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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는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이찬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2 17:29
조회
271

이찬수/ 전 강남대 교수, 현 종교문화연구원장



일본에 사나다 요시아키(眞田芳憲)라는 법학자가 계시다. 내가 일본에서 일 년간 연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고, 일본에 머무는 동안에도 이리저리 큰 도움을 주고 계신 분이다. 일본의 주오대학(中央大學) 법대(한국으로 치면 고려대 법대)에서 은퇴하신 뒤, 지금은 WCRP평화연구소 소장으로 봉사하고 계신다. 로마법과 이슬람법 권위자시면서, 한국 종교에 대한 관심도 남다르다. 마치 옛 일본이 조선통신사를 고대하던 마음으로 나를 기다렸으며, 이제는 나를 한국 종교 선생으로 모시겠다고 진담 섞인 농담을 던지시기도 한다. 한국의 젊은 사람 앞에서 스스로를 낮출 만큼 인격적인 분이시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나이를 뛰어넘는 열정도 동시에 느껴지는 분이시다. 나는 요즘 매월 한국종교에 대한 논문을 준비해 그분을 비롯한 몇몇 일본 학자들과 함께 한국 종교 및 종교간 대화론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한 번은 종교의 역기능에 관한 논의 중에 사나다 선생이 상기된 얼굴로 자신이 평생 바쳐 일 해온 법률학에 대한 절망감을 토로하는 모습을 보았다. 일본 법조계 주요 인물의 절반가량이 자신의 제자이지만, 일본 사회는 더욱 실망스러워지고 있으며, 자신이 평생 바쳐 연구하고 가르친 법학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개탄스러워하셨다. 본래 정신과는 달리 현실에서의 법은 사회 정의 내지 인류의 평화와 거리가 멀다는 그분의 짧지만 강렬한 고백 속에서 내가 경험하고 있는 한국의 비슷한 상황이 중첩되어 떠올랐다.

이미 좀 알려지기도 했거니와, 나는 기독교계 강남대학교에서 기독교를 가르치다가 불상에 절을 했다는 이유로 재임용을 거부당했다. 교육부에서 나에 대한 재임용 거부는 객관적 사유에 근거하지 않은 부당한 처사이니 취소하라는 결정을 내리자, 학교는 다시 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행정법원에서도 동일한 결론을 내리자 이번에는 고등법원에 항소했다. 물론 학교 내 이런 강경파는 극소수이지만, 사태는 언제나 힘 있는 극소수의 목소리대로 흘러간다. 어쨌든 그로 인해 학교 측 변호사가 작성한, 이른바 항소용 준비서면이라는 것을 올 연말 동경에서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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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대학교



항소이유와 내용을 표현 그대로 요약하면, 기독교 시간에 기독교를 비판하고 타종교를 찬양하는 사람을 기독교 학교가 거부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교육부, 행정법원을 거치면서 더 이상 쓸 말이 없었는지, 이제는 내가 아예 기독교를 비판하고 타종교만을 찬양하는 반기독교인처럼 둔갑시키고 있었다. 항소장은 사건의 근본 맥락을 벗어난, 말 그대로 침소봉대 자체였다. 이전 내용보다도 더 유치해진 듯 했다. 동일한 내용과 이유로 연달아 패소했던 탓인지, 거짓에 가까운 자료들도 동원되었다. 어떤 것은 한심하기까지 했다. 몇 년 전인지 생각도 나지 않지만, 대학 후배가 자신의 직장 일이라며 원고를 요청하기에 ‘심볼리안’이라는 인터넷 사이트에 ‘사이비종교’에 관한 글을 보낸 적이 있었다. 동서양의 신비주의, 신화 등의 자료를 소개하는 사이트였다는 기억만 하고 하는데, 인터넷에 떠도는 자료를 구했는지, 항소장에서는 내가 이렇게 비기독교적인 사이트에 글을 올리는 비기독교적인 사람이라는 증거자료라며 내 글과 함께 인터넷 사이트에 대한 상세한 소개서를 제출했다. 내가 쓴 글의 내용은 사이비 종교를 비난만 하지 말고 자신의 ‘사이비성’ - 겉으로는 진리와 비슷해 보이지만(似) 속으로는 아닌(非) – 도 반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비교적 교훈적인 글이었는데, 우스운 것은 글의 ‘내용’이 아니라, 그 사이트에 글을 싣는 행위 자체가 문제라며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제출된 다른 증거자료들도 그런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긴 가만 보면 변호사가 그 내용까지 문제 삼을 능력은 없었던 것 같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 정도의 글이라면 지금까지 족히 수백 편은 썼을 텐데, 겨우 그 중에 한두 개를, 그것도 내용 핵심도 파악하지 못한 채 결정적인 증거자료나 되는 듯 제시하는 변호사의 수준 때문이었다. 인터넷을 더 뒤져서 내가 신문, 잡지, 인터넷 언론 등 기독교와 관계없는 수많은 곳에 기고하고 올린 글들은 왜 문제 삼지 않았는지 우스웠다. 이런 수준으로 무엇을 어떻게 변호하겠다는 것인지 웃음이 다 나왔다.

