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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1차 중동 전쟁 신화 벗기기(홍미정 한국외대 연구교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4:52
조회
245
1차 중동전쟁 60주년 기념

홍미정/ 한국외대 연구교수



1948년 5월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 종결과 동시에 발발한 1차 중동 전쟁은 아랍 국가들이 공모하여 이스라엘 국가(팔레스타인 땅의 56.47%)를 파별시키기 위해서 벌인 사건이 아니었다. 아랍 국가들은 처음부터 그럴 의사가 없었고, 그럴만한 군사력도 없었다. 이 전쟁은 ‘1947년 11월 유엔 분할안이 아랍 영역(팔레스타인 땅의 42.88%)으로 명시한 땅을 어느 국가가 차지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1948년 영국의 위임통치 종결과 동시에 팔레스타인 땅에서 발발한 전쟁은 ‘수적으로 압도적이며 통합된 아랍 군대가 모든 유대인들을 지중해 속으로 처넣으려한 사건’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전쟁에 대한 ‘다윗과 골리앗’ 버전인, ‘통합된 아랍의 전쟁위협’이라는 선전은 위대한 이스라엘, 유대 민족 국가 창설 신화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오늘날에도 이 신화는 이스라엘인들의 정체성을 강화시키면서, 이웃 아랍인들에 대한 이스라엘인들의 태도를 결정하는데 탁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신화는 근거가 전혀 없으며, 놀랄만한 것도 없다. 이스라엘은 단독으로 이 전쟁을 치룬 것이 아니었으며, 국제 사회로부터 막대한 외교적, 물질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분열되어 있었고, 매우 허약한 상태였다.

영국 위임 통치 시절 팔레스타인의 대의를 위해서 싸우는 사람들은 오직 팔레스타인 게릴라들 뿐이었다. 영국 위임 통치 당국은 전략적으로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을 무력화시킨 반면, 시오니스트 게릴라 조직들에게는 잘 무장하고 훈련받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였다. 시오니스트들은 대부분 제 2차 세계 대전 중 영국군 소속으로 전투 경험을 획득하였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국의 위임 통치가 종결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자는 영국으로부터 미국으로 대체되었다. 미국은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 선포 즉시 이를 승인하였다. 이후 오늘날까지 미국은 이스라엘의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팔레스타인 민족회의를 통해서 팔레스타인 정부를 구성하였고, 1948년 10월 1일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은 물론이고 트랜스 요르단과 이라크 정부도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 승인을 거부하였다.

그러므로 아랍 군대들이 팔레스타인의 대의를 위하여, 이스라엘로부터 팔레스타인 땅을 방어하기 위한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작전을 수행했다는 신화는 사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사실 아랍 국가 지도자들은 팔레스타인 형제들을 도와야한다는 아랍 대중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조차 않았다. 1948년 아랍 국가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영국이 철수할 즈음에 유엔 결의가 아랍 영역으로 명시한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자국의 국경들을 확장하려고 시도하였다. 유대 국가에 대항하는 아랍 통합이라는 허구적인 선전은 이스라엘에게 ‘아랍의 적들에게 대항하여’ ‘이스라엘의 실체를 강화’시켜야한다는 명분만을 제공해왔을 뿐이었다. 당시 영국의 위임 통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이스라엘을 무력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위협할만한 토착 팔레스타인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영국과 시오니스트들이 이미 이러한 토착 팔레스타인 세력들 대부분을 살해하거나 추방하였기 때문이었다.

1948년 전쟁 초기에 이스라엘 군대는 지중해를 통해서 보급품과 장비들을 받아들였으며, 약 2만 7천 명으로 구성되었고, 잘 정비된 조직 체계, 2차 세계 대전에 참가하여 잘 훈련된 병사들과 막대한 재정적 원조와 정교한 군사 전략을 갖추었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정착촌 예비군 약 9만 명도 보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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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가자에서 '나크바'(대재앙의 날)를 맞아 주민들이 거리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대형 깃발을 함께 들고 있다.
사진 출처 - 뉴시스


반면 1948년 전쟁에 참가한 아랍 연합(이집트, 트랜스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군대 대부분은 전투 경험이 거의 없었고, 적당한 무기도 없었으며, 주로 지역 치안을 담당했던 경찰들로 구성되었다. 아랍 연합 군대 중 어느 정도 잘 훈련되고 적당한 무기가 있는 군대는 영국군이 훈련시킨 트랜스 요르단 군대뿐이었다. 전쟁 초기에 배치된 약 2만 3백 명의 아랍 연합 군대 중 트랜스 요르단 군대는 4천 5백 명 뿐이었다. 그런데 당시 트랜스 요르단군 사령관은 영국인 존 글럽(John Glubb)이었다. 영국이 1921년에 6개월 동안 매달 5천 파운드의 보조금을 압둘라 아미르에게 지급함으로써, 압둘라 아미르는 1921년에 트랜스 요르단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1921년부터 1956년까지 요르단군 사령관은 영국인들(F.G Peak와 John Glubb)이 담당하였다. 당시 이 영국인 군사령관들이 요르단 정치에서 막강한 결정권을 휘둘렀다.

트랜스 요르단 군대와 이스라엘 군대 사이의 전투는 유엔 분할안이 아랍 국가 영역으로 명시한 팔레스타인 지역을 이스라엘이 공격하면서 발발하였다. 이 전쟁의 결과 이스라엘은 영토를 유엔 분할안이 아랍 영역으로 명시한 지역으로 깊숙이 확장하여 팔레스타인 전 영토의 78%를 차지하였고, 나머지 22% 중 트랜스 요르단이 서안(West Bank)을, 이집트가 가자(Gaza)를 차지하였다. 결국 이 전쟁은 아랍 연합 국가들이 이스라엘 국가를 파괴시키려했던 사건이 아니었고, 1947년 유엔이 아랍 국가 영역으로 명시한 지역을 서로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서, 이스라엘과 아랍 각 국가들이 벌인 전쟁이었다. 트랜스 요르단이 주도하는 아랍 연합군이 이스라엘 국가를 파별시키려고 했다는 신화는 허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