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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세력, 뼈아프게 성찰하는 기회를 가져야... (이유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2 17:27
조회
211

이유정/ 변호사, 인하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솔직히 이번 대통령 선거에 대해서는 할 말도 없고, 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누구 하나 마음에 드는 후보도 없을뿐더러, 그마나 정책대결의 시늉이라도 하던 과거 대선과 달리 후보들의 정책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진흙탕 싸움만 구경하고 있으려니 마음이 우울해서 신문도 보지 않았다. 친 재벌 정책을 옹호하는 후보가 서민경제를 살리겠다고 하고 노동단체가 지지성명을 발표하지 않나, 좌파정부라는 오해를 받고 있는(좌파의 뜻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좌파정부라는 비난이 근거 없는 오해라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집권여당의 후보가 세금폭탄 없는 나라(세금폭탄은 부동산 가격이 갑자기 올라서 재산이 엄청 늘어난 사람이나 맞는 폭탄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를 만들겠다고 하지 않나 온통 뒤범벅이 되어 도무지 정체성을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다보니 내 주변에는 대통령이 누가 되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고, 후보자 12명 이름 위에 모두 도장을 찍고 나온다는 사람도 있고, 투표하러 가는 대신에 여행이나 가겠다는 사람도 많았다.

본래 민주주의란 국민의 참여에 의해 그들의 의사를 대변할 수 있는 대표자를 선출하는 것이 그 핵심이고, 5년에 한번 돌아오는 대통령 선거는 모든 국민이 투표를 통하여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시하는 날이기 때문에 축제일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는 공약이나 정책은 아예 뒷전이고, 어떤 후보가 국민의 의사를 잘 대변할 수 있는가하는 고려도 완전히 무시된 채 선두를 달리는 후보의 범죄혐의와 거짓말을 둘러싼 첨예한 공방만 계속되었고, 그 후보는 당선이 된 이후에도 특검에서 조사를 받고 최악의 경우 당선무효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벌어지게 생겼으니, 이런 상황에서 진행되는 선거가 축제일이 될 리 만무하다. 이처럼 유권자들에게 외면당하는 선거에서 뽑힌 대통령이 국민의 의사를 제대로 대변할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어차피 국민들은 “그 놈이 그 놈”이고 “어디 깨끗한 놈이 있나”라는 정치에 대한 혐오와 반감에 젖어있는 상황이다. 그야말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그대로 보여준 선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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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개표현장
사진 출처 - 뉴시스



대통령 선거의 결과가 어찌되든 민주화 세력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이런 위기에 놓이게 되었는지 뼈아프게 성찰하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구체적인 실천과 대안 없이 열정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상대적으로 도덕적이라는 점만으로 모든 잘못이 용서되리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누린 기득권에 취해 자만한 것은 아닌지. 수구 세력들이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자”는 구호를 내세우고 집결하는 동안 소위 민주화세력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국민의 마음을 얻고 목소리를 듣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였는지...

선거의 결과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적인 기대를 저버린 현 정부에 대한 실망감의 표현일 뿐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포기는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민주주의에 대한 강렬한 열망과 기대가 더 큰 회의와 실망으로 나타났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한탄하거나 선거결과에 실망할 때가 아니라, 다시 처음의 자세로 돌아가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치밀하게 준비를 시작할 때이다.

한미자유무역협정, 노동시장의 위기, 빈곤층의 문제, 환경위기, 부패한 재벌의 문제 등 경제. 사회적 기득권층과 그 나머지 국민들의 이해가 대립되는 중요한 의제들이 수없이 널려 있다. 민주화세력은 이러한 의제들 속에서 누구의 입장을 대변할 것인가를 명확히 정하고 그들의 동의와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구체적이고도 실천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여야 한다. 10년 동안의 집권 경험은 유익한 자산이 될 것이다. 현 정부가 그런 것처럼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을 하는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자기주장만 옳다고 목소리를 높일 것이 아니라, 몸을 낮추어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일상의 삶을 들여다보고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선거가 끝나도 삶은 계속되고 사람들은 언제나 더 나은 세상을 꿈꾸기에, 갈 길은 아직 멀기만 하다. 지금까지 꽤 먼 길을 걸어 왔는데 실망하거나 포기하고 주저앉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