변호사가 종교에 문외한이라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항소장의 전체적 수준도 의심스러웠다. 객관적이지 않은 학교 측의 처사를 문제 삼은 교육부와 행정법원의 결정에 대해, 대학에는 자율성이 있어야 하며, 또 그 자율성에 따라 이루어진 재임용 심사에 심사자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취지로 글이 전개되었다. 마치 중학생 수준의 논리와 작문 실력을 보는 느낌이었다. 별 말을 다 끌어내는구나 싶었다. 그 논리는 결국 자가당착에 빠져, 강남대의 결정이 주관적, 자의적이라는 것을 대신 입증해주는 것 같았다. 한숨이 또 나왔다. 그저 즐기며 편안히 대응해야지 싶다가도,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은 나로서는 또 한 번 이 유치한 논쟁 속에 긴 시간 휘말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나를 더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도대체 법이란 무엇인가, 변호사는 무얼 하는 사람인가 하는 의구심이었다. 그들도 법학도를 꿈꾸고 법조인을 희망하던 시절에는 정의의 편에서 어려운 이를 돕겠노라는 순수한 열망에 불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법률 지식이 그저 하나의 직업이 되고 축재와 출세의 수단이 되는 순간, 변호사라는 직업은 수임료와 실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물신숭배자’가 될 가능성이 무엇보다도 커진다. 진리라는 것이 있다고 할 때, 동일한 진리의 이름으로 쌍방이 싸워야 하는 변호사들은 둘 중 하나는 잘못된 편에 설 수 밖에 없을 테니, 변호사는 태생적으로 진리와 정의를 온전히 실천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자기편 의뢰인에게는 기쁨을 줄 수 있겠지만, 상대방에게는 아픔을 줄 수밖에 없는 잔인한 직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사건 당사자에게는 인생이 걸리다시피 중요한 문제를 단 며칠 만에 다 파악하고 또 판단할 만한 능력이라도 있는 냥, 남의 인생 전체를 쉽사리 규정하는 직업적 분위기 역시 가당치 않게 느껴졌다. 나의 월권이고 오만일까.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변호사가 이러한 근원적 오류를 범하지 않고 법 본연의 정신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건을 맡을 때 절대로 돈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으로 인해 받지 않아야 할 아픔과 상처를 받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늘 마음에 품어야 한다. 사건 자체가 사회적 정의에 얼마나 부합하는가를 먼저 두루 진지하게 탐색한 뒤, 정의에 부합한다고 판단되면 그 때 양심을 걸고 정의를 위해 일해야 한다. 그것이 변호사이다. 그 때 생긴 수임료는 정당하고 떳떳한 대가가 될 것이다. 거꾸로 정의롭지 않다고 판단되면 변호를 맡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정의롭지 않은 일들은 법정에 설 일이 줄어들 테고 결국 자연 도태되고 말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변호사는 가난해지거나 적어도 부자는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풍요로운 가난의 길을 가는 것이 법조인의 길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이들이 사회를 정의롭게 만들고 법 본연의 정신을 사회 속에 ‘구체화’시켜 주지 않겠는가.

나는 변호사도 아니고 법률 공부를 한 적도 없지만, 법원 서류 한 두 번 받아보고는 대번에 느꼈다. 법조인의 현실적인 한계라는 것을……. 수십 년 법학을 연구하고 가르친 일본 법학계의 권위자 사나다 선생의 절망과 한탄도 대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한국의 변호사들에게도 정말 묻고 싶었다. 무엇을 위해 일하느냐고… 무엇을 하는 사람들이냐고…

물론 언제나 정의 편에 서려는 존경스러운 변호사들도 많다는 것을 잘 안다. 가능한 한 불의 편에 서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양심을 지닌 법조인도 못지않게 많을 것이다. 그래서 가난할 수밖에 없는 변호사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법조인이라는 것은 최소한의 양식을 가진 이라면 알 것이다. 삼척동자라도 알 것이다. 돈과 권력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진리 편에 서고자 하는 이라야 진짜 법조인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는 것을… 한 때 유행하던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라는 책 제목이 떠오른다. 정말 유치원 시절에 배운 삶의 이치에 충실했으면 좋겠다. 아니 그런 시늉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그런 기대와 희망은 품어도 되는 것일까. 하늘의 뜻을 실천하겠다며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된 이들도 어느 순간 직업형, 사업형 목사로 전락하고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거룩한 하늘의 이름을 팔아 이웃의 생명을 위협하는 세상이니, 법률의 세계에선들 무엇이 다르겠으며 무엇을 얼마나 기대할 수 있겠는가. 실종된 정의와 양심을 회복하기는커녕 현실이라는 미명 하에 정의와 인권의 본질을 전도시키는 일도 다반사니 말이다. 철학자 가다머가 자신의 책 <진리와 방법>에서 말하고 있듯이, 우리는 ‘방법’이 ‘진리’를 압도하는 세상 속에서 그 세상의 방조자로 산다. 그리고 그래서는 안 될 사람이 음성적으로 더 그렇게 되도록 조장하기도 한다. 그러니 법조인과 교회가 그렇게 많아도 사회는 별반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아니 법조인과 교회의 숫자는 인간답지 못한 세상의 척도로까지 쓰이기도 한다. 그런들 어쩌랴. 상황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정의와 인간의 근본 가치가 회복되기를 희망하며 일할 수밖에 없는 것이 기독교인의 팔자이기에, 나는 그저 내 식대로 기독교적인 길을 갈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은 분명하다. 그 말이 다소 거창하다면, 최소한 나 때문에 누군가가 상처받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진리는 죽임이 아니라, 이웃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생명을 살리는 아주 작고 단순한 데 있다는 사실만이 명백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