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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둘 달린 모자와 권총 (이광조)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19 09:59
조회
394

이광조/ CBS PD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재벌그룹 회장의 보복폭행 사건을 보면서 두개의 이미지가 계속 머리 속을 맴돈다. 재벌그룹 회장이 폭행 현장에 쓰고 있었다는 별 두개 달린 모자와 금장식이 달린 권총이 그것이다(회장님으로부터 다짜고짜 뺨을 얻어맞았다고 증언하고 있는 업소 사장은 ‘회장님이 금장식이 달린 권총으로 자신을 위협했다’고 진술했지만 경찰에서는 총기 소지에 대해선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하다).

군대에 가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대장이니 중장, 소장, 준장이라고 하는 계급에 별이 각각 몇 개나 달렸는지, 중장이 높은 건지 소장이 높은 건지, 헷갈릴 수도 있겠지만 군대에 다녀온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별의 개수와 서열 정도는 훤히 꿰고 있을 것이다. 회장님이 머리에 쓰고 있었다는 별 두개는 소장에 해당된다. 대장이 별 네 개, 중장이 별 세 개, 그 다음이 소장이다. 이왕 ‘가라’로 쓰고 다니려면 별 네 개짜리 대장 모자를 쓰지, 왜 별 두개짜리 소장 모자를 썼을까?

요즘 군대 생활을 하는 청년들의 경우에는 그 이유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60년대와 70년대, 아니 80년대와 90년대에 군대에 다녀온 대한민국 남성들은 회장님이 소장 모자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비슷한 연상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박정희 소장과 전두환 소장. 군 계급 상으로는 별 네 개인 대장이 최고지만 우리의 현대사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인물들은 모두 별 두개짜리 소장이었다.

군대의 생리를 조금이라도 아는 예비역들은 여기에 이런 해설을 붙인다. ‘사단장은 휘하에 자신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에 군에서는 소장이 실권자다.’ 회장님은 왜 소장 모자를 썼을까. 두 전직 대통령을 흠모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스스로를 사단장 급으로 생각해서 그랬을까. 그 속내를 알 수는 없지만 가죽점퍼에 소장 모자, 그리고 손에 든 권총. 어디서 많이 본 모습 아닌가.

요즘은 사정이 다르겠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군 사단장은 군대 안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사회 전체에서 엄청난 권세를 누리던 실력자였다. 사단이라는 독립된 왕국에서는 ‘제왕’ 비슷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3, 40대 남성들의 술자리에서 군대 얘기가 나올라치면 ‘제왕’들의 권세에 관한 갖가지 증언이 줄을 잇는다. 똑똑한 사병을 자식의 가정교사로 쓰는가하면 부인에게도 병사를 비서로 붙이고 갖가지 개인적인 용무에 병사들을 종 부리듯 부려먹었다는 고발부터 각종 군 장비를 사적으로 전용했다는 얘기까지. 누가 그런 일로 처벌받았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지만 군 고위 장교들의 이 같은 행태는 지난 몇 십 년 동안 우리사회에서 상식으로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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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복 폭행 사건에 연루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사진 출처 - 한겨레21


 

사회 전체를 지배했던 ‘복종’의 논리

술자리에서 군대생활을 회고하며 때로는 분노를 표출하기도 하고 때로는 무용담을 늘어놓기도 했던 별 볼일 없는 사병 출신들은 이런 불의한 상식과 현실에 순응해야만 이 땅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래서 군대에 대한 비판은 오랫동안 술자리의 ‘뒷담화’에서만 허용되던 ‘레퍼토리’였다. 그렇게라도 배설하지 않으면 어떻게 제 정신으로 이 땅에서 살 수 있었겠는가. 오랫동안 이 땅의 남성들은 얼차례와 군사정권의 치세를 통해 복종의 미덕을 몸으로 익혔다. 더럽지만 어쩌겠는가. 세상이 그런데. 그 권세가 얼마나 대단하고 항거에 대한 응징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군대에 갔다 와야 사람이 된다’는 얘기가 나왔을까. 군대뿐만 아니라 우리사회 전체가 명령과 복종, 폭력이라는 단순한 원리에 의해 작동되던 시기에 ‘복종’은 생존과 밥벌이를 위한 가장 중요한 미덕이었을 것이다.

가진 사람들이 자식 군대 보내기 싫어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지만 대한민국 군대도 우리사회도 많이 변했다. 군사 쿠데타를 걱정하는 사람도 없는 것 같고 군사 쿠데타를 정당화했던 북한의 위협도 요즘엔 통 먹히질 않으니 말이다. 군 복무 기간도 많이 줄었고 군 출신들이 떵떵거린다는 얘기도 들리지 않는다. 6월 항쟁 20주년을 맞는 2007년, 불과 20년 만에 세상이 이렇게 변했다는 게 어떨 땐 잘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대통령을 인격적으로 모독해도 아무 탈이 없는 세상 아닌가.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쉽게 변하는 건 아닌 듯 하다. 상명하복과 저항에 대한 가차 없는 응징, 그리고 폭력. 군사독재 시절, 군대는 물론 우리사회 전체를 지배했던 이 힘의 논리가 최근 재벌그룹 회장의 한밤 활극을 통해 불쾌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경제가 모든 가치를 압도하는 현실에서 우리의 거대 기업과 회장님들이 혹시 과거의 사단과 사단장 같은 존재가 돼 버린 건 아닌지. 북한의 남침위협이 허물어진 자리에 무한경쟁의 논리가 들어서고 국가경제를 위해 회장님들이 회사의 자원을 사적으로 전용하거나 노동자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 정도는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야 하는 또 다른 복종의 시대가 시작된 것은 아닌지. 혹시 회장님에게 조인트를 까이는 중역들은 안 계신지. 갖가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나의 이런 생각들이 시대착오적인 망상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