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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MB, 뭐가 '국가정체성'인가(이유정 인하대 법대 교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4:55
조회
180

이유정/ 변호사, 인하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광화문에 수십만 개의 촛불이 모여 쇠고기 재협상을 외치던 날, 청와대 뒷산에 올라 많은 반성을 했다는 대통령은 그로부터 닷새 만에 “국가 정체성에 도전하는 시위나 불법 폭력시위는 엄격히 구분해 대처해야 한다"고 대국민 선전포고를 했다. 도대체 대통령이 생각하는 국가 정체성이란 것이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다. 국어사전에서는 정체성의 뜻을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 “그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라고 풀이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변하지 않는 본질은 “민주공화국”이라는 것이고, 민주공화국이란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주권의 운용이 국민의 의사에 따라 이루어지는 나라를 말한다.

6월 한 달 내내 촛불시위에 나선 국민들이 가장 많이 외친 구호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것이었다. 국민들의 요구는 간단하다. 정부가 민주공화국의 정부로서 정체성을 가지라는 것이다. 국민들의 뜻을 존중하고, 국민의 안전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값싸고 질 좋은 미국 쇠고기’를 홍보하면서 미국 축산업자들의 이익을 대변하거나, 미국 정부가 보증만 해주면 안심해도 좋다는 식으로 미국정부의 선처에 기대지 말고 한 나라의 정부답게 검역주권을 행사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요구를 국가의 정체성에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다니, 그동안 대통령이 무엇을 반성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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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국무회의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 그는 이날 "일부 정책에 대해 비판하는 시위는
정부 정책을 돌아보고 보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지만 국가 정체성에 도전하는 시위나
불법 폭력시위는 엄격히 구분해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 출처 - 청와대


 

대통령은 아마도 대한민국과 미국이 같은 나라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우리나라 국민들도 미국 사람처럼 미국말 하고(심지어 우리나라 역사도 영어로 배우고), 미국 사람들이 먹는 소고기 먹고(심지어 안 먹고 버리는 뼈나 내장도 아까우니 먹어주고), 미국 사람들이 원하는 일만 해 주면 진짜 미국처럼 강대국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런 친미 사대주의적인 태도가 국민들의 자존심을 건드려 반미성향이 없던 사람들까지도 반미로 돌아서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대통령이 국가정체성 운운하는 시대착오적인 발언을 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수구언론들이 부시대통령의 방한이 성사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쏟아내는 모습을 보면 민망하다 못해 얼굴이 화끈거린다. 퇴직을 앞두고 이삿짐 쌀 준비를 하는 미국 대통령을 이렇게 애타게 기다리는 꼴이라니....

가르쳐주지 않아도 국민들은 이미 알고 있다. 이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사실을. 이 나라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정부의 역할은 국민들의 뜻에 따라 통치하고, 국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어떤 목적을 위해서든 국민들의 생명과 건강을 내팽개치는 일을 정부가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또한 국민들은 잘 알고 있다. 촛불에 놀라 미국으로 달려간 협상단이 가져온 보따리에 실은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허울 좋게 내세운 민간자율합의라는 것이 사실상 아무런 구속력이 없다는 사실을. 전국 수만 곳의 음식점에서 원산지 표시가 제대로 지켜지는지 여부를 감시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국민들의 의사와 안전은 안중에도 없이 덜커덕 퍼주기 협상을 하고 돌아와 국민들의 자존심을 짓밟고 대한민국 정부의 정체성을 근본부터 흔들어놓은 장본인은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대통령이라는 사실도 또한 알고 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계속되고 있는 혼란은 전적으로 대통령의 실정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도 대통령이 국가 정체성을 운운하며 국민들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다면,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국민의 뜻을 저버린 권력에 대한 준엄한 심판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기에, 국민들은 앞으로도 촛불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