추행부분은 발뺌을 하는 경찰은 또 한 번 그 경찰개인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군홧발로 여대생을 폭력 한 것에 대해 경찰은 사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사과의 대상은 당사자 여대생이 아닌 여대생이 다니는 대학의 총장이었다. 이건 무슨 황당한 시츄에이션인가? 대체 왜 사과를 했을까? 국내 유수의 대학 총장을 구슬리면 여론이 잠잠해질 것이라 기대했었나보다. 국민을 우습게 여기고 힘과 권력에 아첨하는 경찰의 실체가 여지없이 드러나 절망스럽다. 그걸 또 무슨 자랑이라고 팝업까지 걸어 놨다. 감 떨어져도 한참 떨어진다.

직접 폭력을 당한 시민들, 그 장면을 통해 폭력에 대한 두려움과 무력감을 느꼈을 더 많은 국민들은 건강하고 행복하고 상처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빼앗겼다. 그리고 폭력을 행사한 경찰은 가해자로서의 상처를 안고 살아갈, 혹은 지속적 가해자가 될 상황에 놓여있다. 이들도 피해자다.

공권력의 행위(정치적 행위)가 개인적 삶들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이런 경우 행위의 책임자는 마땅한 책임을 져야하고, 행위의 재발방지를 위한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어청수 경찰청장은 사퇴하고, 경찰 내부 폭력문화를 근절하기 위해 조치해야 한다. 나아가 국가에 의한 폭력근절 시스템과 문화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나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없을 때 민주적으로 각성된 개인들의 집단적 행위가 필요하다. 개개인의 주권으로부터 국가의 권력이 구성됨을 명확히 알려주는 것과 더불어, 국가 권력의 역할은 개인의 주권을 보호해야함을 알려 주고 실현될 수 있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촛불문화제는 시작일 뿐이다. 그동안 법/제도 등 민주주의를 담을 그릇을 만들기 위한 싸움을 해왔다면, 지금은 민주주의의 내용을 만들기 위한 싸움을 하고 있다. 여성주의는 말 한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개인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 안전할 권리, 상처 없이 행복할 권리를 생활 속에 실현하는 것, 그것을 위해 국가가 노력하는 것이 정치임을 촛불문화제를 통해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앞으로 5년...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