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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그 많은 철거민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이광조)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09 15:26
조회
501

이광조/ CBS PD



‘언젠가는 떠나야지’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서울생활이 벌써 20년이 넘었다. 대학입학 신체검사를 위해 학교 앞 여관에서 친구들과 함께 자던 날, 처음 보는 양변기 위에 쪼그리고 앉아 볼일을 봤던 ‘촌놈’이 이젠 양변기가 아니면 불편해서 볼일을 못 본다. 하지만 그렇게 이 도시에 익숙해진 지금도 나는 여전히 서울을 떠나는 꿈을 꾸고 있다.

20대와 30대를 고스란히 지낸 곳, 최루탄 속에 울고 웃던 추억과 친구들이 있는 이 곳을 나는 왜 늘 떠나고 싶어 하는 걸까. 아무래도 첫 인상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어릴 적 시골생활의 넉넉함과 재미를 만끽했던 내게 서울의 첫인상은 황량하고 단조롭고 더러웠다. 어디 그 뿐인가 대학입학과 함께 시작된 하숙생활은 내겐 마치 감옥처럼 느껴졌다. 낡고 보잘 것 없어도 널찍한 방에 커다란 마당, 여기 저기 널린 공터에 익숙했던 내게 제기동의 하숙촌은 숨 막히는 감옥 그 자체였다. 1985년 2월말 손바닥만한 하숙집에서 맞은 첫날밤, 친구와 함께 ‘뭐 하러 이런 데 왔나’며 한숨을 내쉬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뒤로 20여 년 동안 이사를 몇 번이나 했을까. 하숙생, 자취생들이 옮겨 다니는 걸 ‘이사’라고 하기도 뭣하지만 내 집 마련의 꿈, 집에 대한 집착은 그때부터 시작된 게 분명하다. 더러는 조금 싼 집, 더러는 혼자 지낼만한 집, 또 더러는 경찰의 눈을 피해 리어카에 짐을 싣고 많이도 돌아다녔다. 30번을 넘게 옮겨 다녔으니. 제기동에서 보문동으로, 보문동에서 월곡동으로, 월곡동에서 회기동, 이문동, 석관동을 거쳐 종암동, 안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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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도시환경 정비를 명목으로 상계동 재개발에 들어갔다. 상계동이 철거된지 20년이 지났지만 당시 이곳에서 내몰린 이들은 여전히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86년 10월 포크레인을 동원한 철거반원들이 상계동 173번지 가옥을 부수고 있다.
사진 출처 - <상계동 올림픽> 화면 캡처, 오마이뉴스


 

대학시절 시골 학생들에겐 재래시장이 있는 서민 주거 지역이 단연 인기였다.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5만원 정도면 부엌이 달린 번듯한 방 한 칸을 빌릴 수 있었고 주인만 잘 만나면 반찬도 곧 잘 얻어먹을 수 있었다. 시골 마을에 비하자면 여전히 좁고 답답한 동네에 코딱지만한 방이었지만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울고 웃고 지내는 동안 차츰 서울의 변두리 풍경과 사람들에게 정을 붙였다. 그러면서 내 자취방만한 곳에서 한 가족이 모여 사는 가난한 이웃들도 알게 되었고 재개발 바람에 그 조그만 터전마저 잃고 길거리에 나앉게 된 상계동과 목동의 철거민들도 만나게 되었다. 포크레인과 용역깡패, 화염병과 돌. 80년대 시위 현장은 어디나 살풍경이었지만 철거민들의 투쟁현장은 외면하고 싶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 격전장 그 자체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목숨을 잃었을까.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한을 품고 세상을 저주했을까.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은 그들의 절박함을 그 때는 제대로 느끼지 못했었다. 사람이 있는 집을 포크레인으로 찍어 누르는 땅주인과 건설업체들의 무지막지한 폭력과 그 폭력을 수수방관하고 한 술 더 떠서 거들어주는 경찰을 보며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이 느꼈을 분노와 절망은 지금도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보금자리를 잃고 경인 고속도로 변 허허벌판으로 쫓겨 난 상계동 철거민들은 당국이 판자촌을 때려 부숴버려 땅굴을 파고 지내기도 했으니...

가난한 이웃들이 모여 살던 상계동과 목동, 금호동과 옥수동, 월곡동과 동선동, 난곡과 성남에는 이미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섰고 가내공장들이 밀집해 있던 성수동은 지금 철거가 한창 진행 중이다. 비좁고 낡은 집들이 없어지고 일년 내내 눅눅한 지하방들이 없어지고 쾌적하고 살기 좋은 아파트가 들어서는 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하지만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높고 번듯한 아파트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성남과 목동이 천지개벽을 하고 민주화운동, 빈민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대통령도 하고 장관도 할 만큼 세월이 변했지만 가난한 이웃을 쫓아내고 격리시키는 폭력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는 듯 하다.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늦기 전에 나도 아파트 한 채 장만해야지’하는 욕망만이 남았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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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국방부는 굴착기 2대를 동원해서 대추분교 철거작업을 시작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폭력적인 철거에는 늘 ‘사유재산 보호’를 앞세우는 사람들이 대추리에서는 국익을 앞세워 농민들을 땅에서 쫓아내고 멀쩡하게 잘 사는 마을을 지역개발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갈아 엎고 있다. 서민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던 대통령은 ‘건설업체도 이익을 남겨야 하는 것 아니냐’며 폭력적인 재개발과 건설업체의 폭리에는 눈을 감았고 그 와중에 공익을 앞세운 신도시개발 사업은 사상최대의 합법적인 도박장이 되어 버렸다. 이 도박장에는 물론 돈 없는 사람은 출입금지다. 삶의 보금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그 많은 철거민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